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양어장 가는 길 - 미시적微視的 사건으로서의 1986~1990년 북태평양어장
최희철 지음 / 해피북미디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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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펼쳐지는 특별하고 숭고한 노동 이야기

 

바다를 좋아한다. 바다만 보면, 기다리는 일도 사람도 없다면, 몇 시간이고 그대로 바다만 본다. 엄마 아빠 두 분 다 나고 자란 곳이 제주. 내가 바다를 사무치는 듯 좋아하는 건, 돌아가신 부모님의 내력이 내 안에서 꿈틀대기 때문이 아닐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바다를 좋아하는 내가 사는 곳은 작은 산골마을. 귀촌하기 전에는 훌쩍 바다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건만 산골 살면서는 언감생심 바다 구경할 짬을 잘 내지 못한다. 물고기를 비롯한 바다 음식들도 냉동으로만 가끔 만날 뿐.

 

산골 살이 4년째, 눈으로도 입으로도 바다와 조금씩 멀어져 가던 차에 ‘글자’로 바다를 만날 기회가 생겼다. 아주 멀고 먼 바다 이야기, 원양어선 선원들의 삶을 기록한 《북양어장 가는 길》 덕분에.       

 

“원양어업이란 ‘도전이나 개척’이라기보다는 이미 그곳에서 살고 있었던 모든 것들에게 우리 삶을 기대려 했던 방식 혹은 시도였다.”(17쪽)

 

첫머리에 나오는 글귀를 보면서 고사리며 취나물이며 저절로 자란 것들을 채취하는 산살림이랑 스르륵 겹친다. 양식이 아닌 원양어업은 바다에 살고 있는 것들을 ‘거저’ 담아오는 일.  산에 있는 풀이며 열매들을 ‘허락 없이’ 가져오는 산살림랑 뭔가 비슷하지 않은가.  

 

“‘몸의 기억’을 되살려 기록하는 것은 ‘잃어버린 시간’과 접속하여 주름을 펴는 일이다. 무두질처럼, 살아왔던 시간을 보드랍고 말랑말랑하게 하는 것이다. 주름 속에서 새로운 바다를 읽어낼 수 있었다.”(6쪽)

 

글쓴이가 몸의 기억들로 써내려 간 바다 이야기. 머나먼 바다에서 파도와 어둠과 눈보라와 안개와 싸우고, 잠을 허락하지 않는 혹한 노동에 시달리고, 때로는 생명이 아슬아슬한 순간들도 만나야 했던 그 시간들이 애틋하고 처절하다. 그물과 벌이는 사투는 너무 생생해서 마치 내가 현장에 있는 듯 착각이 들 정도.

 

그동안 쉽게 입으로 가져갔던 바다 속 먹을거리들이 이다지도 힘든 시간들을 지나와야 했다니, 조금 아프다. 원양어선을 타는 선원들의 삶, 가까운 바다로 나가는 어민들의 삶과는 뭔가 많이 다르겠구나. 아무 때고 땅에 발을 붙일 수 없는 망망대해라는 것만으로도.

 

바다살림을 산살림과 견주었던 건 아무래도 알맞지 않은 듯하다. 산은 언제든 내려갈 수 있는 곳. 허나 머나먼 바다는 그럴 수가 없다. 육지에 닿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며 바다 위에서 오로지 바다만 바라보며 펼쳐지는 노동. 다른 무엇과 견주기 어려워 보인다. 먹고살기 위해 선택한 삶일지라도 참 특별하고 숭고한 일로 다가온다. 바다를 몸과 마음으로 껴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나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될 것 같은 일이다. 바다 위 노동이란, 삶이란. 

 

‘배’라는 닫힌 공간에서 긴 시간 지내야 하는 선원들. 저절로 그네들만이 누릴 수 있는 놀이들도 생겨난다. 실내에서 할 수 있는 훌라, 윷놀이 들은 기본이고 거북이나 가재 같은 것으로 박제를 만들기도 한다고. 배 만들기가 유행이던 때가 있었다는데 집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며 ‘배’ 안에서 작은 ‘모형 배’를 만들던 애틋한 마음이 고스란히 마음에 와 닿는다.

 

웬만한 일터에서 잘 빠지지 않는 ‘술’ 이야기도 여지없이 나온다. 배에 실린 술은 한정돼 있을 테니 그 술에 얼마나 목이 말랐을까. 조리실에서 술김에 칼싸움이 벌어진 날, 배에 있는 모든 술을 바다에 던져야 했던 날, 그런 지시를 내렸을 때 선장의 마음은 얼마나 아렸을 것이며, 그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던 선원들은 또 얼마나 애가 탔을꼬. 읽는 내가 다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겠더라는. 다행인 건 그렇게 버린 술이 다른 배의 그물에 걸려들었다는 사실. 소주를 건져 올린 그 배의 선원들은 바다가 준 선물인 줄만 알고 정말 맛나게 먹었다는 뒷이야기가 이어질 때 짜릿한 해피엔딩 소설을 보는 것처럼 행복했다는 말씀.

 

“‘미시적 사건으로서의 1986~1990년 북태평양어장’이란 당시 겪었던 구체적인 사건들의 ‘자세히 보기’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없었거나 말하지 못했던 것들의 숨은 의미를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머리말에서)

 

‘몸의 기억’을 ‘글자의 기록’으로 남겨 준 책 덕분에 바다 위 삶과 노동을 구체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어쩌면 거의 처음으로. 특별한 삶을 만났으니 그 시간은 나에게도 특별하게 남을 터.

어릴 때 부모님 따라 제주도에 가면서 배를 더러 타곤 했다. 대여섯 시간 가까이 배 멀미로 뒹굴다 갑판 위에 올랐을 때, 저 멀리 희끄무레한 불빛이 일렁이는 모습을 보면 어찌나 반갑고 기쁘던지. 배와 육지를 잇는 흔들다리를 건널 때는 짧은 거리가 한 없이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리 밑에 출렁이는 시커먼 바다에 빠질 것만 같아 두렵기도 했고.
 
식구들과 함께 반나절 배 위에 있으면서도 그렇게 육지를 그리워했건만. 수십 일 때로는 몇 달 넘게 바다에서 보내는 사람들이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던 마음은 얼마나 지극할까. 지극한 그 마음을 누르고 누르면서 바다 위 삶을 겪었고 또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께 존경스러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가만 있자…. 밥을 먹을 때면 쌀이 나오기까지 땀 흘리며 애쓴 농부님들께 고마워하자는 말을 많이들 하잖아? 헌데 물고기를 먹을 때 바다에서 고생하는 어부님들을 생각하자는 말은 잘 못 들어 본 것 같다. ‘땅 농사’도 ‘바다 농사’도, 모두 우리네 먹을거리를 받쳐 주는 소중한 노동인데 말이지. 지금부터, 나부터, 바다 먹을거리들 마주할 때 바다살림에 힘쓰는 많은 노동자들을 떠올려 봐야겠다. 집에 있는 바다 음식이라곤 멸치랑 참치 캔 정도지만, 다시 멸치 우릴 때도 참치 캔 딸 때도 원양어선에 타고 있을 선원들을 한 번씩 생각해 보자꾸나. 당신들의 특별한 노동과 희생 덕분에 바다 내음 가득한 음식들을 만날 수 있으니 참말로 고맙고 고맙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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