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서평] 김갑수 저 < 압록강을 넘어서 : 근현대사의 정수를 꿰뚫는 김갑수의 역사팩션 >을 읽고 / 2012. 08., 414쪽, CNC Books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까지를 시대 배경으로 한 '역사 팩션'이다. 등장인물과 주요 상황설정이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사실 팩션이라 부르기도 어렵기는 하다.

나는 일제시대 국내와 해외, 특히 만주와 상해 등에서 진행된 항일 독립투쟁에 대해 제대로 공부한 기억이 없다. 특히 1919년 기미독립투쟁 이전에 대해서는.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소설로서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도 역사적 사실의 실제 모습을 알게 해준다.

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배우는 머저리 같은 '암기'와 가끔씩 TV나 잡지에 등장하는 독립투사 일대기, <해방전후사의 인식>, <태백산맥> 등 대학 시절 부분적으로 읽은 책들과 졸업 후 <아리랑>이나 기타 자료 등에서 간헐적으로 읽은 기억이 나에게는 전부였다. 그만큼 일제 식민지 시절 항일 독립투쟁에 대한 사실을 잘 모르는 상태이고, 그나마도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몇 년째 책을 읽으면서도 계속 뒷머리가 땡겨지는 느낌이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튼 우연한 기회에 직접 작가에게서 구입하게 된 이 책은 나에게 소중한 기회와 계기를 주었다.

작품 속에는 역사 소설답게 많은 등장인물이 나타난다. 충청도 갑부의 아들 김태수, 조선근위대 간부 신규식, 지식인 민제호와 민필호 형제, 파란만장한 탄생사를 간직한 백주원 등이 주인공이며 그 이외에 실제 상해와 만주의 독립투쟁을 진행했던 개인과 단체가 등장한다. 박찬익, 동세사와 박달학원, 박은식, 조용은, 신채오, 이동녕, 이시영, 김좌진, 안창호, 신채호, 조소앙, 장덕수, 김규식, 안중근, 여운형, 이상설,이준, 상해임시정부, 대한광복군 등이 그들이다. 또한 이완용, 최남선, 이광수와 이승만 등 변절자와 기회주의자의 면면도 나타난다. 물론 이토오 히로부미와 테라우치 등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원세개, 쑨원 등 중국인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전개도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이들이 각각 어떤 조건과 처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어떤 경로를 통해 상해와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는지, 어떤 고민과 노력이 전개되었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실패하고 생을 마감했는지 세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품의 결말이 '두 연인 간의 사랑'으로 마무리되는 듯한 장면에 대해 어떤 분이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두 사람의 '사랑'이 자신들만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동지에 대한 사랑, 민족과 민중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과 함께하는 것인 이상, 아니 함께하는 것이 제대로 된 독립투쟁이고 혁명이고 사랑이라는 저자의 속내에 공감한다. 오히려 인간이 아닌 권력이나 이념이나 돈을 더 '사랑하는' 듯한 현대 한국사회의 모습에 대해 비판적이다.
주인공 신규식의 의견, "인간이 인간이 아닌 것에 이성의 힘과 열정을 쏟은 것은 어떠한 경우든 그것은 우상숭배와 같다"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실천적 삶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한 실제 인물들을 등장시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공적을 이루고도 안타깝게도 감추어져 있는 인물들을 발굴하여 세상에 알리려는 것도 이 소설의 중요한 의도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특히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간도의 독립군 투쟁인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세계 독립운동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성과를 남겼음을 사료를 기초로 세세하게 다룬 장면들이 압권이었다.
외세의 지원 없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군대가 제국주의의 정예군과 맞붙어 두 번씩이나 대첩을 이루어낸 역사는 대단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이미 구한말부터 의병을 이끌고 치열한 전투 경험을 쌓았던 홍범도는 간도국민회 산하 대한독립군 700명을 지휘하여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까지 들어온 일본군을 궤멸시켜 버렸다."

미디어오늘 2012년 9월 17일자 '김상수 칼럼'에 이 작품에 대한 평이 있다.("역사는 모욕이나 능욕의 대상이 아니다"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newsview?newsid=20120917134526374) 내가 한국근대사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여 '인물 발굴'이나 '사료를 기초'로 했다는 평론의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김상수씨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면 대단한 작품이라는 데 이의가 없다.

