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식 광대
권리 지음 / 산지니 / 2017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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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뇌구조가 궁금해지는 책
권리 소설집 <폭식 광대>, 기이하고 신비롭고 재미나다

 

소설가 이름도, 제목도 참 독특한 책을 만났다. 권리 소설집 <폭식 광대>. 작고 얇아서 금방 읽었는데 마음에 뭔가 ‘툭’ 하고 던지는 힘은 은근히 강하다. 그래서일까, 소설에 관해 잘 모르면서도 나에겐 낯선 표현, ‘이거, 문제적 소설 같아’ 하는 말을 저도 모르게 내뱉게 된다. 시작부터 하도 남다르게 다가오는 바람에.

 

오늘날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영감님이 오셨다.”(9쪽)

 

책 맨 앞에 나오는 ‘광인을 위한 해학곡’의 첫 문장이다. 갑자기 웬 영감님?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다. 궁금증 잔뜩 안고 죽 읽어 보니 영감님이라 함은 예술로 세상을 연출하고 싶었다던, 독특하고 기이하다 못해 광인의 경지에 오른 예술가 ‘장곡도’를 이르는 말이었다. 어디 주인공만 그런가? 글 흐름도 완전 독특하고 기이하고 신비롭기만 하다.

 

장곡도 자신도 풀지 못한 삶의 미스터리를 우리가 풀 수 있을까? (장곡도가 남긴) 이 시가 미스터리를 푸는 일말의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인지는 여러분의 뇌와 심장의 활동에 달려 있다. (52쪽)

 

글 끝자락에서 만난, 독자까지 글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이런 문장, 낯설다. 하지만 흥미롭다. 저 글 바로 밑에 이어진 장곡도의 다음 시 또한.

 

건방진 소녀소년이 될 준비를 하라.
불편한 장난을 감수하라.
충격에 민감하라.
성스러운 기침을 하라.
당신은 행복하다.
코미디가 분노를 만나 냉소가 된 사회를 살고 있으니
현대에는 광인의 눈이 더 정확하다.
비광인은 2개의 눈을 갖고 있으나, 광인은 7개의 눈을 갖고 있다.
유희의 눈, 무질서의 눈, 악의 눈, 주의산만의 눈,
불일치의 눈, 거절의 눈 그리고 텅 빈 눈이다.
인간이여, 텅 빈 눈을 가져라!

 

‘비광인’보다 ‘광인’이 훨씬 멋지게 느껴지게 만드는 시. ‘광인’처럼 7개의 눈을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일어나는 시. 장곡도의 미스터리는 작가의 미스터리이기도 했을까? 그렇다면 작가도 광인의 눈을? 이해가 될 듯 안 될 듯 아리송한데도 빨려 들어가듯 ‘광인을 위한 해학곡’을 보고 나니 작가의 다음 미스테리가 막 궁금해진다. 냅다 나머지 소설들로 달려 보기.

 

소설 ‘해파리’는 동물 해파리가 주인공인 듯 비치지만 실은 외국인 노동자들 삶을 그려내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홀로 짐작해 보고. 도심 속 어느 외딴 마을이 야금야금 땅속 구멍으로 사라져 버리는 내용인 ‘구멍’은 강남 어느 부촌과 그 옆에 딸린(?) 판자촌을 생각나게 한다. 주제는 이렇듯 ‘사회의식’이 뚜렷해 보이는데, 글은 환상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마치 SF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 SF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소설에는 이상하게도 자꾸 빠져든다. 거참, 기이한 일.

 

드디어 마지막 소설, 책 제목이기도 한 ‘폭식광대.’ 인류 최대의 식성을 자랑했던 한 남자의 일대기라는데. 처음 읽었을 때 하도 괴기스럽고 이상하고 좀 무섭기도 해서 내용이 잘 스며들지 않았다. 두 번째로 보고 나니, 뭔가 느낌이 온다. ‘광인을 위한 해학곡’에서 작가가 ‘광인의 시’를 빗대어 괴기한 이 시대에, 이 시대를 꾸역꾸역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을 이 소설에서 비로소 찾은 기분마저 들었다.

