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김운하 지음 / 월간토마토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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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의 스토리라인이 마치 배경처럼 희미하게 깔리는 소설이 있다. 마치 안개가 자욱했던 어느 날의 숲 속 풍경처럼 전체 숲의 모양은 가늠할 길 없고 키 큰 나무의 도드라진 우듬지만 듬성듬성 눈에 띄는 것처럼 소설에서 스토리라인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고 작가의 오랜 사유가 빚어낸 몇몇 문장만 겨우 눈에 띄는...

 

소설가이자 인문학자인 김운하가 18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그런 소설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의 능력에 따라 분명한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소설 속 몇몇 문장들을 화두처럼 부여잡고 안개 자욱한 숲 속 산길을 겨우겨우 찾아가는 그런 소설. 깨침이 부족했던 탓인지 작가는 좀처럼 내게 길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여기다' 싶어 찾아 들어가면 어느새 다시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였다. 나는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작가의 사유 속에서 놀았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도 결코 읽기를 끝낼 수 없는 책들이 있다.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 병 같은 영원한 순환구조에 독자를 가두어버리는 책들. 언제나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오게 만들어버리는 책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잘못된 비유인지도 모른다. 진정한 책은, 독자로 하여금 너무 많은 출구를 가지게 하는 까닭에, 영원히 그 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책이다." (p.211)

 

소설에서 나는, 10여 년 전의 봄, 아무런 기약도 없이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짐 가방 안에는 내가 사랑하는 10여 권의 책들이 들어 있었다. '노자', '장자', '우파니샤드', 스피노자와 카프카, 호메로스와 그리스 비극 작가들 등등의 책들이... 나는 완전한 고립 속에서 책 속에 담긴 진리를 탐구하며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스스로를 치유한다. '우리의 생은, 실제와 허구가 뒤섞인 소설적인 이야기인 셈'(p.185)이라는 작가의 주장처럼 이 소설 또한 허구이되, 많은 부분이 에세이 양식과 실제 경험이 뒤섞인다.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작가의 실제 경험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나는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유배지이자 은둔의 공간인 제주에서 '인생이란 무엇인가?', '운명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누구나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근원적인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진다. 장 자크 루소가 그러했듯 자발적인 고독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여러 고전에 녹아든 삶의 진실들과 마주한다. 윤슬이 반짝이는 서귀포의 바닷가, 태고의 풍경을 간직한 산굼부리, 축구장처럼 작은 섬 마라도...

 

"반면에 사랑을 잃는 결별은, 역설적이게도 자기를 되찾아준다. 자기를 잃으면서 자기를 되찾기다. 자기를 되찾음 가운데서 자기는 소름 끼치는 자유를 발견한다. 그것은 너무 무한하기 때문에 오히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절대적 구속 상태와도 같다. 그것은 일종의 미로에서 길 잃기와도 같다. 때문에 거기서 또 다른 결별과 만나지 않으면 방황은 오래가고, 자아는 자기 없는 자유 속에서 사망한다." (p.245)

 

소설 속 내가 언제 돌아오겠다는 기약도 없이 무작정 떠나기로 한 느닷없는 결정과 1년여의 제주 살이. 유배와 은둔의 시간 속으로 잠깐 끼어든 J. 그리고 그녀의 존재로 인해 사유의 폭은 넓어지고 고독은 깊어졌다. 내가 소설을 읽는 동안 미망에 휩싸였던 것처럼 작가와 나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언감생심 공감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작가가 사유했던 모든 것들을 소설이라는 틀 속에서 부드럽게 녹여내려 했던 애초의 목적은 자격도 없는 독자인 내게 이르러 무참히 허물어졌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바로 그 비밀의 이름을 안다는 것이다. 그 이름 속에, 한 인간의 전체 운명이, 아니 진정한 운명이 담겨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최후의 순간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의 참된 이름을 알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 비밀스러운 참된 이름을 알기 전까지는, 우리의 삶은 그저 햇빛이 드리우는 흐릿한 그림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p.131)

 

사람들은 말한다. 길을 찾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그러나 아주 가끔 우리는 길을 잃기 위해 한 권의 소설을 읽을 때도 있다. 인생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따라 심하게 흔들리기도 한다는 걸 길을 잃고 방황하면서 깨닫게 된다. '단순한 흥밋거리를 넘어 존재와 삶에 대한 진실을 탐구하려는 작가적 열정이 가닿으려는 지대'가 '문학과 소설이 꿈꾸는 어떤 낯선 경이로움"이라고 말하는 작가. '순수 산문과 허구의 이야기 사이 어디쯤엔가 위치하고 있다'는 이 소설은 나에게 삶의 길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때로 우리는 길을 잃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한다는 걸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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