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뒤흔든 열흘
존 리드 지음, 서찬석 옮김 / 책갈피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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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은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다. 100주년을 계기로 필자가 참여하는 공부모임에서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교재로 채택했다. 그리하여 거의 30년 만에 이 책을 다시 읽었다.

 

20세기 말 지구촌을 지배한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는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자마자 자본주의 체제 스스로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다. 1997년 IMF 금융위기를 시작으로 2008년부터 시작된 미국발 경제위기, 21세기 들어 심화된 유럽발 경제위기는 세계적인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체제가 전세계 국가와 시민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경고하는 중이다.

따라서 20세기 초, 200년 가까이 서구사회를 지배해온 자본주의 체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고자 실험했던 러시아 10월 혁명을 다시금 돌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존 리드는 잡지 <The Masses>의 기자로 활동하던 미국의 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였다. 그는 1913년 뉴저지 주 패터슨에서 일어난 섬유 노동자 파업을 보도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고 그 뒤부터 혁명적 정치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특파원으로 유럽에 체류하다가 러시아혁명을 목격하여 쓴 르포르타주 문학 작품으로 이 책 <세계를 뒤흔든 10일간>을 발표하였다. 그는1917년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을 때 페트로그라드에 있었다.

미국 사회당 당원이었던 존 리드는 1919년 전당대회 때 당에서 쫓겨나, 사회당 좌파가 공산주의 노동당을 창당하는 것을 도왔다. 그는 ‘레닌의 벗’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내가 직접 본 격렬한 역사의 한 단편이다. 이 책에서 나는 10월 혁명의 과정, 즉 볼셰비키가 노동자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러시아의 국가 권력을 장악해 소비에트로 넘긴 과정을 상세히 그려내는 데 만족하려 했다.”

"볼셰비즘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는 별도로, 러시아 혁명이 역사적으로 대단한 사건이었음을 또 볼셰비키의 등장이 세계적으로 중요한 현상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역사가들이 기록을 뒤져서 파리코뮌의 사소한 부분들까지도 밝혀내려 하는 것처럼,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고, 어떤 정신이 사람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지도자들은 어떤 모습이었고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알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썼다."(저자 서문 중에서..)

 

1장 ‘10월 혁명의 배경’과 2장 ‘다가오는 폭풍’에는 1917년 10월 혁명의 배경과 원인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러시아의 제정은 무너졌다. 2월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군의 군기는 혁명 전보다 오히려 더 소진해 있었던 상태였으며 1917년 9월 1일에 이르면 독일군의 공습을 받아 리가(오늘날 라트비아의 수도)가 함락되었고, 독일군이 국경까지 다다를 위기에 처해 있었던 상태였다. 아기에게 먹일 우유와 빵조차 모자라서 사람들의 불만도 극에 달해 있었다.

2월 혁명으로 성립된 임시 정부의 실권은 사회혁명당의 두마 의원으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이었던 케렌스키가 쥐고 있었다. 전쟁에 지쳐 평화를 바라는 병사에 반해 육군 장관을 겸임하였던 케렌스키는 제1차 세계대전의 지속을 주장했다. 6월, 그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에 갈리시아 공격을 시작한다. 초반 승리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사기 하락으로 전선은 붕괴되고 7월에는 반대로 독일군 - 오스트리아군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러시아군은 후퇴를 거듭하여 급기야 8월에는 독일군의 리가 공세로 리가를 빼앗겼다.

이 공격 실패를 계기로 병사들의 전쟁에 대한 불만과 노동자들의 배고픔과 어려움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다. 7월 3일에서 7월 7일(율리우스력)에 페트로그라드에서 볼세비키가 이끄는 노동자와 병사들이 거리로 나와 임시 정부에 대한 봉기를 시작했다. 페트로그라드 앞바다 해군 기지 섬 크론에서 수병 20,000명 정도가 무장을 하고 페트로그라드로 행진하여 소비에트에 대한 권력 집중을 요구했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노동자들도 같이 봉기하여 사태는 커졌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시가전이 일어났지만 임시 정부는 군대를 지휘하여 봉기를 진압했다.

