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 - 프랑스 비룡소 세계의 옛이야기 39
샤를 페로 지음, 이다희 옮김, 로베르토 인노첸티 그림 / 비룡소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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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4년전, 바리데기 신화를 아들에게 읽어주고 싶어 바리데기의 여러 그림책판본을 찾았지만 실패했다. 그림책으로 발간된 바리데기 관련책은 단 한권도 없었다.  한겨레에서 나온 고학년용 바리데기와 전래동화를 묶어 놓은 파는 동화전집뿐. 찾다가 찾다가 못 찾고 할 수 없이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는 엄마의 집에서 전래동화 전집으로 묶어 나온 바리데기를 읽어주었다. 세트로 파는 전집용 그림이 다 그렇듯이, 바리데기의 그림은 별 특징없는, 글에 충실한 묘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수수께끼같은 바리데기의 굴곡 많은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남성위주의 신화에 여성이 등장했다는 것도 그렇고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무당녀(?)의 이야기가 조선이란 유교사회에서 멸시받지 않고 수 백년씩 이어져 내려온 것에 대한 경외감이라고 해야하나. 이런저런 이유로 그 때 무슨 강박인지, 바리데기의 버림받은 삶을 아들에게 읽어주고 싶었었다. 후에 비룡소에서 <바리데기>가 그림책 판본으로 나와 구입했지만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들이길 바라는 부모밑에서 일곱번째로 태어나, 또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모에게 버림받은, 한많은 바리데기가 그 부모의 병을 고쳐주기 위하여 찾아 나선 저승의 여정이 비록 남성신화와 달리 치고 받고 싸우는 칼부림의 험난한 동적 신화라기보다는, 참고 인내하는 정적인 신화라고 하더라도 길위에서의 모험을 끝끝내 이겨냈건만 그림은 순정만화의 라인처럼 가늘고 여리다 보니 힘찬 글을 받쳐주지 못했다고나 할까. 여하튼 강렬하고 모진 삶의 바리데기의 고단했던 삶을 한낱 눈물이 글썽거리며 동정을 자아내는 순정만화의 주인공처럼 그린 것은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바리데기를 내준것이 어디냐싶어 두말 않고, 우리 그림책 단행본 시장의 활성화(?)을 위해 구입을 주저 하지 않았다. 바리데기의 이런저런 그림책 판본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독자의 따가운 비난을 받더라도 자신만의 독특한 일러스트를 가진, 자신만의 색채를 가진 그림작가의 출연이 자꾸 기다려진다. 

 (음... 리뷰는 신데렐라인데..바리데기만 열나 쓰고 있네.) 

신데렐라가 부러워서 그랬다. 우리의 여성신화 바리데기의 그림책 판본은 딱 두개밖에 안 나왔는데, 신데렐라는 사방팔방에서 욕을 먹으면서도, 수 백년씩 이어져 내려오는 신데렐라 이야기에 뻑간 동서양의 작가들이 그려낸, 수십권의 그림책 판본이 나와 있는 외국의 그림책 시장이 부러워서 그랬다. 외국의 경우, 수 백년된 이야기의 그림책 판본이 수 없이 많다는 사실을 몇 년 전에 알았다. 그런 그림책이 어디 신데렐라뿐이랴. 한 권의 그림책 판본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부모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작가들이 자신만의 터치로 그린 이야기 그림책을 낸다는 현실이 못내 부러워서. 여자라는 설움과 온갖 고난을 다 물리치고 이겨낸 바리데기는 한국시장에서 단 두권의 그림책 판본밖에 없는 현실이 아쉬워서 이 자리를 빌어 한탄하고 싶어서 그런다. 그 많은 우리 나라 그림작가들과 출판사들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왜 우리 나라는 작가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세계로 이끌어 가지 못하는지. 왜 우리 나라 이야기는 우리 나라에서조차 널리 퍼지지 못하는지. 신데렐라가 전 세계적인 이름을 얻은 이유는 이런 작가들의 힘이 아닐까.  안데르센의 작은 전나무에서 잠깐 이야기했지만, 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 내려가는 이면에는 이런 작가들이 있어서 일 것이다. 전 세대와 다음 세대를 공감하고 이어줄 수 있는 이야기의 힘.  

