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진정되는가 싶던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다시 확산세에 있는 분위기이다. 그래서인지 뉴스를 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착잡하다기보다 화가 나거나 괜한 짜증이 나는 듯했다. 그동안 국민 모두가 극도로 신경써왔던 개인위생이나 모임 자제, 여행이나 불필요한 외출의 자제 등 개인이 누려야 할 사적인 자유를 기꺼이 반납한 채 숨죽이며 지내왔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어서 일종의 배신감이나 허탈감마저 느껴졌던 탓이리라. 자제해왔던 비난의 화살이 클럽을 방문했던 젊은 사람들과 확진자들에게 쏟아지는 걸 보면서 일견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들도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싶어서 그랬던 것도 아닌데 그런 비난은 너무 과도하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물론 이런 비상시국에 조금 더 참을 것이지 생활 방역으로 전환하자마자 유흥을 즐기기 위해 나섰던 그들의 잘못이 없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몇 달째 지속되면서 일상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매일 반복되는 구질구질한 일상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는 것이다. 지겹고 흔해빠진 일상을 반복하면서 별일 없이 산다는 건 차라리 축복이다. 생각해 보니 이러한 일상을 그림으로 그린 예술가가 있었다. 프랑스 출신의 화가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식사 전의 기도>, <시장에서 돌아옴>, <카드로 만든 집> 등 가정생활과 인물을 다룬 샤르댕의 그림은 정물화에서처럼 소박하고 평범하게 보통 사람들을 묘사하여 시간을 초월한 인간의 평범한 모습을 담아냈다는 평을 받는다.

 

"컵과 양파와 커피포트와 한 송이 꽃, 아니면 빵과 솥과 냄비와 계란... 너무도 흔하고 흔한 것이어서 가끔은 귀찮고 성가시며 지루한 것이 될 수도 있지만, 매일 보고 먹으며 사용하는 것이기에 중요하기도 하고, 그것이 없다면 살아가는 일 자체가 어렵다는 점에서, 필요 불가결하기도 하다. 일상에서는 그 어느 것도 하찮지 않다. 모든 것이 고상하고 고귀할 수는 없으나, 내팽개쳐도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지극히 일상적이고 범속한 것 이외에 달리 고귀한 것은 없다. 가장 평범한 것이야말로 가장 귀한 것이다. 샤르댕의 정물화에서는 각 사물의 특성이 그 어느 것 하나 지워지거나 무시되지 않고 두드러져 보인다. 제각각의 구체성 속에서 자신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내세운다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사물의 서열관계는 완화되고 존재론적으로도 평등해 보인다." ("예술과 나날의 마음" 중에서 p.124)

 

<예술과 나날의 마음>을 쓴 문광훈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샤르댕 역시 나날이 반복되는 일상의 정경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여성이 주로 담당했던 집안일, 젊은이와 아이의 행동에 대한 그의 관심이 담겨있다. 그는 별 의미 없이 되풀이되는 허드렛일의 포착이야말로 세속적 순간의 덧없는 망실을 이겨내는 어떤 세계의 창출로 이어지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라고.

 

주말에 내리던 비는 모두 그쳤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불안이 짙푸른 어둠처럼 깊어지고 있다. 조금씩 되살아나던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듯한 느낌. 다른 사람의 일상을 지키는 일이 나의 일상을 지키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아주 가깝게 맞닿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대를 생각하는 이 밤이 부디 평범한 일상으로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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