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쓴 중국 현대사 - 전쟁과 사회주의의 변주곡
오쿠무라 사토시 지음, 박선영 옮김 / 소나무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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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탄생한 이래 지난 수천 년 내지 수만 년 동안 한반도와 접해 있던 중국은 음으로 양으로 한반도의 한민족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2017년 현재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현재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으로서 사회주의 체제를 표방하고 있으며, 근대 조선(한민족)의 두 후예 중 하나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영토의 동북 방면을 접하고 있다. 중국과 조선은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어 있는 혈맹 관계라 할 수 있다. 또한 발해만과 황해를 사이로 대한민국과 접해 있으면서 국교 관계를 체결하고 있다.

 

현재의 중국 국가체제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시점에 반식민지 처지에서 독립한 후 국민당과의 내전을 거쳐 1949년 사회주의 혁명과 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사회주의 국가로 알려져 있다.

실제 중국의 영토(토지)는 대부분 국유 및 집체 소유이며, 국가경제의 주요 기간 산업 역시 상당 부분 국가 소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기준으로 할 때, 중국의 국가체제는 사회주의 체제라 할 수 있다.(사회주의 체제를 정의하는 학자에 따라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사회주의 체제로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일부 학자들은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국가사회주의 또는 국가자본주의로 정의하기도 한다.)

 

오쿠무라 사토시는 중국의 사회주의를 기존에 다수를 차지한 이론과는 다르게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과 이론으로 풀이하고 있다.

 

사토시는 전통 중국 사회의 해체기에서부터 국민국가의 형성기의 좌절,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성격과 정책, 중일 전쟁의 주·객관적인 조건과 전쟁 수행 과정에서의 중국 국민당의 기본 노선과 공산당의 노선, 공산당의 중국 통일과 한국 전쟁, 그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의 대응 방식 및 이후 냉전 체제 속에서 취했던 여러 정책과 그 과정에서 빚어진 실패와 실책을 지적한다.

또한 대약진 정책과 그 실패 후의 조정 정책, 마오저똥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했던 문화대혁명과 덩샤오핑의 신사고와 개혁·개방 그리고 1989년 천안문 사태를 대내외적인 정세 변화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대후방 정책을 폈던 국민당의 항일 전쟁기의 전략이 중국 사회주의의 체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주변 국가에서 치러졌던 대 자본주의 열강과의 전쟁이 사회주의의 건설을 왜곡시키고 국제적 냉전이 이러한 일시적 왜곡을 체제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사토시는 사회주의를 "공업화가 상대적으로 지체된 지역에서 파시즘적인 전체주의 국가의 침략을 역사적으로 경험하면서, 그에 대응하기 위하여 파시즘보다 더 철저하게 전체주의적인 국가 방위 형태로 취해진 극단적인 총력전 태세, 바로 그것"이라고 정의한다.

1949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사회주의화되었던 현대 중국의 경우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강하게 주장한다.

 

사토시는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들이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여 국공 내전에서 발전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을 계승하여 사회주의 체제가 확립되는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이후에도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는 국제 정세의 부침에 따라 변화해 갔으며, 국제적인 긴장 완화에 따라 붕괴되었다.

그의 시각은 소련이나 동구 사회주의, 베트남이나 북한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소련이나 베트남 역시 전쟁 시기 또는 그 직후에 사회주의 체제가 형성되었으며, 냉전이 종결된 오늘날에는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논리를 다르게 보면 중국과 북한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지배가 중국과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를 형성했다고 주장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사토시는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기에 앞서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이 수립한 ‘사상으로서의 사회주의’와 ‘실재하는 사회주의 체제’를 구분한다. 또한 “사상으로서의 사회주의는 휴머니즘에 입각하여 무언가 시도하는 것이 사회주의”(26쪽)이며 “인간이 시장 원리에 종속되어 움직이는 것이 자본주의”(25쪽)이라고 구분한다.

그러면서 ‘체제로서의 사회주의’의 현실은 1) 사회적 소유라는 명분 속에서 이루어진 당의 생산 수단 소유, 2) 계획 경제라는 명분 속에서 이루어진 극단적 통제 경제, 3) 국가에 의한 착취와 형식적인 평등 분배, 4) 공산당의 일당 독재, 5) 비자율적인 일원적 통합을 주요 특징으로 규정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수립한 ‘현실 사회주의 체제’를
정의한다.