샤를 페로의 원작인 신데렐라는 페미니스트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사랑받고 있는 세계적인 캐릭터이다. 아무래도 신데렐라하면 디즈니의 신데렐라를 떠올리겠지만 신데렐라 그림책 판본은 생각보다 많다. 작년 하반기에 출간된 인노첸티의 신데렐라는 기존의 시대배경을 무시하고 1920년대 런던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신데렐라를 중심으로 장식적인 옷차림보다는 20년대의 시대배경과 분위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노첸티의 그림이 다 그렇듯이 화면은 꽉 차있고 진지하면서 촘촘하다. 인노첸티식 신데렐라는 위대한 캐츠비의 미아 패로우를 연상되는데, 아마도 신데렐라를 가장 현대적으로 그린 작품이 아닐까싶다. 고전적인 신데렐라의 배경이 19세기라면, 인노첸티는 신데렐라를 20세기로 초대한다. 인노첸티의 그림은 대체로 색감이 어둡다기보다는 전체적인 그림의 분위기가 차분하고 조용하다. 마치 늘어진 재즈음악을 듣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의 그림은 역동적이지도 경쾌함을 주지는 않지만 20세기 초반 여성들에 대한 낭만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마차는 자동차로, 화려하고 장식적인 드레스는 몸에 착 달라붙는 이브닝 드레스로 그리고 환상적인 결말은 모노톤의 흑백사진의 한 장면으로 바꿔, 신데렐라를 재해석해서 그리고 있다.  

1940년 이탈리아 태생인 인노첸티는 공식적인 미술교육은 받지 못한 채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 우리나라에 발간된 책은 <백장미>,<마지막 휴양지>, <호두까기 인형>이 있는데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이 사람 이름이 인노센티, 이노센티, 인노첸티로 검색된다. 도대체 이 사람 이름을 어떻게 발음해야하는건지?


 










 

 
지금까지 수집하고 있는 여러 작가의 신데렐라 그림책 판본들. 스토리는 하나지만 작가들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촛점은 각기 다 다르다.

1.
  
룩 코스만스의 신데렐라. 인물의 표정이 생동감이나 사랑스럽지는 않지만 신데렐라의 마법의 시간이 풀리는 순간을 가장 멋지게 그려내고 있다.쉬폰소재의 드레스가 계단을 미끄러지며 내려갈 때 우아하게 펼쳐지는 장면은 정말이지 압권이다.



2.
     Hilary Knight's Cinderella 
 
힐러리 나잇의 신데렐라는 편안하고 익살스럽다. 신데렐라를 그린 작가 중  의외로 남자들이 많은데 인노첸티도 그렇지만 힐러리 나잇도 남자다. 이 책은 그의 어머니에게 헌사하는 그림책이다. 다방면에서 뛰어난 활동을 한 그의 어머니도 그림책작가였으며 그는 어머니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은 듯.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엘로이즈시리즈가  작년에 나왔다.  
  
 


 
 

 
3.
Cinderella
K.Y. Craft는 일본태생의 그림책작가지만 해외에서 활동하는 여성작가이다.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화려하며 장식적이다. 고전적인 신데렐라라고 해야하나. 그녀의 이 책을 꿈꾸는 자를 위한 책이라고 썼다. 한장면 한 장면이 로코코 시대의 유화 그림을 보는 것 같다. 크래프트는 아마도 이 방면에서 뛰어난 그림책작가같다.  그녀는 자신의 창작동화보다는 전래동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작가인데, 자기의 구미에 맞게 각색한다. 아마 이 고전적인 시대에 매혹되어 있는 듯. 인물위주의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전체적으로 색이 통일감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
 












4. 
Cinderella루스 샌더스의 신데렐라는 크래프트만큼이나 화려하며 고전적이다. 크래프트의 그림과 전반적으로 비슷한데, 크래프트가 장식적인 인물위주의 그림을 그렸다면 루스 샌더스는 인물과 배경 모두 비슷하게 안배했다는 느낌이 든다.
 
