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는 이렇게 쓴다
나카무라 구니오 지음, 이현욱 옮김 / 밀리언서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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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비단 책을 읽는 데서 그치지는 않는다. 꾸준히 읽다 보면 읽는 즐거움을 넘어 쓰는 즐거움에 이르게 되고, 꾸준히 쓰다 보면 쓰는 것이 곧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스스로 자각하게도 된다. 이와 같은 연쇄는 다른 누군가의 지침이나 권유에 의해 일어나지는 않는 듯하다.  스스로에 의한 내면적 자각이나 외부로부터의 어떤 자극이나 그로 인한 결심에서 비롯된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좋은 습관이라는 게 대개 자신의 굳은 결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나카무라 구니오의 <하루키는 이렇게 쓴다>를 읽은 독자라면 혹 책상 위에 놓인 빈 종이나 컴퓨터의 여백에 뭔가 끄적이고픈 충동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설사 별 내용도 없는 낙서 수준의 글일지라도 쓰고 싶다는 충동은 아무 때나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일은 아니기에 어쩌면 그것을 허투루 보아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쓰고 싶다는 느낌이 내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체험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쓰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테니까.

 

"나는 문장 쓰는 법의 많은 부분을 하루키에게 배웠다. 심플하고 음악처럼 리드미컬하다. 번역체 같기도 한 특이한 문체로 장황하게 묘사하는 소설이나 에세이도 '문장의 교과서'라고 생각하면서 읽어보면 훨씬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p.4 '프롤로그' 중에서)

 

나카무라 구니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분석하고, 작품에서 보이는 하루키만의 문체의 특징이나 규칙을 자신의 문장에 적용해서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저자가 발견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법은 무려 33가지에 이른다. 수수께끼 같은 긴 제목을 붙이는 것부터 구체적인 '연도'를 쓰는 것이라거나 갑자기 소중한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 갑자기 전화가 걸려오거나 술의 종류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기 등 작품의 일부만 읽어도 '아, 이것은 하루키의 작품이구나' 하고 단박에 눈치챌 수 있는 여러 특징들을 저자는 적절한 인용과 설득력 있는 근거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서는 항상 갑자기 무언가가 사라진다. 고양이가 사라지고, 아내가 사라지고, 색이 사라진다. 그렇게 마법처럼 여러 가지가 차례차례 사라지는 것이 하루키식 '양식'의 아름다움이다." (p.80)

 

사실 하루키 문장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일상의 디테일에 있다. 세탁, 다림질, 요리, 청소 등 단조롭기 짝이 없는 집안일도 그의 손을 거치면 다채롭고 특별한 이야기로 되살아난다. 이와 같은 디테일은 '장소'의 묘사에 있어서도, 음식이나 와인, 재즈와 같은 고전 음악의 묘사에 있어서도 하루키 특유의 꼼꼼함이 빛난다. 그밖에 수수께끼처럼 긴 제목을 통해 뭔가 일어날 것 같은 암시를 주는 방법, 구체적인 연도를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의 기억력을 상기시키는 방법, 'BMW' '창유리' 등 강력한 키워드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소환하는 방법, 명작을 인용해 격조를 높이는 방법 등 소설가로서의 하루키는 독자의 의식을 사로잡고 자신의 작품을 끝까지 완독할 수 있는 장치를 작품 곳곳에 숨겨두고 있는 것이다.

 

보통 우리가 누군가에게 '누구누구의 키드'라는 말을 쓸 때는 그가 어떤 인물로부터 정신적 기술적으로 큰 영향을 받아 그 사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했다고 판단될 때 쓰곤 한다. 말하자면 경외와 존경의 대상이었던 누군가를 추종하여 그와 닮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결과 어떤 성취를 이룬 자에게 우리는 '누구누구의 키드'라는 말을 사용하는 셈이다. 박세리 키즈, 박찬호 키즈들은 그들의 우상으로부터 단지 어떤 수혜를 입은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적인 부분까지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저자인 나카무라 구니오는 진정한 의미의 '하루키 키드'인 셈이다.

 

작가들의 글쓰기 특강에서 종종 듣게 되는 말은 좋아하는 작가의 문장을 필사(베껴쓰기)하는 일은 글쓰기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필사는 '매우 느리고 정확한 독서'로 어휘의 양 자체를 늘려줄 뿐만 아니라 문장 안에서 어휘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이러한 과정은 물론 사고력 확장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독서도 익숙하지 않은 현대인에게 필사를 권한다는 건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른다. 기지도 못하는 아기에게 걷기를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독자가 '누구누구의 키즈'가 될 필요는 없을 터, 바깥 기온이 낮아지고 코로나19의 확진자가 늘어날수록 책과 가까워질 시간은 조금이나마 늘어나지 않을까? 날씨가 춥다. 이 겨울 모두 무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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