이 작품을 통해 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교과서로 어설프게 배우고 만 후 항일 독립운동에 대해 방송이나 신문으로만 접한 이들이 보통 기억하고 있는 상해임시정부의 주요 인물과 역할에 대해서, 특히 초창기 독립투쟁의 기틀을 마련한 이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동세사와 박달학원, 항일 독립투사들의 1912년 신해혁명 가담, 신한청년당과 신한혁명당, 무오독립선언(1918년 11월 중국에서 독립운동가 39명의 대한독립선언문 발표) 등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항일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항일 독립투쟁에 대해 국내파와 해외파, 상해파와 만주파, 무장투쟁파와 실력양성파, 우익과 좌익 등으로 단순한 이분법으로 갈라치는 이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독립투사들의 고민과 갈등을 접할 수 있다. 그들의 고민과 갈등은 1980년대 이후 분단 이데올로기 속에서 지속적으로 분열과 반목을 계속해온 운동권 또는 민주진보진영에 대해 많은 공감을 불러오면서도 깨닫게 해주는 바가 있다.

* 참고로 이 책은 일반 인터넷 서점에서는 구입할 수가 없다. 출판사인 CNC Books 사이트에서만 가능하다. (http://www.cncbooks.co.kr/front/php/product.php?product_no=30&main_cate_no=1&display_group=2)

[ 2013년 4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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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
이시우 사진 / 인간사랑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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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이시우 작 < 비무장 지대에서의 사색 >을 읽고 / 2007. 06., 104쪽, 인간사랑


사진작가 이시우는 최진섭 작가의 <법정 콘서트 무죄>(2012. 10 창해)를 읽으면서 알게되었다. 사진 작품집이니 '읽었다'가 아니라 '감상했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느끼는 것이 맞을 듯 하다.

<법정 콘서트 무죄>에서 알게된 이 작가는 예술가이자 사상가이고 평화운동가이자 유엔사령부 등 한국전쟁 전문가였고, 법률가보다 국가보안법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주제를 정하면 그 주제를 자신이 완벽하게 이해하기 전에는 사진 촬영을 나가지 않는 예술가였고, 주제에 대한 미학적 철학적 역사적 인식이 없이는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예술가였다. 오랜 공부와 연구를 통해 필요한 내용이 얻어진 후에 비로소 촬영 준비를 시작한다는 작가. 사진 촬영을 위해 수 없이 많은 날을 촬영 현장을 답사하면서 오래도록 물끄러미 돌 하나,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구름 한 점을 바라보면서 사색에 잠기곤 하는 작가였다.

그렇게 묘사되고 느껴지는 작가의 사진 작품은 돈을 주고 사서 보는 게 예의리라 생각했다. 100쪽 남짓 되는 사진 작품책을 읽는 데 며칠이 걸렸다. "왜 이걸 찍었을까?" "왜 이런 설명을 달았을까?" 작가의 사진 작품과 시 구절같은 문장을 몇 번이고 읽고 이해해보려 가슴으로 받아보려 애썼다. 물론 나로서는 쉽지 않았다. 자주 펼쳐보고 문득 생각나면 펼쳐보면 언젠가 깨달음이 있겠지 생각하며 책꽂이에 일단 꽂아 두었다.

사진 작품에 대한 서평을 쓸 자신이 없어서 송주성이라는 분이 쓴 글을 옮겨 본다. 나의 어줍잖은 서평보다 송주성씨의 설명이 사진 작품을 제대로 묘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자연의 질서는 우리에게 그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실을 매순간 가르쳐 준다. 봄 한 철 살다 가야 하는 풀벌레 한 마리가들판 가득 몰려오는 여름을 막을 수 없듯이 저 당 속 깊은 곳에서 쿵쿵 울리며 다가오는 통일의 역사를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그 소리를 누가 듣는가? 뻘밭 아래 깊은 땅 속을 쿵쿵 울리며 걸어오는 진흙소의 걸음걸이를 누가 듣는가? 연안 박지원 선생은 '농맹(籠盲)'됨을 경계하라고 했다. 천하에 천둥번개가 쳐도 귀머거리는 듣지 못하고 온 산하 단풍이 휘황찬란해도 소경은 그를 보지 못한다고 했다.

 

들녘에 가득 몰려오는 여름을 아는 농부처럼 통일의 역사를 위해 씨부리는 자는 통일이 걸어오는 소리를 듣는다. 이시우의 사진은 그 소리를 듣고 있고, 그 소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사진에서 드러나는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는 분단현실을 지시하는 사물의 코앞에다가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것은 역으로 우리로 하여금 분단현실의 증거들과 상처들에 대하여 눈을 들이밀고 보도록 요구하고 있다. 마치 지뢰 표지판에다 얼굴을 들이대고 바라보듯 앵들의 중심에 지뢰 표지판이 커다랗게 들어선다. 그리고 지로 표지판 너머에는 티없이 맑은 조국의 하늘이 시원의 어느 때마냥 끝없이 펼쳐진다.