 

 

 

5.

 
 

일본그림책 작가 코미네 유라의 신데렐라. 종이인형처럼 나약하고 순정만화처럼 라인이 흐늘흐늘한 병약한 신데렐라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색채는 파스텔풍처럼 온화하고 몽환적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인상적이거나 강렬한 씬은 없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장면장면은 간단하고 단순하다. 솔직히 페이지 수가 많지도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이유는 코미네 유라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세계를 가지고 있다라는 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유라의 작품은 한 눈에 그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림책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과 다른 그림스타일을 가지고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라인, 자신의 색채, 자신만의 터치을 확립해야 시선을 끌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7.


 

에롤 르 케인이 어떤 작가인지 솔직히 일본어를 몰라서 모르겠다.단지 그 또는 그녀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명작동화들을 자기식으로 각색한다는 것이다. 르 케인의 신데렐라는 이 작가만의 신데렐라는 신데렐라가 주인공이기보다는 현란한 색이 주인공이구나 싶을 정도로 어질어질하다. 여기에 모인 신데렐라 중에서 그 역활이 가장 비중이 없다구나 할까나. 장면장면은 실험적이고 기하학적인 무늬와 색은 현란한 가운데 상당히 일본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흑백의 그림과 어질어질한 색채의 대비가 인상적. 


실제 이 그림은 호박마차를 타고 궁으로 가는 장면인데, 색이 무지 아름답다. 나의 사진실력이 이렇게 형편없구나,뼈저리게 느낄 정도로 이 장면을 다 망쳐놓은 것 같다.


8.  
 

레인하트의 신데렐라 팝업북. 지금까지 나온 신데렐라 팝업북중에서 가장 가위질을 잘한, 정말이지 멋들어지게 만들어진 신데렐라가 아닐까싶다. 이 팝업북은 두말하면 잔소리.

 


9.
   

우리의 사랑스런 베벳 콜여사가 신데렐라를 남자로 바꿔버렸다. 자신만의 독특한 수채화 터치기법을 가지고 있는 콜여사는 신데렐라를 남자로, 옛 시대를 현재 시대로 배경을 바꾸며 아주아주 유머스럽게 이야기한다. 이 그림책 떼굴떼굴 구를 정도로 재미있었다. 이 책은 넘 유명해서 사진 생략. 
 
신데렐라의 그림책 판본을 수집하게 된 뚜렷한 계기는 없었던 것 같다. 단지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에 대한 그림책 작가들 각자의 스타일이 존재한다는 것에에 흥미를 느꼈다고나 할까. 이야기는 동일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표현해내는 장면 한장한장을 넘길 때마다 작가마다의 신데렐라의 차이와 다름을 확연하게 볼 수 있다. 어떤 작가는 요정할머니가 신데렐라를 변신시키는 장면에서, 또 어떤 작가는 마법의 시간이 풀려 계단을 내려오는 신데렐라에, 또 어떤 작가는 유리 구두 신는 장면에 초점을 맞춰 자신의 신데레라를 강조한다. 물론 인노첸티처럼 신데렐라를 20세기 초반 영국런던으로 바꾸기도 하도 콜여사처럼 여자를 남자로 바꾼 경우도 있지만.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의 매력이 어떻게 그림책 작가들의 그림을 예술의 경지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항상 궁금했다. 우리 나라 그림책 작가도 많은 신데렐라를 그리긴 했지만 유아틱한 수준을 넘지 못해서 수집대상에서 언제나 제외되었다. 언제쯤 우리 그림책 작가도 자신만의 신데렐라나 바리데기가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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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8-01-23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신데렐라 판본을 여러권 가지고 계시네요~.(오~~ 팝업북까지!!!) - 크래프트의 화풍은 미다스 왕과 황금 손길에서, 루스 샌더슨 그림 화풍은 나온 세익스피어 그림책(폭풍우) 시리즈에서 본 적 있네요. 이런 그림작가 책들도 소장하고 계시다니 부럽사옵니다.

