마음 가는 대로 산다는 것 - 구겐하임 문학상 작가 앤 라모트의 행복론
앤 라모트 지음, 이은주 옮김 / 청림출판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오늘처럼 바람이 불고 날씨가 궂어 야외활동은 도무지 엄두를 내기 어려운 날에는 뭔가 신나는 일이 없을까 혹은 이유도 없이 속이 출출하고 허하여 뭔가 맛있는 음식이 없을까 찾게 된다. 방금 밥을 먹고 돌아섰거나 더위에 지쳐 움직일 의욕도 없으면서 말이다. 더위는 마치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족쇄처럼 내 몸에 착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고 나는 이미 오래 전에 항복을 선언한 것으로도 모자라 '네가 하자는 대로 다 할게.' 충성서약까지 하기에 이른다. 이런 날씨에 사람들은 대개 마약이나 술에 취한 것처럼 날씨에 취하여 도통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이 몇 시인지, 나는 뭐가 먹고 싶은 것인지, 구체적으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비단 오늘처럼 날씨가 궂은 날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인생 전체의 비교적 긴 여정에서도 사춘기의 몇 년 동안, 혹은 젊은 날의 몇 년, 아니면 쉰을 넘긴 장년의 몇 년을 마치 술이나 마약에 취한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흘려 보내는 경우가 있다. 그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그 당사자에게 떠넘기고 비난이나 멸시를 달게 받도록 강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이따금 든다. 어쩔 수 없는 환경이, 또는 피할 수 없는 사회제도가 한 개인을 극한으로 몰아갔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변명 같지만 내가 날씨에 취하여 멀쩡한 하루를 무의미하게 흘려 보낸 것처럼 말이다.

 

앤 라모트의 <마음 가는 대로 산다는 것>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미를 조금쯤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비록 나는 지금 두서도 없이 횡설수설 하고 있지만 말이다. 앤 라모트의 자서전과도 같은 이 책은 작가의 불운했던 과거를 가감없이 기록하고 있다. 그녀가 그렇게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부모의 영향이 컸다. 산을 좋아하고 조류에 조예가 깊었으며 박식하고 잘생긴 작가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더없이 자상했던 반면 지나칠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같이 마약을 하거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도 다반사였고, 딸에 대한 친구들의 지나친 놀림도 그냥 받아 넘겼다. 단 종교에 관한 한은 무지하고 세련되지 못한 자들이나 신앙을 갖는 거라는 오만함을 보였다. 엄마는 피아노 솜씨가 뛰어났고 빈민촌 아이들을 위한 독서반을 운영하는 등 활동적이고 지적인 사람이었다. 다만 부부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해 남편을 붙잡느라, 변호사가 되려고 법대 진학에 애쓰느라 자식들을 제대로 돌볼 틈이 없었다. 그렇게 달랐음에도 부부는 성적이 우수했던 앤이 B+가 하나라도 적힌 성적표를 내보이면 낙제라도 한듯 바라보는 것으로 딸을 기죽이는 공통점을 보였다.

 

"나는 내가 조금만 더 잘할 수 있다면 간절히 원하는 것들이 꼭 이루어질 것 같았다. 가족간의 결속감, 푸근한 마음의 평화, 우리집에는 별 문제가 없으며 아빠는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언젠가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거란 믿음...... 마약이 도움을 주었다. 내가 괜찮은 인간이며 삶이 견딜 만하다는 기분, 그런 느낌을 갖게 해주는 데 마약 만한 것이 없었다." (p.26)

 

정서적 배고픔을 채우려는 끊임없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안정의 욕구를 가정에서 채우지 못한 어린 소녀가 바깥으로 나돌기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내아이들에게 벗은 몸을 보여주고 야구 카드를 얻어내거나, 테니스 시합 전 날 친구와 술을 진탕 마시거나, 남자애들과의 성적인 만남을 갖거나, 나무 그늘에 앉아 마약을 하거나, 약물중독과 폭식, 유부남과의 연애, 임신과 낙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기 이야기를 써내려간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어느 한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누군가로부터의 사랑을 간절히 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랑을 받고 싶어 발버둥을 쳤던 작가의 처절한 몸짓이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지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이혼과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가장 친했던 친구 패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충격은 작가 자신을 삶의 밑바닥으로 내몰았던 듯하다.

 

"패미의 유골함을 받아들 무렵에는 나에게는 샘이 잇었다. 따라서 삶의 불가해성과 혼돈을 좀 더 잘 견뎌낼 수 있었다. 그것이 아이들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들 가운데 하나다. 아이를 낳고 나면 세상이 훨씬 덜 정연하고 덜 이성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p.107)

 

아들 샘이 태어나면서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구원을 받은 셈이었지만 이렇듯 우리는 가족으로 인해 삶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수도, 그 밑바닥에서 땅을 박차고 올라올 수도 있는 것이다. 운명이라고 치부하며 쿨하게 넘기기에는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이지, 가족이란 용서의 훈련장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식구들의 온갖 괴상한 언행과 고집을 눈감아주게 된다. 그러고나면 식구들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대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결국에는 자기 자신한테도. 그것은 트랜스미션이 자주 고장나는 헌 차의 운전법을 익히는 것과 같다. 그 차의 기어 변환 요령을 마스터하면, 다른 어떤 차도 몰 수 있는 것이다." (p226)

 

삶에 대해서, 행복에 대해서, 또는 슬픔과 용서에 대해서, 신과 기도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웠던 작은 깨달음들을 작가는 이제 유쾌하게 말한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보트하우스에서 술과 약물에 취해 죽음 일보 직전까지 이르곤 했던 앤 라모트는 이제 없다. 오늘처럼 바람이 불고 날씨가 궂은 날에는 정말이지 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앤 라모트의 삶에서 어느 한 시절이 그랬던 것처럼.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기구한 삶을 살아서 작가가 될 수 잇었던 것인지, 작가가 될 운명이었기 때문에 기구한 삶을 살게 된 것인지, 하는 생각 말이다. 창밖을 스치는 바람은 거친 숨을 토하는 듯 사납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