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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 직업이 뭐이가?
표재순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6년 8월
평점 :
우리가 기억하는 삶의 에피소드에는 언제나 자신이 즐겨 듣던 노래나 자주 보았던 드라마, 벽에 걸려 있던 그림 한 점, 우연히 보았던 영화나 연극 등과 결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몇몇 기억에는 그런 것들과 더불어 그 순간에 먹었던 특별했던 음식이 더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추억의 대부분은 그 시절에 유행하던 예술의 한 토막을 실마리로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컴퓨터 기억장치에 폴더의 이름을 지정하는 것과 같아서 수많은 기억 속에서 하나의 색인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예컨대 '서울올림픽 개회식의 굴렁쇠 소년'이나 당시의 올림픽 공식 주제가였던 '손에 손잡고(Hand in Hand)'를 떠올리면 올림픽 기념우표를 손에 넣었던 친구의 뻐기는 듯한 얼굴 표정이 나도 모르게 재생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서 예술은 추억을 떠올리는 중요한 실마리 역할을 하면서 우리 삶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했던 표재순 연출가와 같은 이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삶을 구성하는 많은 추억의 색인표에는 그가 만든 작품명이 줄줄이 끌려 나올 테니까 말이다.
"경기장에 모인 10만 관중이 일제히 탄성을 쏟아냈다. 전 세계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22억 명도 숨을 죽였다. 한쪽 모서리에서 나타난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경기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렀다. 그것은 하나의 점이었다. 빨간색 챙이 달린 흰 모자를 쓰고 하얀색 반소매 상의와 반바지에 흰 양말과 신발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소년이 오른손으로 굴렁쇠를 굴리며 움직였다. 능숙한 솜씨였다. 3분의 2지점쯤 갔을까? 소년이 멈춰 섰다. 굴렁쇠를 오른쪽 어깨 위로 올린 채 관중석을 향해 왼손을 흔들었다. 박수갈채가 잠실벌을 가득 채웠다. 소년은 다시 굴렁쇠를 굴리며 성화가 타오르는 방향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하나의 선이었다. 이 장면은 서울올림픽 개회식의 백미로 꼽힌다. 화려함도 웅장함도 기발함도 없어 보이는 굴렁쇠 굴리는 한 소년의 평범한 이 모습이 왜 그토록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 걸까? 당시 나는 개회식 제작단장으로 총연출을 맡고 있었다. 모두가 감격스러워하는 열기의 현장 속에서 내 가슴은 새가슴처럼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p.31~p.32)
1937년 생, 구순에 가까운 원로 연출가 표재순의 자전 에세이 <갸, 직업이 뭐이가>의 서두는 이렇게 이 시대의 선명한 기억 속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으로 시작된다. 음악극, 뮤지컬, 오페라, 마당놀이 등 장르를 불문하고 자신의 열정을 불태웠던 무대 연출가였고, 서울올림픽, 한일 월드컵 등 국가적 행사를 진두지휘했던 거장이었으며, 평균 시청률 50%를 상회했던 '모래시계'를 탄생시킨 명제작자였고, 세종문화회관 초대 이사장 등을 역임한 문화행정가이기도 했던 표재순 연출가는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에게 추억의 몇몇 장면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가 메가폰을 잡았던 현장들을 생생하게 회고하고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그는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기억을 관통하는 추억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는 독자는 글에서 느끼는 감동이 아니라 자신이 불러낸 추억의 몇몇 장면을 통해 가슴 먹먹한 감동을 맛보게 된다.
"출범 5년 차였던 신생 방송사 SBS는 '모래시계'의 대박에 힘입어 KBS, MBC를 따라잡으며 전국 방송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신영균 회장과 나 그리고 송지나 작가와 김종학 PD는 이 드라마를 정치 드라마나 시국에 편승한 그런 드라마로 만들려 했던 게 아니었다. 젊은 남녀 세 사람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드라마였다. 한 명은 깡패고, 한 명은 검사고, 이 두 친구가 좋아했던 여인이 등장하다 보니 시대 상황이 배경으로 나온 것인데, 의도치 않게 시국 드라마가 되어 버렸다. 비극과 혼돈이 공존하던 질풍노도 시기, 똑같은 시대적 상황이엇으나 한 번은 조직을 떠나야 했던 쓰라린 기억으로 한 번은 조직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환희의 기억으로 남게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로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p.266)
'제1막 무대는 항상 예측불허다', 제2막 좋은 만남이 좋은 연출을 낳는다', 제3막 드라마는 시대를 담는 그릇이다', '제4막 배우는 가도 무대는 남는다', 제5막 왕십리에서 DMZ까지, 모든 것이 무대였다'의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45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이지만, 평생 기발한 아이디어와 참신한 구성을 기획하면서 살아온 까닭인지 책의 구성 역시 독자들로 하여금 책을 손에서 쉽게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의 힘이 작동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명절 전후에 짬이 날 때마다 간간이 읽었음에도 너무도 빨리 읽은 듯한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나는 작가의 책을 읽었던 게 아니라 작가와 함께 내 추억의 몇몇을 들춰보았는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내 인생에는 낭비가 참 많았던 것 같다. 'Wasted Life', 낭비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연극이면 연극, 뮤지컬이면 뮤지컬, 드라마면 드라마, 행사 이벤트면 행사 이벤트, 이렇게 외골수처럼 쭉 한길을 가야 하는데, 나는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다 하면서 갈지자로 걸어왔다.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다 놓친 것이 많은 바보 같은 삶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갸, 직업이 뭐이가?" 장민호 선생이 나를 두고 이렇게 물은 건 그런 까닭에서였을 것이다." (p.449 '에필로그' 중에서)
누구에게나 100% 만족한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지나고 보면 아쉬움과 후회가 남게 마련이다. 그러나 후회만 말하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고, 성공만 말하기에는 인생은 한없이 덧없다. 그러므로 나는 구순의 연출가가 들려주는 그의 성공과 실패에 집중하기보다 그가 참여했던 여러 드라마나 행사의 장면들을 떠올리며 어리거나 젊었던 당시의 내가 겪었던 추억들을 회상했다. 말하자면 나는 책을 읽었던 게 아니라 나에게 얽힌 추억을 읽었던 셈이다.
일본 나고야 아시안게임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전달되는 중계영상을 보면서 매 순간 일희일비하는 듯 보이지만, 미래의 관점에서 지금을 본다면 그 영상 하나하나가 우리 기억의 색인표가 되어 보고픈 추억을 소환할 때 실마리로 작동할 것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날 저녁, 금메달을 목에 건 대한민국 국가대표 중 한 선수의 환한 표정이 우리들 각자가 겪었던 서로 다른 추억을 먼 훗날 마치 어제 일인 양 또다시 불러낼지도 모른다. 하나의 이벤트는, 시대를 이끌었던 하나의 예술은 우리들 각자의 추억을 소환하는 하나의 색인이 되는 것이다. 표재순 연출가의 자전적 에세이가 그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