 

“세상에는 저를 우스꽝스럽게 보는 시선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통해 자신들의 내면의 악마를 마주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저는 음식을 먹고 있노라면, 사람들이 안고 있는 고민들, 즉 자신의 탐욕스러움, 사회에 대한 불복종, 무조건적인 의지 등과 같은 추한 기분 따위를 느낄 겨를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 연극적이고 악마적인 행위를 보이게 함으로써 저는 잠시 잠깐이나마 그런 고민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것이죠. 사람들은 저를 보고 죄책감을 건너뛸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저는 이 행위를 하고 있음을 남에게 알림으로써, 이 행위 자체의 부도덕함, 부조리, 비인간성에 대한 인식과 자각을 남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등 뒤에서 그들의 그림자가 되어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먹는 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만일 제가 먹는 것을 거부하여, 이것이 이러저러한 형태로 배설된다면 아주 무서운 효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 저는 이를 막기 위해 기꺼이 여러분을 위한 탐욕의 악마가 되겠습니다. 저의 희생이 여러분의 행복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150~151쪽)

 

 

사실 책을 읽는 내내, 현실과 상상을 마구 넘나드는 기이한 이야기들 때문인지 작가의 정신세계가 많이 궁금하던 차였다. 나와는 다른 세상을 마음속보다는 머릿속에 지닌, ‘사차원’스런 뇌구조를 가졌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폭식광대’의 주인공 남자가 폭식 대회를 앞두고 길게 남긴 저 말을 보면서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소설의 형식은 독특하되 생각만큼은 낮은 곳, 아픈 데로 향한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솔솔 생겨났다. 아니나 다를까.

 

1. 13년
첫 번째 단편집이다. 나무늘보처럼 게으르면서도 집요하게 13년간 꿈틀댔다.
‘어려운 일은 쉬울 때 하라.’
이것은 내 좌우명이자, 이 책이 빛을 보기까지 13년이나 걸려야 했던 이유이다.

 

2. ‘여기 사람이 있어요.’
재개발 아파트 건설로 인해 터전을 빼앗긴 어느 소시민의 인터뷰 한마디가 <폭식 광대>를 탄생시켰다. (‘작가의 말’에서)

 

책 끝에 짧게 나오는, 작가의 말 1번과 2번을 연이어 보면서 그냥 좀 기뻤다. 내 생각이 조금은 들어맞은 듯해서. 그래도 여전히 신기하다. 주제의식은 자못 심각한데 소설 전개는 어쩌면 이리도 (어둡긴 하나) 판타스틱 분위기로 끌어냈을까나. 작가의 뇌구조가, 아니 예술세계가 다시금, 아주 많이 궁금해진다. 소설집을 다시금 주르륵 훑다가 내 마음과 꼭 닮은 문장을 찾았다!
 
사람들은 장곡도를 보면 궁금해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창조의 원천은 어디서 나오는가? 과연 저 위대한 예술가에게 영향을 준 위대한 영감은 무엇일까? (11쪽)

 

재밌다고만 말하고 끝내기에는 뭔가 아쉬웠던 권리 소설집 <폭식광대>. 작가의 예술혼이 담겨 있을 저 문장을, 짧은 단편집 하나로 ‘문제적 소설’이라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말을 저절로 이끌어낸 작가한테 고대로 돌려주고프다.

 

‘권리 씨 당신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토록 독특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조의 원천은 어디서 나오는가? 당신에게 영향을 준 위대한 영감은 과연 무엇인가?’

 

나를 특별한 소설 세계로 안내해 준 기이하게 재미난 글과 작가를 만난 기념으로, 새로운 의식 하나를 삶에 보태 볼까나.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를 때면 광인 장곡도를 생각하며 “영감님이 오셨다!” 하고 외치기. 이 생각도 꽤 좋은 것 같으네. 아마 지금 나에게 영감님이 오신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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