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출판사에서 발간한 유수진의 저서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에는 눈길을 끄는 문장들이 제법 많았다. '제법 많다'고 말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책들이 제목만 달리 하여 하루가 멀다 하고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통에 때로는 현기증이 날 정도인지라 책의 제목은 고사하고 인상 깊었던 문장도 이 책에서 읽은 것인지 아니면 저 책에서 읽은 것인지 헷갈릴 때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EBS의 펭수가 유행을 타자 수많은 짝퉁 펭수가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그렇고 그런 책들이 도매금으로 넘어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책을 출간하는 저자는 나름 최선을 다하여 준비했을 텐데 말이다.

 

"말도 글처럼 기록이 된다면 우린 조금 더 신중하게 말하게 될까? 나는 펜과 종이를 쥐고 함부로 글을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아주 짧은 편지를 쓰는데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몇 시간을 끙끙 앓는 사람들도 있다. 편지를 받은 사람이 편지를 버리지 않고 보관한다면 보관 기간 동안 편지 속에 적힌 말들은 죽지 않고 살아 있을 테니까. 나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했던 사람들도 글로 상처를 준 적은 없다. 그들이 써준 글은 오히려 눈물 나게 고맙고,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아마 그 글은 말을 할 때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고민해서 썼을 것이다." (p.88)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는 방법은 그저 계속해서 이 방향, 저 방향을 왔다 갔다 하며 바라보는 방법뿐이다. 너를 바라볼 수 있는 360도의 방향 중 오직 1도의 방향에서 바라본 모습만 가지고 너를 판단해왔던 건 아닌지, 내일은 또 다른 방향에서 너를 바라봐야겠다." (p.112)

 

"글 쓰는 일도 그랬으면 좋겠다. 매일 아침 부엌에서 들리는 밥 짓는 소리처럼 꾸준하고 성실했으면 좋겠다. 때로는 지루하고 재미없게 느껴질지라도 이제는 안다. 애초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일이란 것을. 그저 가족들이 오늘 하루를 든든하게 시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평생 아침밥을 지은 엄마처럼, 나의 생각 조각들을 차곡차곡 문장의 형태로 쌓아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왠지 오늘은 글을 쓰는 내 모습 위로 밥 짓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p.180)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아무에게나 씀으로써 나는 덜 위험해지고 있다. 그렇게 조금씩 글 쓰는 일에 가까워지고 있다." (p.184)

 

시간은 하나, 둘 손가락을 꼽아가며 세어보지 않으면 그 흐름을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시간의 흐름을 지척에서 느껴보지 않으면 1년 단위의 큰 뭉텅이로 휙휙 내던져진 듯 여겨지곤 한다. 벌써 2월의 초순. 갑자기 추워진 날씨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든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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