이 봉기 이후 임시 정부는 볼세비키가 반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를 포함한 볼세비키 지도자는 체포를 피해 몸을 피했고, 일시적으로 볼세비키의 세력은 후퇴했다

 

2월 혁명 이후 임시 정부와 소비에트가 병립하는 이중 권력 상태가 탄생하여 혼란이 계속되었지만, 노동자들은 다양한 정치 세력 속에서도 강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을 증명하고 러시아 사회의 변혁을 약속한 볼세비키에게 지지를 보냈다. “전쟁 대신 평화를!!!”

임시 정부군 총사령관 코르닐로프 장군은 혼란스런 러시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더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임시 정부와 소비에트에 속한 케렌스키와 대립하였다.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를 총사령관에 임명했지만, 그 직후에 코르닐로프를 스스로 군사 독재를 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9월, 코르닐로프 장군의 쿠데타에 직면한 케렌스키는 임시정부 군인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볼세비키의 적위대 등 무장 세력에 구원을 요청하며, 무기까지 그들에게 나눠주었다.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는 볼세비키의 설득을 받은 군인과 러시아군 병사들이 코르닐로프를 배신함으로써 유혈사태에까지 이르지 못한 채 실패하고 코르닐로프과 그 지지자 7,000여명이 체포됐다.

 

3장 ‘혁명 전야’에서부터 마지막 장인 12장 ‘농민대회’까지는 10월 혁명의 전과정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7녀ㄴ 10월 10일, 볼세비키 중앙위원회는 투표를 실시하여 10대 2로 “무장봉기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으며, 시기가 무르익었다"라는 선언을 채택했다.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는 10월 12일(율리우스력)에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했다. 이것은 원래 페트로그라드의 방위를 목적으로 멘세비키가 제안한 것이었지만, 무장봉기를 위한 기관을 필요로 하고 있던 볼세비키는 찬성했다. 트로츠키는 "우리는 권력 탈취를 위한 사령부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고 연설하고 노골적으로 무장봉기의 방침을 인정했다.

그는 권력 장악을 승인하기 위해 10월 25일(율리우스력) 개회 예정인 제2회 전국 소비에트 대회에 맞춰 봉기하자고 주장했다. 멘세비키는 군사혁명위원회 참여를 거부했고, 위원회의 구성 멤버는 볼세비키 48명, 에스에르 좌파(사회혁명당 좌파) 14명, 무정부주의자 4명이 되었다.

그 이후 군부의 각 부대가 차례로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에 대한지지를 표명했고, 임시정부가 아닌 소비에트의 지시에 따를 것을 결정했다.

 

10월 23일 (그레고리력 11월 5일), 볼세비키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에스토니아 인의 얀 안벨트(Jaan Anvelt)는 혁명 이후 설립된 에스토니아 자치 정부의 수도 탈린에서 좌익 혁명 세력을 이끌고 무장 봉기를 시작했다. 10월 24일, 마지막 반격을 시도했던 임시정부는 부대를 동원하여 볼세비키의 신문 <라보치 프치>, <소르다트>의 인쇄소를 점거했지만, 군사혁명위원회는 이것을 계기로 무력 행동을 시작했다.

그러자 적위대는 별 저항없이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페트로그라드의 인쇄소, 우체국, 발전소, 은행 등 요충지를 제압했고, 10월 25일(양력 11월 7일)에 '임시 정부'는 타도되었다. 국가 권력은 페트로그라드 노병 소비에트 기관이며, 페트로그라드의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와 수비군을 이끄는 군사혁명위원회로 옮겨졌다"고 선언했다.

임시정부의 각료가 남아 있는 ‘겨울 궁전’에 대한 점령은 25일 오후 9시 45분 방호 순양함 〈아브로라〉 공포사격을 신호로 블라디미르 안토노프 오후세엔코 이끄는 부대가 진입하기 시작했다. 겨울 궁전은 러시아군과 사관학교 생도, 여군이 방어를 맡고 있었지만, 거의 저항없이, 26일 새벽 오전 2시경에 점령되었다. 속수무책으로 회의를 계속했던 각료들은 체포되었고, 케렌스키는 마지막으로 ‘겨울 궁전’을 탈출하여 외국으로 망명했다.

