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담장에는 넝쿨장미가 한창입니다. 오늘은 5·18 민주화 운동 39주년이 되는 날. 끄물끄물한 하늘에선 간간이 비가 내렸고, 장미의 붉은빛만 온종일 선명했습니다. 8,90년대를 지나쳐온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매년 이맘때의 심정은 말할 수 없는 미안함과 부끄러움, 삶에 대한 부질없음이 교차하곤 합니다. 그리고 나는 한나 아렌트를 생각하게 됩니다. 악랄하기 그지없었던 전두환과 그의 일당들, 그리고 직접적인 학살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함으로써 그들의 만행에 동조했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 그 시대를 살았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악의 평범성'을 주장했던 한나 아렌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태인 학살에 가담했던 히틀러와 그의 잔당들을 증오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똑같은 방식으로 팔레스타인 국민들을 학살하는 이스라엘 정치인들을 증오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지금의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했던 많은 영령들의 피의 대가였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우리는 감사와 부끄러움을 담아 5·18 영령들께 조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엄혹했던 전두환 군사정권하에서 80년 광주의 사정은 알려지지 않았고,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뒤에야 겨우 사람들의 입과 입으로, 흐릿한 영상을 통해 조금씩 알려졌을 뿐이지요. 우리는 그렇게 무지했던 시절을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장에 참석했던 자유당의 대표는 8,90년대를 관통했던 군사정부 시절에 공안검사를 함으로써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고, 독재를 옹호했던, 어찌 보면 독재의 수혜자이자 '악의 평범성'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손에 직접적으로 피를 묻히지 않았다고 해서 죄에서 한 발 비껴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인간은 누구나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실수였든 고의였든 차후에 반성하고 참회함으로써 인간 된 자격을 다시 회복하는 게 아닐까요?  아파트 담장에는 넝쿨장미가 선명했던 오늘, 간간이 비가 내렸고 나는 문득 부끄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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