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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 주말을 정말 남들이 들으면 샘이 날 정도로 신나고 재밌고 보람차게 보낸 사람이라도 월요일에 대한 압박감으로 우울해지려고 하는 법인데, 주말을 그렇게 보내지 못한 내 마음은 더욱 우울해졌다. 나는 이대로 영영 땅으로 꺼지고 마는 것인가, 덜컥 겁이 났다.  

빵과 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떼운 게 머릿속에 파노라마 되어 스치고 지나갔다. 제대로된 밥 한끼 먹지 않고 주말이 다 갔다고 생각하니 슬픔과 억울함과 짜증이 몰려왔다. 결국 다 내 잘못이지만, 난 도대체 왜 이러고 사는지, 정말 내 스스로가 미울 정도였다.  

안 되겠다 싶어서 대충 옷을 갈아입고 지갑을 챙겨 동네 마트로 갔다. 새로 생긴 롯데 마이슈퍼. 원래 구멍가게까지 대기업이 장악하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가지 않겠다고 맘으로 외쳤던 곳인데 어쩔 수 없다. 제대로된 밥을 먹으려면, 동네 마트엔 고기나 생선은 안 파니까.  

저녁 8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도 마트 안은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쇼핑 바구니에 사과 두 개, 방울토마토 한 팩, 한우 치마살, 무순, 블루베리요거트, 호두파이 등을 챙겨넣었다. 아, 고기 구워먹는데 설중매가 빠질 수 없지. 술도 한 병. 

제법 묵직한 비닐 봉지를 들고 집까지 오르막길을 걸어오는데, 갑자기 차가워진 바람에, 어둠이 내린 골목에, 사방이 다 어득했다. 가을이 진짜 오려나, 벌써 쓸쓸하다. 나 원래 가을 타는데, 무덥다가 어느 순간 더위가 사라지는 그 순간, 한해가 또 다 저무는가 싶어서 난 얼마나 슬펐던가. 

집에 와서 고기를 굽고, 과일을 씻고, 술을 따르고, 정신없이 먹고 마셨다. 고기를 다 먹고는, 후식으로 빵을 먹고 요거트를 퍼먹으며 위안을 했다. 스스로를. 괜찮다고. 너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너 원래 혼자서도 잘 살아왔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약하게 구냐고. 

혹시나 했었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상가집에 간다던 사람. 일찍 마치면 연락을 한다고 했었다. 그래서 저녁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면서 미련하게도 기다렸다. 혹시나 싶어 머리도 감고, 그러고 빈방에 혼자 쳐박혀서 책을 읽고 있었으나, 책 내용이 눈에 들어올리가. 

주말을 몽땅 날려버리고도. 그럴 수밖에 없던 사연이 있었으니까 이해해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서운하고 섭섭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나. 이 원망의 화살이 결국 나를 향하는 건 분명 문제인데. 나는 왜 계속 이렇게 마음의 서늘한 기운을 견뎌내지 못하고 점점 못나고 약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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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마음이 노력한다고 어떻게 되는 건 아닌데,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어리석게도 내가 노력하면 된다고 믿었다. 자신이 없긴 했지만, 내가 이토록 간절히 당신을 원하는 건 너무나 분명하기에, 내가 얼마나 간절히 당신을 원하는지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직 당신이 나를 보지 않는 이유가, 내가 얼마나 당신을 원하고 사랑하는지 당신이 아직, 미처 알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이건 바보 같다 못해, 단순해서 아름다운 믿음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렀다. 나는 당신 앞에서 좋은 여자가 되고 싶었고, 당신 앞에서 조금이라도 의심을 하거나 변심할 여지를 주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게 불확실하고, 너무나 빨리 변해가는 이 세상에서, 적어도 나 하나만큼은 우직한 믿음으로 당신을 바라보며, 단 하나의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면, 세상살이에 지친 당신이 한번쯤은 나를 볼 수 있겠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안도감, 그 편안함, 적어도 당신을 향해 흔들리지 않는 누군가가 있단, 그 느낌이 당신을 조금은 더 행복하게 할 수도 있겠다 믿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꼭 그렇지 않더라도.