 

바로 이것이다. 이시우 사진의 특징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의 사진에는 단 두 가지 대상이 대비되어 있는 것이다. 지뢰 표지판, 철조망, 포격으로 뼈대만 남은 노동당사, 총탄이 뚫고 지나간 벽들이 화면의 정중앙부에 '정밀묘사'되어서 우리의 눈길을 사정없이 붙들어 맨다. 그리고 그 사진들에는 어김없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들판과 하늘이 드리워져 우리의 시선을 다시 아득한 어디로 끌고가 버린다. 이 집중과 확산, 화면 가득 확대되고 정밀묘사된 녹슨 철조망과 지뢰 표지판..., 그리고 원시의 그날처럼 아득히 펼쳐지는 아득한 조국의 산하. 너무 삭막하여 가슴이 스산해지고 조금만 오래 들여다 보고 있으면 결딜 수 없는 답답함이 짓눌러 숨을 가쁘게 하는 분단현실, 그 낱낱의 모습들, 그리고 이에 완강히 맞서서 버티고 선 조국 산하의 시리도록 아득하게 아프도록 아름답게 서 있는 모습.

 

그러면 이 사진은 북녘 하늘과 산을 '촬영'한 것인가? 이 사진은 우리가 그 사진 앞에 설 때 완성된다. 왜냐하면 이 사진 앞에 우리가 설 때, 우리는 하나의 관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북녘을 보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 사진은 북녘 하늘을 찍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성적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을 찍은 것이다. 그러면 그가 들판을 넘어 그 아득한 하늘을 향해 가는 것은 언제일까? 그날이 어서 오기를 고대한다."

사진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성은 핵무기를 가득 실은 B-52 폭격기에 대한 뉴스기사를 심드렁하게 보고 듣고 있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대화와 평화가 아니라 대결과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남-북-미의 긴장, 그리고 동북아시아. 오랜 갈등과 반목과 정치적 악용이 만들어 낸 민족의 불행. 비무장 지대의 녹슨 철마와 지뢰, 들꽃과 철새들은 이런 위기를 알고 있을까요... 겉으로는 평화롭기만 한 비무장 지대, 그 평화가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는 언제쯤 다가올런지...

[ 2013년 3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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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 생존과 저항에 관한 긴급 보고서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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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존 버거(John Berger) 저, 김우룡 역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Hold Everything Dear : 생존과 저항에 관한 긴급 보고서 >를 읽고 / 2008. 04., 159쪽, 열화당


저자 존 버거는 지구를 지배하는 독재와 전체주의는 물론 그에 저항하는 집단 속에서 자칫 무시될 수 있는 개개인의 슬픔, 희생, 욕망, 기억을 이야기하며, 그 제목처럼, 세상 구석진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심지어 나귀 한 마리, 풀 한 포기까지에도 세심하게 눈길을 돌린다. 육성급 호텔 안에 갇혀 세계평화를 이야기하는 엘리트들과는 달리, 작가는 스스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 인간적인 삶에 관한 깊은 사유를 보여준다. 

9·11 테러,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독재 행위들을 통해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는 부정의(不正義), 거짓 희망, 새로운 형태의 독재를 고발하고, 나아가 이러한 전제주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꿈꾸고 있다. 


미국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해보지 않았던 사람들,  미국과 한국의 언론 권력이 제공하는 정보만을 접한 사람들, 한국에서 한미동맹과 자유민주주의와 진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진정으로 진보와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은 존 버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념과 정치세력화와 정치에만 매몰된 사람들도 그의 말에 귀기울여야 한다.


9 ·11 테러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세계는 더욱 극심한 물질적 탐욕과 정신적 구속의 양극단을 달리고 있다. 미래를 약속하던 정치적인 슬로건들은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있으며, 한편에서는 경제적인 독재가, 다른 한편에서는 군사적인 독재가 오늘의 세계를 휩쓸고 있다. 이는, 오직 이윤만을 추구하고 탐욕만을 부추기는 '지구적 전제주의'에 다름 아니다. 세계는 이러한 전제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적 경제적 시스템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9.11 이후 서구에서 오늘날의 가장 시급한 질문은 "테러리스트는 과연 왜 생겨나며 그 극단적 형태인 자살 순교자는 도대체 왜 만들어지는 것일까."라 할 수 있다. 저자는 테러리스트는 '절망 때문에'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테러는 어떤 초월의 길이자,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 절망을 온전히 이해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순교자는 그런 초월을 통해 커다란 승리감을 맛본다. 그러므로, 자살이라는 단어는 어느 면에서는 적절치 않다. 