기억의집 2008-01-23 16:37   좋아요 0 | URL
저의 살림 찌부러지기 일보직전입니다. 헤헤~
대신에 맨날 입고 있던 옷만 입고 다니잖아요. 요즘은 책 사는 거 줄이고 멋 좀 부려 볼려구요. 파마도 새로 하고 화장도 좀 세련되게, 스모키 화장하고 싶어요. 나이가 드니깐 좀 변하고 싶은데...어떻게 해야 변할 지 모르겠어요.
크래프트와 루스 샌더스의 그림 한번 검색해 봐야겠어요. 좋은 정보 감사^^*
 
달은 우유일지도 몰라 - 장독대 그림책 9
리자 슐만 글, 윌 힐렌브랜드 그림, 서남희 옮김 / 좋은책어린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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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소리소문 없이 모양이 바뀌는 달의 변화가 매혹적인가봐요. 지난 밤에 본 달은 둥근 달이였는데, 앗, 오늘은 초승달이다라고 아이들이 들뜬 목소리로 소리치니 말이예요.  

문득 아이의 외침에서, 이제 7살짜리도 달을 신화나 전설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 어릴 때, 좀 맹한 구석이 있어서 꽤 오랜동안 달에 토끼가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암스트롱이 달에 도착한 시기가 한참 지났지만, 사진 자료가 귀했던 시절이라서, 달에 대한 이미지는 동요나 동화책을 통해서니 당연히 과학적인 접근 방식보다는 신화를 더 철썩같이 믿었던 것이죠. 그러니 초승달이니 보름달이니 이런 용어들이 낯설기만 했지요.  

이 책의 주인공 로지는 밤하늘의 달을 보고, 달은 무엇으로 만든 것일까?하고 고양이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고양이는 달은 우유가 담긴 접시야하고 대답하자 로지는 아닐 수도 있다며 암탉에게 물어보자고 합니다. 암탉에게 가서 달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물어보면서, 로지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후렴구처럼 나비에게,개에게,생쥐에게 찾아가 반복적으로 물어봅니다. 동물들은 자기가 상상했던 달을 자기가 좋아하는 사물에 빗대어 대답하죠. 달은 달걀이야, 달은 버터야, 달은 밀가루야라고 말입니다.


이 책 읽고 달은 무엇일 것 같아?하고 물으니, 아이들이 씩씩하게 대답할 줄 알았더니, 망설이네요. 큰 애는 확실히 10살이다 보니, 이 책에서처럼 엄마, 달은 하애니깐 우유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딴에는 보고 읽고 듣은 것이 많으니, 황당한 답을 내 놓기가 무안했겠지요. 그래도 일단 큰애와 둘째를 골려주려고 달에는 토끼가 산대. 계수나무 아래에서 떡방아 찧는다고 하던데!라고 말해주니깐, 아이들이 왜 토끼가 달에 살아?하고 오히려 반문하더군요. 그런가?

이 책에 나온대로 달과자를 만들려고 준비 다 했는데, 저희 집에는 오븐이 없다는 사실을 준비를 다 한 다음 깨달았습니다. 이왕 밀가루로 달과자 만들려고 준비한 거 치우기도 그렇고 아이들이 하도 실망하길래 "그럼, 우리 밀가루로 달놀이 하자 "고 꼬드겨 밀가루 가지고 달놀이 해 봤습니다.
 

  
            밀가루를 가지고 일단 꾹꾹 누릅니다. 보름달 모양 만든다고 하더라구요.  


자기가 처음 달에 도착한 역사적인 순간이라며 기념으로 이름을 새겼습니다.  