그리고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나는 점점 사랑받는 방법은 물론 사랑하는 방법도 잊어가고 있다. 내가 아는 건 당신을 향해 변함없이 웃어주는 것, 당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 그게 전부다. 나도 알고 있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는 걸. 나는 내 마음에 솔직하지 못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백 마디 말 중 한 마디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삼켜버렸다. 내가 하고 싶은 행동 백 가지 중 한 가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나는 화내는 법, 투덜대는 법, 짜증내는 법 같은 것도 잊어버린 퇴화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당신 앞이 아니라 다른 사람 앞에서도 모든 게 서툴고,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고 눈치만 잔뜩 보는 어정쩡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제 나는 조금 안다. 내가 정말 해야할 노력은 내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당신에게 보여주려는, 전달하려는 노력이 아니라는 걸. 내가 정말 해야할 것은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그 감정들을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한다는 걸. 나는 예전에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나를 찾고 싶다. 내게 지금 필요한 건, 바로 그 노력이며 그 노력만이 내 마음을 바꿈은 물론 당신도 바꿀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싶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지금 당신을 돌아, 우주보다 넓은 바다보다 깊은 나에게로 가고 있는 중이니까. 당신에겐 그저 고맙다. 그리고 이런 나도 기특하다. 나는 노력할 것이다. 당신에게 기울였던 노력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이제 그 길이 조금 보이려고 한다. 안녕. 안녕. 평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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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통기타라고 불리는, 어쿠스틱 기타를 주말마다 배우고 있다. 아직 모든 게 엉성하고, 이상하고, 아프다. 암튼 배움의 길은 언제나 멀고도 험하다. 초급반에서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들이 20명 남짓되는데, 수업 후에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먹고 나름 친해져가는 중이다. 연령대도 다양하고, 하는 일도 다른데, 그래도 언제나 낯선 사람과의 새로운 만남은 사람들을 조금씩 흥분시키는 것 같다. 다들 기타 배우는 즐거움뿐 아니라, 사람들 만나는 재미에도 빠져가는 것 같다. 삼겹살을 구워먹다가 앞자리에 앉아 있던 무려 21살 청년이랑 이야기를 하게 됐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나도 모르게 너무 활짝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거참.

아직 너무나 앳된 그 아이는 거침없이 말하고 거침없이 웃었다. 자기 휴대폰을 내밀며 번호 찍어달라는 그 동작까지 너무 자연스럽다고 해야할까.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내 폰을 그리 당당히 내밀며 번호 좀 찍어줘요 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었는지, 잠깐 아득해질 정도. 또박또박 말하고, 웃고, 선명하다는 것이 그 아이에 대한 느낌이다. 어느새 반말을 섞어서 누나누나 이렇게 말하는데도, 전혀 기분이 상하거나 예의없단 느낌이 드는 게 아니라, 그냥, 참 발랄하고 귀여운 아이란 생각이 들었으니 내가 이상한 걸까.

나는 분명 그 아이를 이성으로 생각하거나 매력을 느낀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그 거침없음, 분명함, 나이에 맞는 그 색깔이 너무 신선했다. 그래서 이 아이가 뭐라고 장난을 치고 놀리고 웃든지 다 이해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너무나 선한 마음이 들었다. 나름 까칠한 나도, 이렇게 느낄 정도였으니 다른 누님들의 이야기는 해서 무엇하리오.

"넌 나이 안 먹을 줄 알아? 계속 누나보고 나이 많다고 놀리네?"

"힛. 암만 내가 나이 먹어도 누나보단 어리거든요. 드라마에서 봤는데, 어린 것도 힘이고 능력이래요."

그래. 니 말 맞다. 요즘 느끼는 건, 남녀차별 인종차별보다 백만 배 더 무서운 게 에이지즘ageism이다. 그런데 남녀차별이나 인종차별 같은 문제도 심각하지만, 나이에 따른 차별과 편견은 우리 모두가 그 대상자가 언젠가는 된다는 점에서 정말 위험한 것 같다. 그리고 나 또한 나보다 젊고 어린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그 약간의 질투 섞음과 동경 같은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린 것이 무기가 될 수 있지만, 그 무기는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고 영원할 수도 없다. 그 솜방망이 같은 무기만으로 세상을 살아나갈 순 없는 노릇이고, 비단 나이뿐만이 아니라, 또 얼마나 많은 차별과 억압 속에서 살아나가고 버텨야하는 것인가.

그렇지만 더 슬픈 건, 어쩌랴. 나도 어린 남자(얼굴이 그닥 잘생기지도 않았는데)에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거 보면, 이런 생각 자체가 다 쓸데없는 것인 것 같기도 하고, 자연의 섭리같기도 하고, 뿌린대로 거두는 거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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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 탓인가. 밤마다 잠을 거의 잘 이루지 못하고 있다. 눈꺼풀은 천금 같은 무게로 나를 짓누르는데 정신은 말똥말똥, 모든 게 다 끈적한 그 불쾌감 속에서 도통 잠을 잘 이룰 수가 없다. 더위 탓이라고 그저 넘겨버리기엔 나 요즘 너무 소인배 같은 행태를 벌이고 있다. 어쩔 것이냐.

머리가 안 돌아가서 그런가, 이해력 내지 포용력, 기억력 모든 전반적인 부분에서 빨간불이 들어온 상태다. 나 어쩜 좋으냐. 이 극적인 더위 속에서 지난 주말 나는 소개팅이란 것을 했다. 사실 예전에 많이 해보긴 했고, 또 내가 그닥 사람 만나는 걸 크게 꺼리거나 말하길 불편해하는 게 아니라서 별로 걱정할 것도 없었다. 다만 하도 오랜만에 화장을 해서일까. 마스카라 뚜껑을 열었는데 굳어 있었단 거 정도. 