"무엇에 대한 승리일까. ... 절망의 어떤 켜에서 비롯된 수동성과 비통함, 그리고 어리석음에 대한 승리를 말한다. 제일세계의 사람들이 그런 절망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 여기서 내가 언급하는 절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외곬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고통의 조건들과 닿아 있다. 이를테면 수십 년간 난민캠프에 수용되어 있는 것과 같은 상태를 말한다. 이런 절망은 무엇으로 이루어질까. 자신의 삶과, 또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삶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느낌. 여러 다양한 켜들에서 이런 것이 느껴지다가, 이윽고 그 느낌은 삶 전체가 되어 버린다. 이렇게 되면 전체주의에서처럼 의문을 용납지 않는다."


저자는 강자와 약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가해자와 피해자의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조작된 희망과 화려함에 눈먼 현 세대의 맹목을 비판한다. 소비주의 이데올로기는 고통을 흔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일례로 그는 9 ·11 테러와 2차대전 당시 일본 원폭 투하 사건을 비교하면서 강자(가해자)의 승리 속에 감춰진 약자(피해자)의 고통을 이야기하는데, 강자의 이데올로기와 거짓 희망으로 사람들이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의로운 척 가장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치지도자들, 특히 오늘의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극소수의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일례로, 2005년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태풍 카트리나가 미국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것은 부시를 비롯한 지도자들의 무관심, 오직 물질적인 이익에만 가치를 두는 권력자들의 방치 때문이었다. 이는 '이익의 추구'가 인류의 교조(敎條)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광신주의이며, 권력자들이 미화하는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은 실상 두 광신 집단 간의 전쟁과 다르지 않다고 작가는 말한다.


폭력으로 가득 찬 세계와 현대사회의 냉혹함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과 영화감독 파솔리니에게 찬사를 보내거나, 약자의 삶, 투쟁과 저항을 노래한 여러 시인들을 추억하며 그들의 시를 인용하기도 한다. 이는 바로 작가가 꿈꾸는 '연대'의 한 형태로, 새로운 형태의 독재에 저항하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희망이 아닌 절망이 저항의 힘이 되기도 한다. 감옥에 다녀오는 것을 통과의례처럼 여기고, 자식들의 안위를 불안해 하면서도 그들의 결단에 동의를 표하고, 하루에 고작 이 달러도 안 되는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 가는 그들, 그런 그들로 하여금 죽지 않고 살아가도록 만드는 힘은 바로 '지독한 절망'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리고 모든 불의와 독재 권력들은 이러한 저항을 가장 두려워한다.


강자가 약자를, 다수가 소수를 핍박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두려움이다. 돌멩이, 모래주머니, 구식권총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토마호크 미사일, F16 전투기 등 최신식 무기로 상대하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이러한 극심한 차이를 작가는 장벽에 비유한다. 이 '장벽'(특히 팔레스타인의 장벽)은 모든 것을 양극단으로만 구분하는 흑백논리와 자신과 다른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획일화한 전체주의의 상징물이다.


이는 [두 여성 사진가 자세히 보기]라는 글에서 소개되는 아흘람 시블리의 '추적자' 연작을 통해서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추적자'란, 적군인 이스라엘군에 자원 입대하여 동족을 추적하고 죽이는 팔레스타인 병사들을 이른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들은 명백히 배신자지만 그저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이유를 시블리의 사진을 통해 말하고 있다.


책 속에서 저자는 '절망의 일곱켜'라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절망'을 노래한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문장 하나, 구절 하나에서 가슴 깊이 파고드는 아픔과 절망이 느껴진다. 그런데 한국사회 주류에서 배제된 소수 집단과 단체, 해고자, 비정규직, 실업자, 극빈층, 저소득 장애인, 다문화가정에서도 똑 같은 '절망'을 느끼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찌할까...


< 절망의 일곱 켜 >


"또 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부스러기를 찾아 헤매야 하는

매일의 아침.


눈을 뜨면

이 합법의 황야 어디에서도

생존의 권리를 찾을 수 없다는 깨달음.


해가 가고 달이 가도

나아지는 것 없이

더욱 나빠지기만 하는 삶의 경험.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아무리 진력해도

또 다른 궁지에 닿기만 하는, 굴욕.


지켜지지 않은 채 끊임없이

피해 가기만 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약속에의 경청.


조각조각 산산이 깨지면서 보여주던

저항자들의 본보기.


드러나려 애쓰는 순수를

영원히 눌러 두기에 충분한

우리 스스로의

그 숱한 몸들, 무게들."