저의 딸이 눌러 찍은 달의 해골입니다

  

자기도 보름달을 만들어 보겠다는군요 

 

달에 도착해 발을 내딛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조카도 열심히 달을 만들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멋진 둥근 달을 만들려고 하나 했더니

 

엄마, 달은 가면일지 몰라 

아냐, 모자야

달이 가면이든 모자든 아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달이 되었으면 해요. 달을 너무 과학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달을 보며 꿈꾸고 상상할 수 있도록 말이예요. 저희 한바탕의 달놀이 잔치를 벌이니 시간가는 줄도 몰랐네요. 잠깐 오늘은 무슨 달이 떳는지 까만 밤 하늘을 내다 볼까요!  달달 무슨 달 쟁반 같이 둥근 달 어디어디 떳니 우리집 지붕 위에 떳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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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소년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
다케우치 마코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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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cycle, bicycle, bicycle
 I want to ride my bicycle, bicycle, bicycle
 I want to ride my bicycle
 I want to ride my bike
 I want to ride my bicycle
 I want to ride it where I like

                                                                           퀸의 바이시클 레이스중

 

내가 주목하는 번역가 권영주씨의 근간번역작품이어서, 선듯, 아무생각 없이 구입했다. 권영주씨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아무래도 온다 리쿠의 영향이 없다고 말할 수 없겠지.  온다 리쿠의 작품 대부분을 권영주씨가 번역했으니깐. 일단 문장의 매끄러움은 말할 것도 없고 공감력 가는 언어의 선택이 탁월하다고 해야할까나. 외국 작품이 쉽게 읽힌다는 것은 작품자체의 재미있는 흡입력이 그 어떤 것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겠지만, 일단 번역을 잘 해서 그런거 아닌가. 들쑥날쑥한 언어의 선택이라든지, 딱부러지지 못한 흐리멍텅한 문장은 딱 질색. 게다가 요즘 일본 작품이 쏟아져 나오면서, 작가후기 읽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자그만치 한달반동안 감기로 기침을 콜록콜록하는 이유는 아마 자전거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닌 탓일게다. 자동차 운전을 못하니, 단시간안에 내가 가고 싶은 곳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를 준 것은 두 발이 아니고 자전거였다. 걸어다녔을 때는 못 느꼈던 바람의 흐름, 속도, 바람을 가로지르는 느낌이나 전에 못 느꼈던 지면의 상태(상향 또는 하향)을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자각하기 시작했다. 아마 자동차를 운전하면 또 다른 재미를 느끼겠지. 자전거가 주는 매력은 길을 떠나는 자유로움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바람의 자유까지도 느낄 수 있어서, 이 추운 겨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여기저기 누비니, 감기가 제대로 날리가 있나.  어디든 가고 싶어. 바람을 불면 부는 곳 어디든지 그 매서운 바람 맞아가면서 말이야. 

이 작품은 청춘성장소설이라고 자신을 명하지만, 딱히 자전거가 매개가 된 성장소설이라고 정의 내릴 순 없다. 단지  자전거로 좋아하고, 무거운 쪽보다는 가벼운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읽어볼 만 하다. 성장소설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이유는 화자인 주인공이  청소년시절부터 아이를 둔 아버지가 되어 자신의 아이에게 자전거를 가르치고 아들과 함께 할 자전거 레이스에 동참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자의 시선을 확 사로잡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쇼헤이의 친구 소타가 대학친구 쿠르베와 만든 핫카이 런(나중에 핫카이 랠리고 명칭이 변경된다)이라는 하치오지에서 동해까지 자전거 레이스를 만들고 쇼헤이가 그들의 랠리에 합류하면서, 쇼헤이가 관점에서 본 이야기들이다. 쇼헤이 중심으로 자신의 일상과 랠리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지만 뮌가 확실하게 와 닿지 않는다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작가 후기를 읽고 이야기의 중심무게가 왜 쇼헤이 한명인지를 알게 되었다. 여기 거론되는 중심인물중 하나는 소타인데 말이야. 

이 작품은 원래 2년에 걸쳐 휴대전화로 연재된 내용을 묶어 2004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쇼헤이와 소타의 자전거를 매개로한 25년간의 세월을 그렸는데 ,단행본으로 나왔을 때 대폭 압축해서 발간되어 나온 것이라고 한다. 이야기에 흐름에 큰 무리는 없지만, 읽어본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쇼헤이와 소타의 관계, 그리고 소타를 중심으로 한 핵심적인 이야기가 없어, 뭔가 빠진 것 같은 개운치 않다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달리 말하면 소타의 삶 또한 궁금하단 말씀.