만남의 자리에 주선자도 함께 나와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밥을 먹으러 갔다. 참고로 나의 본명은 정말 우리나라 여자들 사이에서 흔하니 흔한, 길거리에서 부르면 5-6명은 뒤돌아볼법한 이름 "O희"다. 소개팅에 나온 남자 이름이 "희O"였는데, 서로 이름을 말하며 소개를 한 후 이런 대화를 나눴다.

 

나 : 이름에 희자 어느 한자 쓰세요?

소개팅남 : 빛날 희자요. O희씨는요?

나 : 아, 저도 그거 쓰는데.

주선자남 : 와, 이런 인연이......하하하.

나 : 끝에 이름 한자는 뭐에요?

소개팅남 : 모시기 O자 입니다. O씨는요?

나 : 요시기 O자요. 이름 뜻이 요시기의 희망이란 뜻이에요.

소개팅남, 주선자남 : ......

 

이거 뭘까.. 완전 바보 같은 대화의 비참한 결말?

더 웃긴 건 저렇게 얘기를 하고 3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내 이름 한자가 빛날 희가 아니라, 바랄 희라는 사실이 떠올랐으니, 이거 정말 뭥미. ㅜㅜ 나 정말 바보 같지 않은가. 27년 사용한 내 이름 석자의 한자가 헷갈리다니. 순간 뻥... 정말 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거나, 아니면, 더위에 흐르는 땀과 함께 내 정신이 빠져나간걸까.

이거 마치, 남자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억지 부리듯 뭔가 공통점을 엮고자 하는 폭탄 여인의 눈물겨운 노력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그런데 결국엔 무식함과 거짓 꾸밈이 탄로나서 비참한 결말을 맞아야할 것만 같은. 아. 놔. 왜 이러냐. 너 정말. 내 자신이지만, 정말 부끄럽다. 진짜.

나사가 언제나 풀린 듯한 나. 늘 돌아서서, 머리를 쥐어받으며 자학하는 것도 지겹다. 난 정말 외로울 자격도 없다만...이렇게 더위에 정신 못차리고, 혼 빠져나간 나 같은 여자, 그치만...그치만...구제해줄 남자 좀 없을까나. 아. 더운데 왜 외롭고 난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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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네 살 아래인 내 남동생.

네 살 터울은 특히 누나와 남동생 사이라면 정말 까마득한 나이 차이다. 내가 내 방에 친구들을 모아놓고 같은 반 남학생들의 종합 점수판(?)을 만들던 초등학교 5학년 때, 이 아이는 엄마 손 잡고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대학교 새내기가 되어 엠티니 미팅이니 놀러 다닐 때, 이 아이는 빡빡머리 중딩이었다. 그래서 내가 동생에 대해 갖고 있는 마음은 순도 백퍼센트의 남매 간 마음이라고 보기 어렵다. 어느 정도는 엄마가 자식 보듯, 이모가 조카 보듯 그런 마음이 상당 부분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네 살 터울은 동생이 아무리 내 속을 뒤집는 짓을 한다고 해도, 어린 것이 뭘 알겠어 라며 제법 쿨한 이해력을 발휘할 수 있다. 나는 두 살 위의 언니랑은 정말 목숨걸고, 자존심 운운하며 독하게 싸웠고, 싸우고나서도 말 안하고 서로 무시하며 버티기를 며칠이나 했지만. 동생과의 관계에서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싸운 기억도 별로 없고, 싸웠다해도 딱히 특별한 화해의 손짓 없이 예전처럼 돌아갔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원만하게(?) 동생과 지낸 것이 네 살 많은 누나로서의 나의 넓은 아량(?)인 줄 알았다. 정말 그런 줄만 알았다. 내가 착하게, 동생을 아껴주고 이해해서 그런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건 단단한 착각이었다.

요즘 어린 아해(?)들답게 솔직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한 녀석이지만, 누나랍시고, 네 살 많이 먹었다고 동생 앞에서 이래저래 조언이라고 떠들어대는 게 분명 얄미웠을텐데, 그런 밉살스러운 구석이 많은 난데, 그걸 다 그러려니 참아준 동생의 넓은 이해심이 우리 둘 관계의 긍정적 밑바닥을 형성했음을 이제야 알다니. 난 역시 모자라도 한참을 모자란 누나다. 네 살이나(?) 많은 누나니까 함부로 대들지 않고, 알았다, 알았어, 하며 고개를 숙여준 대인배 동생에게 오늘은 맘껏 경의를 표한다. 귀여운 녀석. 이 사진찍을 땐 귀여웠는데, 지금은 쿨럭(ㅜㅜ) 이게 다 군대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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