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 정태규 창작집, 2015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도서
정태규 지음 / 산지니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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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우리일까요. 십만 명당 한두 명 걸린다는 그 병에 왜 하필 내가 걸렸을까요.”

착하게 살았소?”

그렇게 착하게 살진 못했지만 십만 명당 한두 명에 뽑힐 만큼 나쁘게 살지도 않았는데.”

(578)

 

<편지>를 쓴 작가 정태규가 아프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저 문장이 그리도 내 가슴을 후려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허나 나는 알고 있었다. 그이가 온몸의 근육이 서서히 마비되는 루게릭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숨 쉬며 살아가는 것만큼 글 쓰는 일이 소중할 수 있는 소설가에게 그 병이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까지는 차마 건너짚지 못하더라도.

 

우리만큼 순수하게 죽음을 인식하고 마주하고 있는 이가 있겠어요? 그러니 무서워 말아요. 울지도 말고, 화내지도 말고, 스스로 동정하지도 말고그래요. 앞으로 남은 우리 삶이 조금 달라질 뿐이죠. 삶의 형태가 조금 불편해지겠죠. 그것뿐이에요.” (73)

 

<편지> 속 세 번째 소설 비원(秘苑)’에서는 루게릭병에 걸린 남자와 여자가 병원에서 우연히 만나 하루 동안 벌어진 이야기를 담았다. 작가가 실제로 겪은 일이 아닐까 생각될 만큼, 뜻밖에 다가온 병을 마주한 두 남녀의 말과 행동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여자의 목소리를 빌려 울지도, 화내지도, 동정하지도 말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을 작가의 마음이 느껴져서 읽는 동안 마음이 참 아팠다.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 슬프고 애틋하기는 흔한 일이건만, 작가의 몸과 마음 상태가 자꾸 느껴져서 그럴까. 어느 소설책보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작가의 혼이 가득 실려 있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작고 가벼운 이 책이 무겁게 느껴진다.

 

난 영원에 이르고 싶다. 정말 간절하게. 그것 말곤 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게 없다. 미안하구나. 이해해다오. 그는 또 이렇게 말할 것이었다.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를 불확실한 영원을 구하기 위해, 그 차가운 영원을 위해, 이 확실하고 뜨거운 사랑을 버릴 건가요. 이 어리석은 사람. 그녀는 또 그렇게 말할 것이었다.“(148)

 

용맹정진은 승()의 일이라지만 그리움은 어쩔 수 없는 속()의 일인 것을.”(152)

 

보살님, 하심이란 말 아시는가. 아래 하, 마음 심. 이제 그만 마음 내려놓으시게.” (154)

 

스님이 되고자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겠다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를 잊지 못하는 여자. 이런 줄거리 어디서 많이 본 듯하건만. 남자친구가 있는 절에 찾아가 몰래 그 사람의 수행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한 여자의 모습이 왜 이렇게 마음을 시리게 하던지. 그 여자의 모습을 보며 지나가던 스님이 건넨 마지막 말처럼, 생과 사에 갈림길에서 어느덧 마음을 내려놓은, 혹은 아직 내려놓지 못해 고통스러운 작가의 혼이 글자에 그대로 실려서 그런 것일까.

 

정태규 창작집 <편지> 1부에는 이렇듯 내 마음을 아련하게도 시릿하게도 울려 준 글이 많았던 반면, 2부는 짧고 유쾌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특히 우리 집 그 인간을 볼 때는 어찌나 재미나던지 앞에서 훌쩍이던 마음이 어느새 활짝 웃고 있었다. 날마다 술이 고주망태가 돼서 돌아오던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금주를 선언했는데, 그 까닭이 무엇이었냐면. 우연히 하루 같이 놀아준 딸아이가 글쎄, 다음 날 출근하는 아빠한테 아빠! 또 놀러 와!” 이랬다는 거 아니겠나. 생글거리며 아빠한테 손을 흔드는 아이를 버쩍 얼어붙은 얼굴로 멍하니 쳐다보았을 그 아빠의 표정이 막 떠오르면서 간만에 시원하게 웃었다. 어쩜 이렇게 재미난 순간을 딱 붙잡아서 글로 적어냈을까. 역시 소설가는 소설가다.

 

지금까지 삶을 지나치게 엄숙하게만 바라보아온 나의 엄숙주의에 대한 반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인생은 어찌 보면 별것 아니다. 우습기까지 하다. 어이없고 허망하기도 하다. 삶은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무얼 바라고 그렇게 바둥거리며 살았나 싶다. 삶은 콩트처럼 가벼울 뿐이다. () 루게릭병이 나에게 계속적인 집필을 허락한다면 새로운 단계의 글쓰기에 도전할 것이다. 두려운 것은 내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투항하는 것이다.” (208)

 

작가는 책 뒤쪽에 콩트라 할 만한 글 몇 편을 이 책에 덧붙인 배경을 풀어 놓았다. 아픔 속에서 써내려 간 글이 오히려 나를 히죽히죽 웃게 해 준 글이었다니. 그래서 더 놀랍다. 웃음 속에서도 충분히 삶의 의미를 가득 느끼게 해 준 글이었기에 더더욱.

 

작가의 말처럼 <편지>에 실린 글들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더 소중하고 값지다. 콩트처럼 가볍든 지나치게 엄숙하든 모두 다 우리네 삶안에서 벌어지는 일 아니겠는가. 통속한 이야기로 가득 찬 이 책 덕에 오히려 나는, 별것 아닌 내 인생을 좀 더 제대로 살아가고 싶어졌다. 때로 어이없고 허망함 속에 허우적대더라도, 금세 흘러가버리는 이 하루하루를 고맙게 받아들이자고 다짐마저 해 보았다.

 

헌책방 한 귀퉁이에서 만나는 낡은 잡지 표지는 아늑하고 푸근한 느낌이다. 너덜너덜한 책장 사이로 흘러나오는 눅눅한 내음도 정겹기만 하다. 그런 게 통속이라면, 난 통속한 삶을 더 사랑하며 살아가련다. 정태규 작가가 스스로 투항하지 않고 새로운 글쓰기를 계속 해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까지 더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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