 

사토시의 “전쟁과 사회주의의 부침”이라는 관점은 사회주의 체제의 형성과 확산, 그리고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나 저자의 사회주의에 대한 정의, 사회주의 혁명 이전의 중국의 현실에 대한 분석과 평가, 자본주의 체제의 관점,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 등 자신의 관점과 이론을 전개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여러 개념과 주장이 엉성하고 부실하며 논리적, 종합적이지 않다.

 

사토시는 자신의 정의와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중국 전통사회에 대한 분석, 국민국가로의 지향, 국민당과 공산당의 분열과 갈등, 일본의 침략과정, 미국의 대립과 사회주의 체제로의 이행 순으로 중국 근현대사의 역사적인 과정을 짚어본다. 여기서 그는 주로 일본 안에서 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논문을 이용한다.

그는 중국의 전통사회가 ‘개별주의적 사회’이며 ‘느슨한 통제와 다원적 지배’ 체제라고 분석한다. 중국 전통사회의 ‘공동체’ 전통과 ‘봉건적 유교적 통제’를 완전히 무시해버린 셈이다.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토지와 농업 중심의 경제체제인 중국 전통사회는 당연히 대가족 제도, 마을 단위 공동체가 대다수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중국의 사회 현실과 체제에 대한 사토시의 여러 가지 분석과 평가는 부실한 편이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사토시의 정의를 각각 비판해 보면 아래와 같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사회적 소유’는 개념적인 이론일 뿐 현실에서 구현된 바가 없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 이후 구체적인 현실에서 시도해보아야 한다. 먼저, ‘사회적 소유’는 국가적 소유일 수도 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는 공산당(노동당, 사회당 등 집권정당)의 소유가 될 수도 있다.(실제 토지 중 중국의 주요 생산수단은 공산당의 소유가 아니라 국가의 소유다.) ‘사회적 소유’에 대한 문제제기의 핵심은 ‘사적 소유의 집중에 의한 노동의 소외과 빈곤’이다. 생산수단이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 계급에게 집중되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대안인 셈이다. 따라서 중국공산당 또는 중국이라는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이 ‘사회적 소유’에 배치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참고로 사회주의 국가는 군대가 국가나 정부에 속하지 않고 당의 통제를 받는다. 중국도 북한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주의는 당이 국가의 주요 활동을 ‘지도’하는 체제이다. 저자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공산당 독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운 이데올로기가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그의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계획 경제’의 취지는 생산과 소비가 예측되지 않는 무한 경쟁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과잉생산과 과소생산이 반복되어 경제가 붕괴되고 노동자와 인민들이 고통을 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계획 경제’는 곧 ‘집행 경제’이다. 사회주의는 국가가 경제계획을 수립하게 되면 그에 따라 국가와 정부, 협동농장과 공장이 집행하는 시스템이다. 당연히 기본적인 지도와 통제는 수반될 수밖에 없다. ‘자유방임’을 거부하는 체제가 계획 경제의 집행을 ‘방임’할 수는 없지 않는가.

‘국가에 의한 착취’는 더욱 불가능하고 비논리적인 개념이다. 국가는 인격체가 아니다. 중국공산당이 생산과 투자와 분배에 실패할 수는 있지만, 중국이라는 국가가 노동자와 인민을 착취한 후 그 착취한 부를 소유할 수도 없고 개인적으로 착복할 수도 없다. 다만, 국가의 관료나 공산당의 관료의 부패는 가능하다. 중국 공산당과 중국 정부 역시 정부와 당 관료의 부패 때문에 오랫동안 골머리를 썩고 있다.

