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0
막심 고리키 지음, 이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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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심 고리끼' 하면 소설보다는 먼저 '밑바닥에서'라는 연극이 떠오르곤 한다. 반공주의에 매몰되었던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막심 고리끼의 문학을 논한다는 건 왠지 께름칙하고 두려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일종의 자기 검열로서 말이다. 그런 까닭에 막심 고리끼의 작품을 처음 읽어본 게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난 시점이었던 듯하다. 그에 앞서 우연히 보게 된 연극 '밑바닥에서', 어린 시절에 보았더라면 제대로 이해조차 하기 어려웠을 그늘진 삶의 단면에 홀리듯 이끌렸고, 그 후 원작을 찾아 책으로 읽게도 되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그이지만 불행했던 그의 삶을 대변하듯 그가 쓴 대부분의 작품은 무척이나 어둡고 우울했다. 막심 고리끼의 작품을 다시 읽는다는 건 접혀 있던 우울의 한 끝단을 펼치는 것과 진배없었다.

 

막심 고리끼, 러시아어로 '최대'를 뜻하는 막심과 '맛이 쓰다'는 의미의 고리키를 합쳐 필명으로 쓰게 되었다는 그이지만 그의 작품은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곳곳에서 드러나곤 한다.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도 바로 그런 부분이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말이다. 작가의 산문집에서 '인간은 희망으로 들뜬 불안한 삶을 원치 않습니다. 밤하늘의 별 아래 느릿느릿 흘러가는 조용한 삶이면 족합니다.'라고 썼던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의 삶 전체에서 희망으로 요동치는 불안한 삶을 원치 않았을 듯하다. 오늘 내가 읽었던 그의 단편소설 '첫사랑'의 주인공도 그렇지 않았을까.

 

"삶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뭔가 끝없이 펼쳐 보이는 마술사에 대한 어린아이의 믿음 같은 것이었다. 이제까지 보여준 마술도 재미있었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앞으로 나올 테고, 바로 다음 순간, 아니 어쩌면 내일 보게 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분명히 보게 되리라고 믿고 있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어떻게 된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최후의 놀라운 마술을 그녀는 여전히 기다리고 잇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p.189~p.190)

 

주인공인 '나'가 사랑하는 여자(올가)는 나보다 열 살이나 많고 애가 딸린 유부녀였지만,'귀족 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파리에서 살기도 했으며, 그림 공부도 하고, 산파술도 배운, 한마디로 교양이 있는 우아한 여성이었다. 반면에 나는 촌스럽기 그지없는, 그렇지만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런 남자였다.

 

"무엇이든 거침이 없는 그녀의 어투에서 나는 혹시 이 사람이 내 주변에 잇는 혁명적 성향의 지인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걸 넘어 뭔가 더욱 높은 가치가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세상 모든 것을 멀리서, 한편으로 비켜서서, 흥미롭지만 위험한 장난을 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처럼, 자신은 이미 다 겪어보았다는 듯이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p.147)

 

우리는 대개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끌리게 마련이다. 소설 소의 나도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결국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나 한 집에서 살게 된다. 사제관에 딸린 싸구려 월세방에 가정을 꾸렸지만 썩은 내가 진동하고 벌레가 들끓는 궁핍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불평 한 마디 없이 견뎌주는 것은 물론 초상화를 그리거나, 지도를 그려주거나, 혹은 최신 유행하는 모자를 만들어 내다 파는 등 생계를 거들었다. 나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지역 신문에 연재를 하기도 했다. 돈을 조금 벌면 그들은 지인들을 초대하여 만찬을 열었고 여자는 가까운 남자들을 '뒤흔들기' 좋아했고 아주 손쉽게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질투하지 않았다. 동거 생활 삼 년째에 나는 문학 창작에 진지하게 매달렸고 여자는 나의 작품에 관심조차 없었다. 달라도 너무나 다른 문학적 취향과 삶의 인식. 나는 모욕감을 느꼈고, 그것 때문에 헤어졌다.

 

"얼마 전 나의 첫사랑인 그 여인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녀에게 찬사를 바치고 싶다. 진정 여자다운 멋진 여자였노라고! 그녀는 있는 것만으로 살아갈 줄 아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에겐 매일매일 축제 전야였다. 그녀는 내일이면 지상에 새롭고 특별한 꽃이 피어날 것이라고, 또 어딘가에서 아주 재미있는 사람들이 찾아와 놀랄 만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고 늘 기대하며 살았다." (p.184)

 

우리는 내게 없는 것을 그녀, 또는 그 남자가 갖고 있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끌리기도 하고, 똑같은 이유로 헤어지기도 한다. 그런 실수를 반복하는 게 청춘의 특권이라고는 하지만 지나고 나면 그 시절은 아주 짧은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래서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아쉽고 애틋한 경험일 수밖에 없다. 온종일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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