일본소설은 흡입력도 있고 재미도 있으며 시간떼우기에 안성만춤이다. 하루종일 아이들하고 지지고 볶는  아줌마인 나한테는 딱 맞는 맞춤소설이라고나할까나. 근데 난 그네들 소설 읽으면, 정말이지 글을 읽는다라는 느낌을 받는다. 미스터리 작가든, 성장소설 작가든, 로맨스 작가든 어느 쟝르의 일본 소설을 읽어도 영상적이다, 글이 화면처럼 분할되어 있다라는 느낌은 받지 않는다. 여타의 서구 작가들이 영화를 염두해 둔 것처럼 이야기를 이끌어 내며 미니시리즈나 영화같은 이야기 구조를 갖고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영상적으로 이끌어 내지만, 일본작가들한테서는 그런 것 감지할 수가 없다. 글솜씨가 훌륭하던 평이하든지 간에, 여하튼 내가 글을 읽.는.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번 겨울에 뜨근한 부엌 바닥(보일러 틀면 부엌부터 따스해지더라) 에 앉아, 일본 소설만 줄창 일본소설만 읽는 이유는 바로 읽는다라는 느낌이 확연히 들어서이다.  소설이 영상적 글쓰기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싶지만, 일단 내가  드라마 안 보고 책을 선택한 이유는 글을 읽고 싶어서지 영상적으로 상상하고 싶어서가 아니거든. 문체가 딱딱하든 건조하든 느끼하든  감정이 풍부하든 적절하든지간에 글을 읽는다라는 생각이 들어지 글을 읽으면서까지 영상적으로 상상하기 싫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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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때문에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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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이던가. 여름이 되기전에, 딸아이랑 같이 아들을 기다리기 위해 학교 근처 아파트주변에서 서성이다가 딸아이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 때 아이들을 모집하기 위하여 연필을 나누어주던 씽크빅인가 뭔가 하는 학습지 교사가 전해주던 연필을 받아 예의상 잠깐 얘기를 나누고 집으로 가려고 뒤돌아 집으로 가려는 순간, 딸아이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허둥지둥 주변을 훑어봐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머리가 새하애지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아들애한테 그 자리에서 가만이 있으라고 하고는 아파트단지 안을 아이를 찾아 헤매고 다녔다. 아무리 큰 소리로 딸아이 이름을 불러보아도 울리는 것은 내 목소리뿐.. 엄마, 나 여깄어,하는 아이의 장난끼 넘치는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숨바꼭질 놀이였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 넓은 아파트를 30분동안 헤매는 동안, 미친 듯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아이를 못 찾으면 어떻하나하는 생각에 울음이 나왔다. 아이와 함께 한 순간순간이 머리속에서 휙휙 지나가면서 가슴이 터져 버리고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눈물로 시야가 보이지 않고 울부짖을 때, 울고 있는 딸아이를 발견하였다. 딸아이를 본 순간, 마음 속에선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외쳤지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이눔의 기집애야, 어디 갔었어라며 소리를 꿱 질렀버렸다. 아이를 보자마자 화가 솟구쳐 오른 것이다. 본심은 다행이었을지 몰라도 한순간 애 태운, 아이의 지멋대로한 한 행동에 대한 감정이 복받혀 오른 것이었다.

울고 있는 아이를 동네 요쿠르트 아줌마가 발견하고 집에 데려다 주려고 달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줌마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울고 있는 아이를 업고 큰 애한테 갔다. 아이를 업고 큰 애가 있는 아파트 후문까지 걸어가면서, 천만다행인 이 순간을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 얼마 되지도 않았던 30분도 피가 마르는데, 아이를 잃고 사는 사람들은 아이의 생사여부로 인해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닐것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의 죽음만으로도 절망을 안고 사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데,  실종으로 그 아이의 생사여부조차 모르는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아이가 살아있다는 실날같은 희망만이 그들의 삶에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을까.  난 아이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것 때문에 더욱더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든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길거리에서 나를 찾아 헤메는 것은 아닌지, 혹시나 몹쓸 짓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따스한 밥은 먹고 사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피가 마르고 속이 타들어가는 생활을 평생동안 계속할 수 밖에 없는 부모인 그들을 생각하면 나 또한 남의 일이라고 치부하기 보다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차라리 아이의 죽음은 매듭을 짓기라도 하지만 아이의 실종은 언제나 이어져야 하니깐.  