‘공산당 일당 독재’는 자본주의식 정치시스템과 개념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사회주의 체제는 ‘일당 독재’를 수단이자 목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동자농민의 독재를 위해 공산당을 설립하고 공산당에 의해 국가 전체가 지도되는 시스템이니 당연히 공산당이 주요 의사결정을 행환다. 중국은 중국공산당이라는 당적 체계와 전국/지방인민대표자대회라는 대의(입법)기구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공산당 간부와 인민대표자들은 선거로 선출된다. 하지만 자본주의 국가와 정당 체계처럼 정치인이 직업이 아니다. 천문학적인 홍보비를 쏟아부어 선거를 치르지
않는다. 자본가와 기득권 집단의 광고에 기반을 둔 상업언론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정치체제는 자본이 투입되고 자본 증식에 이용되는 일종의 ‘연극’이자 ‘드라마’일 뿐이다. 돈이 없는 개인이나 집단(계급)은 정치권에 진출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는 양당체제든 다당제든 자본가들과 기득권자들이 서로 정치권력을 다투는 수준의 기득권 정치체제일 뿐이다. 따라서 공산당이 "아무런 제도적 보장도 없는 상황에서 공산당이 전체(모든 인민)의 의지를 대표한다는 것은 허울 좋은  간판”이라는 사토시의 주장은 단지 비난하고 싶은 시각일 뿐이다.

‘비자율적인 일원적 통합’은 사회주의 정치와 사회문화 활동에 대한 몰이해와 비난으로 가득차 있을 뿐이다. 생존과 정치혐오로 인해 50%도 안 되는 투표율로 당선되는 자본주의 정치체제가 90%가 넘는 인민들의 정치참여를 ‘정치활동을 하지 않을 자유’라는 억지스런 문장을 꺼낸 것이다.

 

사토시의 접근이나 이론 전개에 동의하기 어려웠음에도 그의 결론 중에서 필자가 공감한 대목이 있다. 전쟁이나 제국주의적인 위협이 현존하는 사회주의 국가, 즉 중국이나 북한, 쿠바 등의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온존시킨다는 점이다.

그는 미국이 제국주의 개입,공격 정책에서 벗어나고 일본이 군국주의(제국주의) 부활을 포기하게 되면 중국과 북한, 쿠바 등의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명확하게 붕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필자의 예상은 정반대이지만, 사토시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조속히 폐기하기를 바란다. (물론 더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과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은 부당하고 불의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현실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사토시의 섣부른 규정과 낙인은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이론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책의 초반부에 사회주의에 대한 저자의 사상적, 철학적, 이론적 표현이 80년대 반공주의 교과서와 뉴라이트 세계관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어 읽어내기가 불편하기도 했다.

중국 전통사회에 대한 그릇된 평가도 그렇지만 ‘전쟁과 사회주의’라는 관점도 마찬가지이다. 사토시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과 투쟁 과정을 배제해버렸다. 일제 식민지에 대한 항일투쟁 과정과 일제의 패망 이후 중국의 정치권력에 대한 경쟁에서 공산당과 국민당을 경합했다. 공산당은 노동자와 농민(소농 및 빈농)이 주축이었고, 국민당은 자본가와 대지주가 중심이었다. 국민당 뒤에는 미국의 지원이 있었다.

결국 두 계급간의 대결, 두 계급을 대변하는 정당간의 쟁투에서 공산당이 국민당을 이긴 것이다. 만일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이겼으면 사토시가 “전쟁과 자본주의”라는 관점으로 중국 근현대사를 썼을지.

사토시는 일제와의 전쟁시기에 국민당과 공산당이 연합하였고, 일제 패망 이후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이 있었음을 간과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사토시의 관점이 간과한 점은, 중국 전통사회와 근현대사 과정 동안 극심한 고통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꿈꾸며 목숨을 던져 저항하며 투쟁했던 수많은 인민들과 지식인들, 그리고 공산당원들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토시는 중국의 인민과 중국사회가 일제의 침략이나 전쟁 그리고 미제의 간섭과 개입이라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수동적으로 ‘총력전’을 벌이고 ‘현실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했다고 주장했다.

 

사토시는 100년의 중국 근현대사를 연구하면서 자신의 관점을 지지해줄 일본 내 중국학자의 관련 논문을 인용하기만 했을 뿐, 반대의 관점과 논리 또는 공산당과 인민들의 주체적인 노력을 들여다볼 의사도 의지도 없었다.

역사는 ‘인간과 자연의 투쟁’이고 ‘현재를 고집하는 세력과 미래를 추구하는 세력의 투쟁’이라는 기본적인 관점마저 버렸다.

 

필자는 공부모임 때문에 읽었던 이 책, <새롭게 쓴 중국현대사>를 헌책방에 되팔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아파트 단지의 폐지재활용 용기에 버렸다.

 

[2017년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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