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마치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간편한 운동복을 입고 인근의 산을 오릅니다.  아주 오래된 습관이자 취미생활인 셈이죠.  아침과 한낮의 기온차가 심한 요즘은 초여름을 방불케하는 한낮과는 달리 아침에는 제법 한기가 돌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옷을 두껍게 껴입었다가는 산을 다 오르기도 전에 흥건한 땀으로 목욕을 하게 됩니다.  저는 오늘도 간편한 차림으로 기분 좋은 한기를 느끼며 산행에 나섰습니다.

 

작년에는 4월 초순에도 눈이 내렸었는데 올해는 3월 말부터 기온이 높아진 탓에 산에는 봄꽃들이 다투어 피고 있습니다.  진달래는 말할 것도 없고 산벚꽃이며 민들레, 싸리꽃까지 하얗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요즘의 산은 그야말로 잘 가꾸어진 정원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하나 아쉬운 점은 날씨가 풀리면서부터 등산객이 부쩍 늘었다는 점입니다.  한겨울에는 혼자만의 여유로운 산행을 즐길 수 있었는데 지금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지요.

 

제가 다니는 산은 대략 왕복 5km의 거리로 시간으로 따지면 1시간 20여분이 걸립니다.  산길은 그닥 넓지 않아서 두 사람이 함께 걷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능선을 따라 한참을 걷다 보면 마지막에는 가파른 고개가 나타납니다.  저는 그 고개를 올라 숨을 돌리고는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곤 합니다.  아무튼 오늘도 능선을 따라 걷고 있는데 저 멀리 주황색 등산복을 입은 사람이 걷고 있었습니다.  산길에 익숙하지 않은지 걸음은 빠르지 않았었죠.

 

저와 앞서 가던 그 여자분과의 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깝게 좁혀졌습니다.  일부러 꽉 끼는 등산복을 입었던 것인지 아니면 등산복보다 체구가 커서 그랬던 것인지 그 분의 엉덩이 부분에는 속옷 라인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고, 민망함에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그 여자분도 자신의 엉덩이 쪽이 몹시 신경쓰였던지 한 손으로 엉덩이 부분을 가릴려고 애쓰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서로 어색하게 한참을 걷다가 마지막 고갯길에서 그분은 갑자기 멈춰서서는 나에게 앞서 가라는 듯 딴짓을 하고 있었죠.

 

저는 그분과 다른 코스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등산을 마치고 되돌아 오는데 앞서 걷는 그분을 또 다시 만났습니다.  나는 걸음을 빨리하여 그 여자분을 앞질렀고, 서둘러 산을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이번 주 월요일부터 이런 비슷한 일을 몇 번 겪고나니 이젠 산행길이 그닥 즐겁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시간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더 일찍 일어난다는 것은 무리가 있고, 늦추자니 그것도 어렵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제가 꼭 무슨 변태 성욕자나 관음증 환자로 취급받는 듯한 찝찝한 기분입니다.  그런 옷을 입은 여자분들이 더 이상 산에 오르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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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2014-04-02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좀 즐거운 경험으로 생각하시면, 그것도 죄가 될까요?

꼼쥐 2014-04-03 21:30   좋아요 0 | URL
본인이 죄책감을 느끼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사람에 따라 많이 달라질 듯싶어요. 어찌 생각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인데 말이죠, 제가 소심해서...

비로그인 2014-04-02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옷 입는 추세가 워낙 타이트 한 건 있어요. 게다가 오르막에서 그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헐렁하게 입어도 엉덩이 라인이 눈앞에 떡하니 보일 수밖에 없으니 서로 참, 민망하기도 할 거예요. 인적없는 작은 등산로에서 그렇게 맞딱드리면 남자든 여자든 서로 신경쓰이기 마련이구요(쓰신 페이퍼 다시 복습하고 있네요 제가 ㅎㅎ) 먼거리도 아닌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고 있다고 느끼면 저라도 좀더 빨리 걷던가 아예 뒤쳐지는 상황을 만들던가..(사진 같은 거 찍는 척 하면서) 그렇게 할 거 같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아예 대놓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죄송해요.(뭐가 죄송한지는 몰라도) 먼저 지나 가세요...

(물론, 상대방이 아주 위협적으로 보인다거나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면 이런 말도 못하겠지만요)


꼼쥐 2014-04-03 21:33   좋아요 0 | URL
제가 다니는 등산로는 워낙 폭이 좁아서 비켜설 만한 장소를 찾기도 어렵답니다. 그저 뒤에서 서로 민망하지 않게 행동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셈이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