뮈소의 이번 작품은 재미면에서 대박이라는 점에서는 인정하지만, 주제와 이야기의 결말은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힘들었다. 제 3의 관점에서 읽어야하는데, 엄마의 입장에서 읽어서 그런가.

만약에 나에게 이 책의 주인공 마크와 같은 일이 생긴다면, 난 결코 극복하지 못 할 것이다. 내가 죄책감과 고통 그리고 끝을 모르는 절망 속에서 나날을 보내질데, 어찌 아이를 데려간 사람을 용서할 수 있으리오. 난 절대로 그들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아이와 보낸 행복했던 추억의 날들이 있기에 더욱더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리라. 어쩌면 내가 죽는 날, 그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 있고 극복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ps- 기욤, 당신 무늬만 프랑스인지. 미국 영화와 팝음식을 넘 많이 보고 들었어. 이제 프랑스적인 글쓰기는 볼 수 없는 거야. 난 무슨 미국작가 쓴 소설 읽는 줄 알았다니깐. 흡입력은 만땅이고 구성은 영화적이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니깐. 이게 세계화야. 그런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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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10-04-27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욤 책 한권 읽고 나서 이책이 왜 베스트셀러인지 이해불가 였어요. 한국에서만 잘팔리는 기이한 현상인것 같아요.

기억의집 2010-04-28 14:48   좋아요 0 | URL
저도요. 이 책 이외에는 기욤 절대로 읽지 않아요. 프랑스아마존도 들어가 봤는데 인기는 제법 있는 거 같던데, 영어로 쓰면 미국대중문학 작가인 줄 알거에요^^
 
작은 전나무 - 안데르센 명작 동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이상헌 옮김, 마르크 부타방 그림 / 큰북작은북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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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이 샤롤 페로나 그림형제의 동화와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아세요. 음...금방 떠오르지 않는다구요. 혹 그럼 생각해보신 적은 있나요. 만약에 금방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질문을 달리 해볼께요. 이들 세 작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이 바보야, 세계적인 유명한 동화작가들이잖아. 딩동댕동.  

일단 갈라보죠. 그들의 차이점을 말이죠. 샤롤 페로나 그림 형제가 낸 작품집은 사람들 사이에서 입으로 입으로 전해내려 온 구전 설화나 민담을 수집해서 낸 것이지만 안데르센의 작품의 경우는, 순수창작물이라는 점이 페로와 그림형제의 동화를 갈라 놓는 가장 큰 차이점일 것입니다. 우리가 안데르센을 페로나 그림형제와 묶어 놓는 경우는 그의 작품들이 100년 이상 입으로, 책으로 한 세대와 다음세대를 이어주고 이어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구전동화작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흔한 말로 공전의 히트를 한 부작용이죠. 말이 공전의 히트지 안데르센만큼 자신의 창작물이 전 세계적으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읽히는 작가가 또 있을까요. 세익스피어가 있다구요. 정말 그럴까요.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안데르센의 이야기가 몇 개나 될까요. 성냥팔이 소녀, 벌거벗은 임금님, 미운 오리 새끼, 눈의 여왕 또또또 뭐 있을까요. 130여개나 되는 그의 작품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몇 개의 작품만이 우리 입에 오르내리며 그를 동화의 절대강자로 알고 있는 것뿐이죠. 