 

존 리드의 10월 혁명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러시아 수도이자 봉기의 중심지인 ‘붉은 페트로그라드’를 무대로 “볼셰비키가 노동자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러시아의 국가권력을 장악해 소비에트로 넘긴 과정을 상세히 그려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제2의 혁명 격전지 모스크바에도 갔다. “작고 힘없는 기관차가 나무를 태워, 크고 기다란 열차를 끌고 갔다. 열차는 여러차례 정차하면서 천천히 나아갔다. 지붕 위의 병사들은 발로 박자를 맞추며 농민들의 구슬픈 가락을 따라 불렀다.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만원인 복도에서는 격렬한 정치토론이 밤새 이어졌다. …열차 안의 공기는 연기와 악취로 숨이 막혔다. 창문이 깨져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밤 사이에 질식해버렸을 것이다.” 페트로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열차여행을 기록한 장면이다.

 

당시 미국 기자였던 저자는 혁명군 장병들뿐만 아니라 정부군, 자본가 등 대상을 가리지 않고 역사의 주역들을 만날 수 있었고, 군중의 일원으로 어디든 함께 섞여 혁명 현장을 누볐다. 이를 토대로 한 생생한 묘사들 덕분에 나중에 쏟아진, 박제화한 기존 자료들이나 서구측의 기록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20세기 인류 최대의 실험 가운데 하나였던 러시아 혁명 현장의 기념비적인 기록이다. 특히 이 책은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의 검열 때문에 대폭 생략된 부분을 완전 복원함으로써 책 읽는 재미를 더해 줄 것이다.

 

이 책에는 레닌, 트로츠키 같은 볼셰비키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참호의 병사들, 공장 노동자들, 비참한 처지의 농민들까지 러시아 혁명의 수많은 주인공들이 등장한다.(10월 혁명의 핵심 지도부로 알려져 있는 인물 중,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은 트로츠키다. 레닌은 간헐적으로만 언급되고 있으며, 스탈린은 딱 한 번 등장한다. 그만큼 존 리드의 기록은 노동자, 병사, 농민 등 러시아 혁명의 주역인 인민 개개인과 계급의 말과 행동, 고뇌와 갈등을 말해주고 있다.)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러시아의 노동자와 병사들, 농민들이 국가적, 사회적, 역동적인 위기의 순간, 구체적인 과정과 매 순간에 자신들의 본능과 의지에 따라 억압 체제를 타파하고 역사를 전진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러시아 혁명, 즉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귀족과 기득권층의 위기가 곧 노동자, 농민, 빈민 등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임을 역사적 사실로 말해주고 있다.  

몸뚱아리 밖에 가진 것이 없던 ‘인민’, ‘민중’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순간에도 인간 본연의 순수함과 열정을 유감 없이 발휘했던 것이다. 전쟁과 착취와 억압 체제를 무너뜨린 것은 러시아 인민들의 의지와 단결된 행동 그리고 볼셰비키의 정치적 지도력이 함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한국사회는 부정부패와 무능 무책임으로 촉발된 거대한 ‘광장의 촛불’로 청와대 권력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었다. 사람들은 거대한 촛불의 역동성을 ‘혁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국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새정부와 노동자 등 진보진영에게 달려 있다. 한국도 100년 전 러시아처럼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20세기 현대사에서 진짜 ‘혁명’으로 평가받는 러시아 10월 혁명이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었는지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러시아에서 일어난 1917년 10월 혁명의 배경과 동력은 ‘헬조선’으로 불리는 2017년 한국사회의 처지와 비슷한 면이 많기 때문에 더욱 비교하는 게 의미가 크다. 10월 혁명의 성과와 한계는  2017년 한국사회가 가고자 하는 미래의 ‘혁명적 변화’를 가늠해보고 방향을 잡고 노력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인상 깊은 문장-

 

“나는 이 병사들처럼 사태를 이해하고 결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으로 연설을 경청했다. 병사들은 고민하며 눈썹을 찌푸렸고, 이마에는 땀이 흘렀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눈과 서사시에 등장하는 전사의 얼굴을 한 위대한 거인들처럼 보였다.