저자 존 버거는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밝힌다. 그는 평소 세상에 팽배한 불평등과 억압받는 자들의 삶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2006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폭격으로 죄 없는 민간인들이 죽어 가자, 그 무도한 폭력과 서구세계의 외면을 강력히 비난하는 글을 기고하고 레바논을 위한 '게르니카'를 그리기도 했다. 피카소의 명작 [게르니카]를 모사한 이 그림이 책 앞머리에 실려 있다.

팔순을 넘긴 작가의 눈은 때로는 날카롭게, 또 때로는 따뜻하게 지금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이 열여섯 편의 글은 세상의 독재와 부정의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뜻을 지켜내기 위한 하나의 저항이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리려는 것이다.


<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


"오후의 벽돌이 여행의 장밋빛 열기를 품을 때


장미는 숨 쉴 푸른 공간을 싹 틔우고

바람처럼 꽃 피울 때


듬성한 자작나무들이 트럭 안의 급한 마음들에게

바람의 은빛 애기를 속삭일 때


울타리 나뭇잎들이 한순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던

빛을 간직할 때


그녀의 손목 맥박이 공중을 맴도는 굴뚝새의 가슴처럼 고동칠 때


대지의 합창단이 하늘에서 자신들의 눈을 발견하고

밀밀한 어둠 속에 서로의 눈을 뜨게 할 때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개리스 애번스)


[ 2013년 3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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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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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존 버거(John Berger) 저, 최 민 역 < 다른 방식으로 보기 Ways of Seeing >를 읽고 / 2012. 08., 192쪽, 열화당


'상식' 또는 '평론가식 태도'에서 벗어나 미술품, 사진 그리고 광고의 이미지를 보고 해석하는 기존 관점에 대해 생각해 보기...  

전통적인 미술사나 미술평론에서는 보통 미술작품을 볼 때 작품을 감상하는 이상적인 방식이나 태도가 있다고 가정한다. 마치 어떤 정답과도 같은 감상법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존 버거는 이러한 감상법이 어딘가 잘못된 또는 편협한 방식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복제 기술로 인해 이미지가 어떤 식으로 변용되었는지, 누드화에서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시선의 정체가 무엇인지, 실제처럼 보이는 유럽의 유화에 담긴 소유관계와 무의식적으로 노출되어 온 광고 이미지의 본질 등을 톺아보며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들을 던지고 있다.

"미술이란 그것이 지닌 유일무이한 변함없는 권위를 통해 다른 형태의 권위를 정당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미술은 불평등을 고상한 것으로 보이게 하고, 위계질서를 짜릿한 긴장감을 주는 것으로 만든다. 소위 국가의 문화유산이라는 개념은 현대의 사회 시스템과 그것이 우선적으로 중요시하는 것을 찬양하기 위해서 미술의 권위를 이용하는 것이다."(p.36)

"남자들은 행동하고 여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 대부분의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결정된다. 여자 자신 속의 감시자는 남성이다. 그리고 감시당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리하여 여자는 그녀 자신을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 특히 시선의 대상으로."(p.56)

"유럽의 누드 예술 형식에서 화가와 관객(소유자)은 보통 남자이며 대상으로 취급받는 인물은 보통 여자다. 이런 불평등한 관계는 우리 문화(서구 문화)에 아주 깊이 각인되어 있어 지금까지도 많은 여자들의 의식을 형성한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여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남자들이 여자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신들의 여성성을 살펴본다.(손거울, 화장대, 화장실의 거울, 쇼윈도우 앞의 여성처럼...)"(p.75)

이 책은 세미나 교재였다. 세미나에 참여하다 보면 이렇게 새로운 도전 과제를 접하기도 한다. 그것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세미나의 장점이다. 40년전 존 버거와 스벤 블롬버그, 크리스 폭스, 마이클 딥 그리고 리처드 홀리스가 참여한 영국 BBC TV 시리즈를 엮은 것이다.

저자를 통해 광고에 대해 그동안 내가 지니고 있던 의혹과 용도와 배경과 광고주의 목적을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함께 탄생하고 성장한 광고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저자는 '상품 선택의 자유'라는 광고의 이면에 숨어 있는 본질을 폭로한다. 

"광고의 내용을 보면 이 화장품과 저 화장품, 저 자동차와 이 자동차 중에서 고를 수는 있으나 한 시스템으로서의 광고 자체는 다른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은 채 오직 한 가지 제안 밖에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무엇인가를 더 사들임으로써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생활이 변하게 될 것이라고 제안한다. 또한 광고는 우리가 비록 돈을 써 버려서 가난하게 되더라도 우리가 조금 더 사들인 바로 그것들이 다른 면에서 우리를 부유하게 해줄 것이라고 애기한다."

