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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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좋은 생각이란 여러 생각의 흐름에서 생각 하나가 어쩌다 내 의식의 갈고리에 얻어걸리는 기막힌 우연의 결과일 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달아나려는 생각을 꼭 붙잡고야 말겠다는 적극적인 의지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좋은 생각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진배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좋은 생각이 내 의식의 그물에 걸려들 때는 주로 산을 걷거나, 멍하니 넋을 놓고 있거나, 음악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한마디로 자신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게 되는 그런 순간이다. 말하자면 좋은 생각이란 나조차도 내려놓은 찰나와 같은 순간에 번개가 치듯 전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아무리 새롭고 재미있는 일도 몇 번 반복되는 순간 쉽게 질리고 마는 성마른 내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아침 산행을 이어오게 된 것도 어찌 보면 걷기에서 얻을 수 있는 그와 같은 큰 혜택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람은 크든 작든 짐을 지고 있다. 단, 그 짐은 옆에서 보면 내려놓으면 될 것 같지만 그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색한다. 그것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p.346)


우리에게 <고백>을 쓴 추리소설 작가로 잘 알려진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휴식이나 쉼의 의미로 읽힐 수 있는 책이다. 가벼운 배낭을 메고 동네 뒷산의 평탄한 길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가볍게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책인 것이다. 결말에 대한 아무런 힌트도 없이 추정할 수 있는 어떤 작은 단서조차 꽁꽁 숨겨야만 하는 추리소설 작가가 이처럼 책을 이해하기 위한 별다른 노력 없이도 작가의 의도를 너무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중 소설을 쓴다는 건 작가의 능력을 가늠케 하는 기분 좋은 반전이다.


“산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다만, 누가 다치기보다는 치유되는 이야기요.”
_미나토 가나에 (출간기념 인터뷰에서)


책은 '묘코 산', '히우치 산', '야리가타케', '리시리 산', '시로우마다케', '긴토키 산', '통가리로', 가라페스에 가자' 등 8개의 소제목으로 구성된 소설집이다. 직장 동료이지만 다소 어색했던 두 사람(리쓰코와 유미)이 산을 오르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의 묘코 산, 우연히 참가한 단체 미팅에서 만난 커플(간자키와 미쓰코)이 등산 데이트에 나서는 내용을 다룬 히우치 산, 야리가타케 정상 도전에 번번이 실패한 '나'는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결심으로 세 번째 정상 도전에 나섰지만 우연히 만난 중년 커플로 인해 방해를 받는다는 내용의 야리가타케, 서른다섯의 독신 번역가이자 아버지의 양파 농사를 돕고 있는 미야카와 유미가 의사 남편을 둔 언니의 제안으로 동반 등산에 나선다는 내용의 리시리 산, 리시리 산에 올랐던 유미가 이번에는 언니와 그녀의 딸인 나나카까지 동행하여 등산에 나서는 시로우마다케, 남자 친구인 다이스케와 산에 오르는 마이코의 이야기가 담긴 긴토키 산, 웹사이트 '여자들의 등산일기'에 모자를 만들어 팔고 있는 유즈키가 뉴질랜드 트래킹 투어에 참가한다는 내용의 통가리로, 언니와 함께 리시리 산과 이어서 시로우마다케에 오른 후 본격적인 등산 계획을 세울 겸 등산 친구를 사귀기 위해 등산 페스티벌에 참여한다는 내용의 '가라페스에 가자' 등 시종일관 소설은 여자들을 주인공으로 그들만의 고민과 인생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의 산문집 <걷기 예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발걸음을 앞으로 밀어내는 것은 그 무시무시한 괴로움의 씨앗이 아니라 자기 변신, 자기 버림의 요구,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길과 몸을 한 덩어리로 만드는 연금술을 발견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여기서 인간과 길은 행복하고도 까다로운 혼례를 올리며 하나가 된다."  우리는 어쩌면 그날이 그날 같았던 지난날의 나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즐겁고도 가벼운 그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산에 오르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지금까지의 인생에 비슷한 장면이 몇 번이나 등장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같이 놀고 싶으면 끼워달라고 하면 그만이고, 다른 그룹 아이들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하면 참가하면 되는데, 먼 곳에서 바라보고 있을 뿐. 나는 외려 누가 귀 기울여 듣느냐는 듯 관계없는 책을 펼치는 그런 아이였다."  (p.363)


반짝 추웠던 날씨가 풀리자 미세먼지가 극성이다.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지난밤 개기월식을 보면서 대학 기숙사에 있는 아들과 전화 통화를 했었다. 아들도 역시 도서관 옥상에서 개기월식을 구경하고 있다고 했다. 붉게 변하던 달이 점차 흐려지더니 마침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생도 저 달과 다르지 않겠지?' 생각했었다. 친구들과 함께 개기월식을 보고 있었다는 아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갖기에는 아들에게 남은 시간이 너무도 많은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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