저도 솔직히 그의 작품을 완전히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저는 그림책분야에 흥미가 있고 좋아하기 때문에 안데르센을 원작으로 하는 그림책이 발간될 때마다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의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저력은 그의 이야기가 지닌 보편성도 한 몫 했겠지만, 20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되서, 그림책 분야가 어느 시대보다도 더욱더 활발해지면서, 자기가 어렸을 때 듣던 안데르센 이야기를 자신의 터치로 그림책을 만들어 내면서 안데르센은 더욱더 더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동화작가가 된 것이겠죠. 어쩜 이 그림책은 다음 세대와 이어주고 전 세대와 다음 세대의 공통 분모가 되겠죠. 

안데르센의 작품중에서 덜 알려진 <눈의 여왕>이라고 알고 계신가요. 이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그림책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 발간된 눈의여왕은 웅진 주니어에서 나온 키릴 첼루슈킨과 어린이 작가정신에서 나온 P.J. 린치의 작품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발간되지는 않았지만  Vladylav Yeko가 그린 <눈의 여왕>이 있습니다. 아마 이 세명의 그림작가는 어린 시절의 누군가로부터, 아니면 책에서 눈의 여왕을 듣거나 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작가들은 성인이 되서 자신의 터치로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재해석함으로써 각기 다른 눈의 여왕이 탄생함과 동시에 이 책을 읽은 어린독자는 또한 성인이 되어 어린시절에 본 이들 작가가 그린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다시 자기 스타일로 해석함으로써, 매체가 무엇이든지간에 안데르센의 이야기는 후대로 영원히 이어지면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겠죠.  

(여커라고 읽어야하나요. 그의 눈의 여왕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눈의 여왕이 두권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섬세하고 화려한 일러스트에 반해 구입하게 되었지요)

<작은 전나무>의 경우, 몇몇의 작가들이 그림책으로 내 놓긴 했지만 그다지 유명한 작품은 아닙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안데르센의 <작은 전나무>가 그림책으로 나온 경우는 이 작품 마르크 부타방의 그림이 유일무이한 버젼입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안데르센의 동화집으로 묶여 있는 경우는 있지만 그림책으로는 아예 없습니다. 일단 글밥이 많아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면 읽을 수 있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의 10살난 아들하고 이 책 읽었는데, 아들은 현재 가치의 소중함을 모르고 다른 세계를 동경하다 한 줌의 재로 남겨진 전나무이야기의 의미를 쉽게 받아 들이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기사 인생 10년 산 놈이 현재를 소중히 여겨라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안데르센할어버지의 말을 제대로 알아 들을 턱이 없지요. 한번 더 제가 읽어 주었는데 막판에 다 읽고 엄마, 나 무슨 말인지 진짜 잘 모르겠어,라고 하더라구요. 안데르센의 동화는 끝이 좀 아린, 묘한 씁쓸함과 아이러니가 강한데 이 작품도 현실의 행복에 만족하지 못한 전나무의 비참한 최후라는 점에서, 결코 해피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교훈적이라면 교훈적이지요.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생이란 이런 것이란다,라는 어느 정도의 사회경험과 나이에 이르러서야 깨달을 수 있는 인생의 도를 10살짜리 아이가 금방 알아채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요. 현재 지금 한 순간 한 순간을 소중히 여겨라. 미래는 현재의 결과물이니깐. 

부타방의 그림의 색채는 중간톤으로 화려하거나 섬세기보다는 소박하다는 느낌이 들고 그림의 라인은 가늘어 여리여리합니다. 겉표지의 눈 내린 나무가지를 그린 그림을 보면 아시겠지만 전체적으로 싸한 파스스름한 차가운 겨울이라기보다는 실내에서 바라보는 겨울 풍경처럼 따스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크리스마스쯤에서 아이들하고 뜨근한 방바닥에 배 깔고 누워 읽어주거나 읽으면, 집안 분위기가 절로 따스해질 정도입니다.  

이 부타방의 <작은 전나무>를 읽고 나서, 언젠가는 이 부타방의 그림을 능가하는 <작은 전나무>의 다른 버젼이 나오겠지요. 그게 우리나라의 작가였으면 합니다. 비록 원작이 안데르센이긴 하지만 그림은 우리나라 작가가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세계적인 작품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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