저자는 광고가 사람들의 어떤 욕망을 자극하고 어떤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과 이미지를 조작, 조절하는지 말해준다. 

"광고는 겉보기에 전과 딴판으로 변화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고, 그러한 변화의 결과로 그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우리를 설득한다. 남을 사로잡는 매력이란 곧 선망의 대상이 되는 데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광고는 이러한 매력을 제조해나가는 과정이다. 광고는 쾌락을 찾으려는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일깨워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광고는 쾌락의 실체적인 대상을 제공할 수 없다. 어떤 쾌락을 얻는 본래의 방식을 떠나서 정말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광고가 약속하는 쾌락이 아니란 행복이다. 즉 다른 사람들에 의해 외부적으로 판단되는 행복이다. 선망받는 행복이 곧 매력인 것이다. 광고는 한 여인으로 하여금 그녀가 그 상품을 구입하면 자신이 선망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상상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광고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의 그녀 자신에 대한 애정을 슬쩍 훔쳐내어선 광고 상품의 구입 대가로 그 애정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다."

미술품, 명작과 광고의 관계는 소비자들의 소유욕과 비위를 자극하는 것이다.

"광고에 미술작품을 '인용'하는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이다. 즉 미술은 풍요의 상징이며 훌륭한 생활의 테두리에 속하는 것이다. 미술은 세상 사람들의 부와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마련한 장식의 일부다. 따라서 광고에 인용된 미술작품은 거의 상반된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애기할 수 있다. 즉 그것은 물질적인 부와 정신적인 것을 한꺼번에 의미한다."

"사실상 광고는 대부분의 미술사가들보다 더 철저하게 유화의 전통을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광고는 미술작품과 그 관객(소유자) 간의 관계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아차렸고, 그 점을 이용하여 광고를 보는 관객(구매자)을 잘 설득하고 비위를 맞추어 물건을 사게 만드는 것이다.
"광고는 소비사회의 문화다. 광고는 이미지를 통해 바로 이 소비사회가 스스로에 대해 갖는 신념을 선전한다. 이 이미지들이 유화라는 언어를 사영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유화란 무엇보다도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미술형식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소비사회와 광고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광고의 목적은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자신의 현재 생활방식이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을 갖도록 만드는 데 있다. 사회의 일반적 생활방식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사회 안에서의 자신의 개인적 생활방식에 대해 불만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광고에서는, 만일 그가 광고하는 물품을 구입한다면 그의 생활이 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애기한다. 광고는 그의 현재 상태가 아닌, 그보다 더 나은 상태를 제시한다."

"광고는 '만일 당신이 아무 것도 갖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무 것도 될 수 없다'라는 두려움을 유발시키고 이를 이용한다. 광고의 선전에 따르면, 돈을 쓰는 능력을 잃으면 문자 그대로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능력이 있어야 사랑받알 수 있게 된다.
광고는 원칙적으로, 그 광고가 팔려고 하는 특별한 상품의 기능을 통해 딴 사람으로 변신하려는 기대를 갖고 있는 노동자 계층에게 호소한다.(신데델라) 중류층에게 광고는, 그러한 상품들을 구입하면 전체적으로 조화가 잘 된 분위기를 통한 상호관계의 개선을 약속한다.(요술 궁전)"

"광고의 진실성이란 광고가 내건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는가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광고가 주는 환상이 그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품는 환상에 얼마나 적절하게 들어맞느냐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광고는 본질적으로 현실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백일몽에 적용된다."

광고가 현대사회에서 노동자, 소비자들의 자각과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부정적이다.

"(산업사회에서)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는 만인의 권리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실제의 사회적 환경은 개인으로 하여금 무력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그는 그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상태와 현재 그 자신의 상태와의 모순 속에 살고 있다. 그리하여 그 모순과 원인을 충분히 깨닫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에 참가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의 무력감과 함께 뒤섞여서 백일몽으로 용해되어 버린 선망에 사로잡힌 차 살아가야 한다.
의미없는 노동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끝없는 현재는 꿈속의 미래에 의해서 '상쇄돼 버린다.' 이 미래의 꿈 속에서 노동하는 순간의 피동성은 상상적인 항동에 의해 대체된다. 백일몽 속에서 피동적인 남녀 노동자는 능동적인 소비자로 바뀐다. 노동하는 자아는 소비하는 자아를 선망하는 것이다."

