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의 가장 완벽한 순간
애너 퀸들런 지음, 유혜경 옮김 / 뜨인돌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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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과 동시에 들어갔던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모 결혼정보회사에서 근무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다니던 회사에서 명예퇴직이나 문책성 해고를 당한 것도 아닌데 친구는 어느 날 갑자기 냅다 사표를 던지고는 두어 달 동안 배낭여행을 떠났었지요.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여간한 배짱이 아니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와 안면이 있는 친구들은 다들 그를 부러워했던 것 같습니다. 개중에는 물론 미친 거 아니냐, 비웃는 친구도 더러 있었지만 말이지요. 그러던 친구가 어느 날 돌연 까맣게 탄 몸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취직했노라 연락을 했고, 모 결혼정보회사의 명함을 보란 듯이 돌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회사나 직책이 모두 그의 전공이나 경력과는 무관한 듯 보였었기에 그 자리에 참석했던 친구들은 다들 뜨악한 표정으로 그의 명함을 받아들었습니다.

 

그와의 만남이 있은 지 얼마 후  그의 성격을 잘 안다고 자신했던 우리들은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사표를 던질 거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었고 다만 그 기간이 한 달, 두어 달, 길어야 일 년 등으로 분분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지금까지도 그 회사에 출근하고 있습니다. 전혀 예상에 없던 일이었지요. 이따금 그 친구와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영 멋쩍어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도 농담삼아 "혹시 재혼 상대자가 필요하면 너한테 꼭 연락할게." 한마디 툭 내뱉곤 합니다. 그러나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요즘의 젊은이들은 결혼에 대한 생각도, 배우자를 선택하는 조건도 우리가 젊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음을 느끼게 했습니다.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초혼이든 재혼이든 일단 결혼정보회사의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모두 소설 속에서나 나옴직한 어떤 순수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고 합니다. 상대방이 본인들이 요구하는 일정 조건에 맞지 않는다면 만나는 것 자체도 꺼려한다는 것이지요. 한번 선을 뵌다고 얼굴이 닳는 것도 아니지만 시간과 돈의 낭비라는 생각이 팽배하여 만나볼 상대방에 대하여 꼬치꼬치 캐묻기 일쑤이고 미안한 기색도 없이 번번이 퇴짜를 놓곤 한답니다. 하여, 있지도 않은 사실을 꾸며내거나 과장하여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말을 친구로부터 들었습니다.

 

나는 친구와의 대화에서 문득 애너 퀸들런의 <내 생의 가장 완벽한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한 권의 책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브로셔나 리플렛이라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릴 듯한 아주 얇은 책이지요. 그러나 그 책의 내용마저 단순하고 가볍기 이를 데 없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애너 퀸들런의 또다른 책 <어느 날 문득 발견한 행복>만큼 가볍지만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책입니다.

 

"완벽해지기 위해 정말로 해야 할 일은 주로 당신이 살고 있는 시간과 장소의 시대적인 흐름을 읽고, 그 시대사조가 주문하거나 요구하는 것에서 최고가 되는데 필요한 가면을 쓰는 것입니다. 그것만 하면 됩니다. 이런 요구들은 물론 시시각각 변하지만, 당신의 머리 회전이 빠를 때는 그것들을 읽을 수도 있고 필요한 흉내를 낼 수도 있을 테지요."

 

어떻습니까. 책에서 작가가 말하려는 내용이 대충 감이 오지요? 작가는 학창시절 매사에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이었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어려서는 결코 대답할 수 없었던 이 질문에 대해 작가는 이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완벽해지기 위해서. 단순히 그것뿐입니다. 누군가의 기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서, 자신이 속한 사회나 조직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것이 나 자신인 양 착각하면서 부단히 노력했었다는 사실을 작가는 깨닫습니다. 그것이 과연 작가 혼자만의 경험이었을까요?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순간순간 되묻게 됩니다.

 

"터무니없고 사람을 지치게 하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일을 포기해 보세요. 그것은 삶의 너무 많은 부분에서 우리를 집요하게 쫓아다닙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우리의 변덕과 약점과 미지의 세계로의 영웅적인 도약을 의심하게 하고 헐뜯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런 완벽함에 대한 추구입니다. 쉰이나 예순 살이 되면 우리는 대부분 대여섯 살 때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끔찍한 일이지요"

 

나는 아직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한 까닭에 작가의 말처럼 지난 과거가 충분히 끔찍하다고는 생각되어지지 않지만 ,'무엇 때문에?' 나도 모르게 혼자 묻는 횟수가 점차 늘어나는 게 사실입니다. 그것은 내 삶을 부정하고 언젠가 본전 생각이 나게 되는 순간이 도래할 것이라는 슬픈 예감, 또는 그 전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는 <어느 날 문득 발견한 행복>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영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영혼을 생각하며 사느니 이력서에 자랑스럽게 쓸 일을 하는 게 쉽겠지요. 하지만 추운 겨울날, 이력서는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나는 오직 마지막 한 문장에 눈길이 머물렀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추운 겨울날, 이력서는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그 말이 나를 한동안 붙들었던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자녀들에게 삶의 여정 내내 자신을 보호하는 등딱지로 몸에 익힌 습관과 매너리즘의 혼합물, 기대감과 두려움의 혼합물과는 전혀 다른 당신의 참된 자아를 보여줄 수 있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편협하고 인색한 이 세상이 기대하는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말라고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어느 때부턴가 내 삶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습니다. 그러나 겁 많고 용기가 부족했던 나는 '기대감과 두려움의 혼합물'을 내 참된 자아인 양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나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살고 있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내 삶에 한없이 비겁했던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히 아들에게 '편협하고 인색한 이 세상이 기대하는 것에 신경을 쓰지 말라'고 충고하지 못합니다. 애너 퀸들런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어쩌면 나의 비겁함이 아들에게 대를 이어 상속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아직 다가오지 않은 많은 후회가 언젠가 나를 삼켜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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