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이른 더위와 탁한 공기로 종일 나른했던 하루. 2019년의 어린이날은 그렇게 기억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경기도 시흥의 한 농로에서 두 살, 네 살의 어린 자녀 두 명을 포함한 일가족 4명이 렌터카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던 까닭에 서늘한 한기와 함께 답답한 심정이었습니다. 오늘이 어린이날이라는데... 부부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른 날도 아닌 어린이날,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찾는 아이들과 엄마 아빠와 함께 낯선 차 안에서 죽음을 맞았던 두 아이의 모습은 너무나 극명한 대비였기에 나는 차마 더 이상 생각을 진전시키지 못한 채 한동안 망연했던 것입니다. 신달자 시인의 에세이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는 죽음을 둘러싼 한 인간의 애환과 절절한 사연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기록된 까닭에, 감정을 걷어낸 듯한 건조한 묘사가 서걱거리듯, 읽는 이의 마음을 한순간에 쿵 하고 무너뜨립니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인간에게도 생애 단 한 번은 완전히 주목을 받으며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죽음이다. 한 생애를 통해 오직 한 번밖에 허용하지 않는 절정이 있다.면 그것 역시 죽음이다. 더는 다른 생각으로 흘러들지 못하게 모든 사람의 시선을 붙잡고 단 한 번의 눈맞춤, 단 한마디의 대화를 안타까운 애원으로 빌어 보는 긴장의 순간. 그것도 죽음이다. 가족이란 때때로 위선의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때가 있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가족이 그 죽음을 지킨다. 그래서 가족보다 더 가까운 관계는 없다. 죽는 자나 살아 있는 자나 하느님 앞에 서듯 한순간 진실해지는 것도, 가족으로서의 든든한 관계를 다지는 것도 죽음 앞에서이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상적인 드라마 속에서도 슬프다. 그러나 절대로 더는 볼 수 없는 마지막 순간에 누구나 연습 없이 오열하고 뉘우치고 탄식하게 하는 죽음. 절정은 서서히 가족의 울음이 커지면서 시작된다. 주인공이 말문을 닫고 눈을 감고 손을 저으면서 입을 열듯 열듯 괴로운 몸놀림을 할 때 가족의 울음은 더 진하게 휘몰아친다. 그 깊은 오열이 가파르게 잦아지는가 싶을 때 주인공은 이미 온몸을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이 두 손을 늘어뜨리고 마지막 입을 여는가 하다가 힘겹게 닫고 드디어 고개를 한순간 툭 떨어뜨리며 '따르륵'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는 순간 가족의 통곡이 온 집 안을 메운다. 절정은 그렇게 간단히 끝난다. 왜 생의 절정은 언제나 그렇게 짧은 것인가."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중에서)

 

지금도 여전히 강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습니다. '왜 생의 절정은 언제나 그렇게 짧은 것인가'. 시인의 한탄에 나는 답을 하지 못합니다. 시인의 말을 그저 조용히 되뇔 뿐입니다. '왜 생의 절정은 그렇게 짧은 것인가' 누구나 마흔이 넘으면 타인의 죽음조차 허투루 넘기지 못하게 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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