"광고는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만들어냈다. 무엇을 먹을까, 무슨 옷을 입을까, 무슨 차를 탈까 하는 선택은 의미있는 정치적 선택을 대치하고 있다. 광고는 사회 내부의 비민주적인 모든 것들을 은폐하거나 보상해 주는 일을 돕는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의 또 다른 지역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은폐해 준다."

광고에 대한 저자의 결론 역시 아주 부정적이고 시니컬하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태동한 이래 몇 십년 동안 광고를 정점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보여준 모습은 저자의 결론을 전적으로 긍정하도록 한다.

"광고는 획득할 수 있는 능력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인간의 기능이나 필요성은 이 능력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자본주의 문화 안에서 그와는 다른 종류의 희망이나 만족감 또는 쾌락은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광고는 이 문화의 생명이고 - 광고 없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 동시에 광고는 이 문화의 꿈이다.
"자본주의는 다수의 관심을 가능한 한 좁은 범위 안에 가두어 놓음으로써 그 생명을 이어 나간다. 이것은 한때, 일단은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수탈로 달성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발전된 국가들'에서 무엇이 바람직한 것이고 무엇이 바람직하지 않은가에 잘못된 기준을 부여함으로써 이를 달성하고 있다."

 

한국은 적어도 광고의 목적과 효과라는 측면에서 이 '발전된 국가'의 범주 안에 속할 것이다.


[ 2013년 3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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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비밀 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 35장면 - KISON REPORT 2
이흥환 엮고 지음 / 삼인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서평] 이흥환 편저 < 광주에서 한국전쟁까지, 미국 비밀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 35 장면 >를 읽고 / 2002. 12., 289쪽, 삼인

1. "한국군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점은 인력이나 장비가 아니라 지휘력 부재와 훈련 미흡이 있음.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 한국군 내에는 지휘력 부재가 만연되어 있음. 지휘력 부재와 훈련 미흡의 상태가 개선되지 않는 한, 추가 조직을 허가하고 추가 장비를 조직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낭비가 될 뿐임. 한국전 개전 후 지금까지 한국군이 유실한 장비는 10개 사단이 필요한 장비의 양을 초과했음. 더구나 장비를 유실해 가며 그만큼 적에게 타격을 입힌 것도 아니며, 어떤 경우에는 전투와 아무 상관없이 유실된 경우도 있었음"(1951. 5)

2. 대화록 (1971. 12)
- 하비브 : "이전에 (당신이) 내게 말하길, 가까운 장래에 북한이 침략해 올 것이라는 조짐은 없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가?"
- 이후락 : "변한 것은 없다. 침략 조짐은 없다."

3. "박정희 시해 사건이나 12.12 사태가 한국에서의 우리의 기본적인 이해관계를 변화시키지는 않았음. 안정이 유지되고 대다수 한국 국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치발전이 진행된다면 안보, 정치, 경제 모든 면에서 최상의 상태가 유지될 것임. 한국인들이 국제사회에서 미국 없이는 안보 정치 경제적 발전을 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국내의 간극을 잇는데 (최소한 당분간만이라도) 그렇게 결정적이진 않지만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은 종전보다 커졌음."(1979.12)

4. "박 대통령이 또 북한 위협론을 과장하고 있음. 우리 측 정보 판단으로는 현재 그런 조짐은 없으며, 이 문제에 관한 한 한국에 아무런 대꾸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됨. 그럼에도 박 쪽에서 반복해 이 문제를 거론할 경우, 미국 언론 등을 통해 직접 북한 위협론에 대한 우리 측의 판단을 대중에게 알리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음"(p.166)

'1'은 맥아더에 이어 미국 극동군 사령관으로 한국전쟁을 총 지휘한 리지웨이 장군이 육군참조총장에게 보낸 1급 비밀전문 중 일부이고, '2'는 주한 미국 대사인 하비브가 미국 국무부에 보낸 1급 비밀문서로서 1971년 12월 2일 박정희 군사정권이 비상사태 선포를 며칠 앞둔 상태에서 자신에게 이를 알리려고 온 한국 중앙정보부 부장인 이후락씨와의 대화록 중 일부다. '3'은 1979년 전두환의 12.12 쿠데타 이후 긴박했던 3주 정도의 막후 활동을 끝낸 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가 본국 국무부에 보낸 2급 비밀문서 '상황 평가서' 중 일부. '4'는 1972년 2월 미국 닉슨의 중국 방문 전에 자신을 만나달라는 박정희의 친서에 대한 1971년 12월 미국 국무부의 평가 보고서 비밀전문 중에 들어 있다.
이 비밀기록들은, 대한민국의 체제가 어떻게 이루어지던 미국의 입장이고 태도는 오로지 '미국의 국익'이 우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인의 생명도, 한국민중의 삶과 행복도, 자유니 민주주의니 하는 하찮은 것들도 모두 후순위일 뿐이다. 결국 '한미동맹'이나 '상호수호조약'은 '미국의 국익'이라는 범위 내에서 가능할 뿐임을 보여준다.