넓디넓은 러시아 각지에서 수많은 노동자, 병사, 수병 들이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고 현명하게 결정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과 마침내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로 결의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라. 바로 그것이 러시아 혁명이었다.”(9쪽)

 

“외국인들, 특히 미국인들은 당시 러시아 노동자들의 ‘무지’를 자주 강조한다.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서구인들 같은 정치적 경험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발적 조직의 측면에서 잘 훈련돼 있었다. 1917년에 러시아 소비자 협동조합 회원은 1천2백만 명이 넘었다. 또,  소비에트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그만큼 노동자들의 조직적 재능이 뛰어났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들만큼 사회주의 이론과 적용에 능숙한 사람들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11쪽)

 

“그들(노동자들)은 우리(미국)의 정치 제도가 러시아의 정치 제도보다 낫다는 데 모두 동의했지만, 한 독재자를 자본가 계급이라는 또 다른 독재자로 바꾸는 (미국식) 정치 제도를 위해 조바심내지는 않았다.

러시아 노동자들이 모스크바, 리가, 오데사에서 수백 명씩 사살되거나 처형되고, 감옥에 수천 명씩 투옥되고 사막이나 북극으로 유배된 것은, 미국 노동자들이 금광이나 크리플 크리크에서 누리는 법적 권리, 그 애매모호한 권리 정도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었다.”(11쪽)

 

“소비에트 정부에 적대감을 나타내는 많은 작가들은, 러시아 혁명의 최종 국면이 볼셰비즘의 야만적 공격에 맞선 ‘고결한’ 사람들의 투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오히려 유산 계급이 대중적 혁명 조직들이 성장하자, 조직들을 파괴하고 혁명을 중단하려 한 것이다. 유산 계급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12쪽)

 

“마을, 지방 전선, 그리고 러시아의 모든 병영에서 이와 같은 투쟁이 반복됐음을 상상해 보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수많은 크릴렌코가 각 연대의 동향을 살피고, 전국으로 급파돼 토론하고 위협하고 애원하는 모 습을 상상해 보라 모든 노동조합 지부들과 공장들과 농촌에서, 심지어 러시아를 떠난 군함 속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다고 상상해 보라 넓 디넓은 러시아 각지에서 수많은 노동자·농민·병사·수병 들이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고 현명하게 결정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과 마침내 만장일 치에 가까운 지지로 결의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라. 바로 그것01 러시아 혁명이었다. ......"(190쪽)

 

“(융커 장갑차 안의) 사망자 중에는 영국인 장교도 포함돼 있었다 ...... 나중에 신문들은 또 다른 프랑스인 장교도 융커의 장갑차 속에서 붙잡 혀 페트로-파벨로 이송됐다고 보도했다. 프랑스 대사관은 이 사실을 즉각 부인했지만, 한 시의원은 자신이 프랑스인 장교의 석방을 도왔다고 나에게 말해 줬다. …… 연합국 대사관들의 공식 태도가 어떻든 간에, 프랑스와 영국의 장교들은 구제위원회의 집행위원회 회의에 개별적으로 참석해서 조언할 만큼 이 내전에 깊이 관여했다. 융커와 적위대 사이의 소규모 충돌은 페트로그라드의 전 지역에서 쉴새 없이 벌어졌다. 장갑차들끼리 맞붙기도 했다. 단발, 일제 사격, 기관총 의 날카로운 총성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편, 상점들의 철문은 잠겨 있었지만 장사는 계속했다. 심지어 극장도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가운데 상영이 계속되었다.”(225쪽)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것은 유산 계급이나 다른 정당 지도자들과 타협해서 된 것이 아니었다. 낡은 정부기구와 화해함으로써 된 것도 아니었다. 소수 분파의 조직적 폭력을 통해 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러시아 대중이 봉기를 각오하지 않았다면 볼셰비키는 틀림없이 실패했을 것이다. 볼셰비키가 성공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기층 민중의 거대하고도 단순한 욕구를 그들이 현실화해 줬다는 점이다. 즉, 볼셰비키는 민중과 함께 구체제를 파괴해 나갔고, 민중과 협력하면서 폐허와 연기 속에서 새로운 체제의 기초를 함께 세워 나갔던 것이다."(324쪽)

 

[ 2017년 6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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