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
이랑 지음 / 이야기장수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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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맹이는 없고 형식만 존재하는 삶이 기약도 없이 이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내 삶은 뱀의 허물이나 매미의 껍질처럼 가볍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영혼도 없이 출근을 하고, 뭘 했는지 기억도 하지 못하면서 누군가가 요구하는 일을 어떤 감정도 담지 않은 채 꾸역꾸역 하다 보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하는 심정으로 퇴근을 한다. 그런 날들이 쭉 이어진다.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왜 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을 가질 필요조차 없다. 어차피 시간은 물 흐르듯 흐르고 나의 가벼운 삶은 종이배처럼 떠다닐 테니까. 그리고 시간의 여울만 만나지 않는다면 내 삶의 종이배도 이따금 기우뚱거릴 수는 있어도 시간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지는 않을 테니까.


"가부장제와 남아선호사상에 물든 집안에서 태어난 우리 엄마 김경형의 '미친년 인생'은 엄마 탓이 아니다. 엄마 탓은 아니지만 엄마가 미친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잔혹한 굴레 속에서 나 또한 미친년으로 자라났다. 그나마 나는 내 이야기를 세상에 꺼낼 수 있는 미친년이라 다행이다. 하지만 나뿐 아니라 엄마의 미친년 역사도 무척 소중하기에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다."  (p.51)


가수이자 작가, 영상 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이랑의 에세이 <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를 읽는 독자라면 이 책의 저자가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가수 이랑과 동일인이라는 사실에 다소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방송에 노출되던 그녀가 가수로서 우쭐대거나 거들먹거린 적은 없지만 사람들에게 꽤나 특별하게 들렸던 노래 '늑대가 나타났다'를 작사, 작곡한 것은 물론 직접 노래까지 불렀던 천재 아티스트의 이면에 그처럼 아픈 성장 스토리가 있었다는 건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폭력적인 아빠와 우울증을 앓던 엄마. 엄마의 곪은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자라다가 결국 자퇴를 하고 집을 뛰쳐나가야만 했던 이랑의 성장기는 아프다 못해 가슴 답답하다.


"언니는 가족이 싫다고 10대 때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내가, 부럽고 미웠을까.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동생을 돌보느라 정신없던 언니에게 나는 수차례 '그만두라'고 말을 했다. 언니는 그때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가족이 필요하다'며 울었다. 언니가 필요로 했던 가족은 아마 건강한 가족이었겠지만, 우리가 가진 가족은 너무 허약했고 결핍투성이였다. 언니는 그들에게 힘을 보태느라 자기 힘을 다 소진해버렸다. 나는 언니의 죽음이 '자살'이라기보다 힘이 다 빠져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p.110)


폭력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3남매. 특수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언니와 가수이자 작가인 이랑 본인과 장애를 안고 태어난 남동생 이완. 작가는 자신을 포함한 3남매를 혈연이 아닌 '피해생존자 동지'로서 사랑한다고 말한다. 명문대와 명문여대 국어국문학과를 다녔던 아빠와 엄마 덕분(?)에 집안에는 작은 도서관처럼 많은 책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아빠와 심한 우울증으로 집안일에서 손을 놓다시피 했던 엄마로 인해 집은 언제나 좁고 지저분했다. 그러나 깔끔한 성격의 작가가 달아날 곳은 없었다. 엄마 옆에 앉아 책을 읽고 노래를 불렀다.


"나는 자신의 약함을 아는 인간을 좋아한다. 약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탐구하는 인간이 좋다. 살아나가는 두려움을 아는 인간이 좋다. 살아갈 방법을 무언가에 의탁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 생각하려는 인간이 좋다. 자신의 방법을 전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이 좋다. 더 탁월한 방법으로 말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 좋다. 말과 글이 좋다. 말과 글을 좋아하는 인간이 좋다. 겪지 않은 이야기로 끝없이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이 좋다. 나는 인간으로, 현재 존재하는 인간들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이다음을 살아갈 인간들을 상상하면서."  (p.205~p.206)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다. 길지 않은 연휴 탓인지 사람들은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않은 채 차분한 휴일을 보내겠다고 다짐하는 분위기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과 친인척들. 가깝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과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사랑만 주기에도 이번 연휴는 그 기간이 너무나 짧은 듯하다. 추석 명절을 보내고 다시 일터로 복귀한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와 사랑의 열기가 가득했으면 좋겠다. 이랑의 노래 '잘 듣고 있어요'를 들으며 오늘 내가 읽었던 <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를 떠올린다.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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