최진섭 작가의 <법정 콘서트 무죄>를 읽다가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작년에 구해놓았다가 읽지 못한 미국 외교비사를 다룬 이 책을 책꽂이에서 찾았다. 이 책은 저자가 미국 워싱턴에서 운영되는 KISON(Korea Information Service on Net) 프로젝트의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가 KISON의 한국보안문서(KSA, Korea Security Archive)에 보관되어 있는 미 행정부의 비밀 해제 문서를 가려 모은 일차 자료집입니다. 미국은 정보공개법에 의해 그동안 기록하여 두었던 비밀문서를 단계적으로 해체한다.

며칠 전 이명박 정부에서 국가기록법에 의해 보관해두어야 할 정보 중 비밀기록을 모두 폐기했다는 언론기사를 접한 것은 이 책을 읽은 다음이었다. 역사적 사실을, 그것도 행정부의 최고 권력을 행사하면서 중대사를 담당했던 청와대와 행정부의 중요 비밀기록을 폐기해 버리면 당장은 차기 대통령이 행정부를 운영하는 데에서도 난관이 발생할 것이고, 장차 집권 5년을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평가할 역사 자료도 없어지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왕도 자신의 재임기간 전부에 대한 사관의 기록을 폐기한 경우가 없었다. 짧은 기간은 있어도. 이런 반역사적인 관점과 저질스런 태도를 가진 자가 5년간 대통령으로 군림하고, 대통령실에 근무하였으니 무엇 하나 당당하고 타당한 일이 있었을 지 안타까움과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미국은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에도 한반도와 연관이 있었지만, 특히 1945년 이후 한국의 정치, 외교, 군사, 경제, 사회, 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국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현대사를 이야기하고, 북핵 문제를 이야기하고, 한미FTA를 이야기하고, 국가보안법을 이야기하고, 개혁과 진보를 이야기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 자신이 갑자기 한심해지는 순간이었다. 책을 펴는 순간 출판사의 소개 글에 꽂혔다.

"미국은 단 한순간도 한국 현대사에서 눈을 땐 적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은 한국을 관찰하고, 토론하고, 기록하며, 보존한다. 한국사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미국의 국익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백악관, CIA, 국방부, 국무부 등 미 행정부 비밀문서함 속의 1차 기록들은 한반도에 얽힌 미 국익의 함수 계산이 어떻게 계산되고 어떤 답을 이끌어냈는지 그 전 과정을 속속들이 보여준다. 미 행정부의 비밀문서함이 열리는 순간, 1980년의 광주에서부터 신군부 탄생, 박정희 시대의 정치판, 6.25 비화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인 역사적 장면들이 생생한 현재형으로 되살아난다."(출판사 소개 글)

이 책에 속에 들어있는 비밀자료는 미국 국무부 자료가 대부분이지만, 국방부와 CIA 자료도 일부 있다. 미국 정부는 한미관계에서 극도로 민감하여 최대한 공개를 늦추어야 할 자료들, 예를 들어 한국전쟁시 미군의 작전과 CIA의 활동, 5.16 쿠데타시 주한미군과 군정보국과 CIA의 활동, 광주학살 당시 미군과 군정보국, 그리고 CIA의 활동은 공개하지 않았다. 
물론 저자가 직접 번역하고 정리한 자료 말고도 보안문서는 무진장 많다고 한다. 저자 이야기로는 저자가 사용한 자료는 전체의 백만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저자가 정리한 내용만으로도 대부분의 한국 내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용들이다. 어떤 내용은 평소에 반미 성향을 강하게 지닌 시람들도 싫어할 것들이다. 하지만 저 자료는 실제로 존재하고 저런 자료와 정보를 토대로 미국 정부는 한국을 분석, 판단한 후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한다.
유신시대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라는 허위 정보와 대국민 협박, 주한미군 철수의 진실, 광주항쟁에서 전라도 출신 장교의 투입, 미국의 판단과 행동의 기준, 유신 계엄 선포의 막전막후, 818 도끼사건에 대한 주한미군과 백악관의 대처 과정 등 전혀 몰랐던 또는 소문으로만 듣던 애기들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실사구시'해야 한다. 추측과 정황판단, 부족한 정보를 토대로 언론에 마사지되어 발표되는 정보로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을 내리기에는 한미 관계는 너무 민감하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 2013년 3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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