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굿바이! 아메리카노 자유주의 - 철학자 이병창의 포스트모던 자유주의 비판
이병창 지음 / 도서출판 말 / 2014년 7월
평점 :
이병창 저 <굿바이! 아메리카노 자유주의>를 읽고, 2014, 308쪽, 도서출판 말
한국현대사는 항상 마녀사냥이나 종북몰이가 있어왔다.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에 대한 집단학살이나 '빨갱이 사냥', 죽산 조봉암에 대한 사법살인,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정권의 김대중에 대한 낙인찍기, 수많은 간첩사건 조작과 국정원 댓글공격, NLL 논란 등 노무현 정권에 대한 공격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이를 통해 직접 이득을 취하려 했던 수구 보수세력이 민주 진보세력에게 가했던 공격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민주 진보세력 내부에서 상대방에 대해 종북몰이를 하거나 마녀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가장 심각한 사태는 2012년부터 2년 동안 벌어졌다. 당시 통합진보당과 국회의원 이석기에 대한 마녀사냥과 종북몰이의 특징은 수구보수와 대치하고 있는 민주 진보세력 내부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병창 교수의 물음은 바로 여기에서 출현한다. "어째서 그들이? 그들 자신이 오랫동안 보수우익으로부터 같은 공격을 받아왔지 않은가? 여전히 보수우익에 대한 연대투쟁이 간절하게 필요한 시절에 어제까지 동지였던 그들이 자학적으로 공격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특히 이 교수는 학자로서, 사상가로서 개인에 대한 의문이나 문제가 아니라 현상의 바닥에 일정하게 흐르며 개인이나 집단이 말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사상적, 문화적 특징에 주목해야 했다.
철학자와 철학과 교수로 오랫동안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었던 이병창 교수가 공개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할 게기였다. 그는 그런 마녀사냥과 종북몰이 속에서 파시즘이 등장하던 시기의 반유대주의의 냄새를 맡았고, 그 때문에 분노했다. "그런 분노가 나로 하여금 갑작스럽게 현실에 개입하도록 만들었다."
이 책은 이병창 교수가 대략 2년간 언론과 인터넷 등에 공개적으로 발언한 것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처음에 나는 이런 물음에 대해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진보당에 대한 마녀사냥과 종북몰이를 비판하는 글을 써나가는 가운데 서서히,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정한 답을 찾게 되었다. 여기 모인 글은 그렇게 찾은 답을 표현하려는 시도였다. 내가 내렸던 답은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제시하는 물음이다. 내가 출판에 동의한 이유는 나의 물음을 좀 더 분명하게 제시하고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어째서 민주 진보세력 내부에서 같은 동지에 대한 마녀사냥과 종북몰이가 이뤄졌는가? 그들이 파시스트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누구이고, 그들의 자기 파괴적 공격의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병창 교수는 민주 진보 세력 내에서 마녀사냥과 종북몰이에 가담했던 자들이 지닌 공통적인 특징에 주목했다. 그들 가운데 대표자 격인 유00은 참여민주주의라는 상표를 즐겨 달고 다녔다. 그들은 때로는 친노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 다른 일부는 민중 운동권이며 자칭 사회민주주의 세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교수는 색깔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을 찾아냈다. 그것은 그들이 '자유'와 '합의'라는 개념을 항상 입에 달고 다닌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최근 많이 논의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철학, 즉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자'의 개념에 부합한다. 그래서 그는 이들을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자로 규정했다.
"나는 이런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를 독자들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아메리카노 자유주의’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다. ‘아메리카노’는 커피의 한 종류에 불과하고 그저 취미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아메리카노는 독특한 정치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마치 ‘홍대 앞’이나 ‘강남 스타일’이 고유한 문화적 의미를 지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메리카노는 진보당 비례경선 사태 당시 유00이 언급함으로 자유주의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나는 바로 이런 아메리카노로 상징되는 자유주의가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본다."
하지만 이병창 교수가 이런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라는 개념을 언급한 이유는 단순히 이름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다시 말해 이 개념이 진보당에 대한 마녀사냥과 종북몰이에 가담했던 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이를 언급하는 이유는 이 개념이 마녀사냥과 종북몰이의 원인을 밝혀주는 설명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에게서 어떤 전도(顚倒)를 보았다. 자유를 앞장서서 옹호하는 자유주의자가 오히려 자신과 다른 타자를 배제하고 박해하는 배타주의자로 전도되었다. 나는 이런 전도가 마녀사냥과 종북몰이의 원인이라 본다. 이런 전도는 외부의 유혹이나 강제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전도는 자유주의자 내부에서 일어나는, 그들이 추구하는 자유와 합의라는 개념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전도라고 파악한다. 즉 마녀사냥과 종북몰이는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의 필연적 결과였다."
"나의 주장에 대해 독자들은 당혹스러울지 모른다. 독자들은 나의 주장에 대해 선뜻 동의하기 힘들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도 한때는 스스로를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자 또는 친노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의 자유와 합의라는 개념을 좋아했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자들이 마녀사냥과 종북몰이에 나섰을 때 정말 당혹했다. 그런 사태들을 통해 나는 서서히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의 한계를 깨닫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장점과 단점을 지닌다. 장점이 있으면 반드시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장점과 단점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장점, 바로 그 때문에 단점이 생겨난다. 마찬가지이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장점을 지닌다. 바로 그 장점 때문에 단점이 발생한다. 그것이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의 필연적 전도이다."
이병창 교수는 이들의 정치 행위에 대해 신랄한 비평을 한다.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헌법 안의 진보"가 어떻게 헌법상 '정당의 자유'를 부정하게 되는지 그리고 "자유주의자가 왜 궁극적으로 국가적 폭력에 기생하게 되는지" 철학적 논리적 필연성을 설명한다. 그리고 종북몰이가 언제 어디서 유래했으며 어떻게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아 손을 잡게 되었는지 분석한다. 또한 '반북 진보주의자'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조어가 의미하는 바와 반북 진보주의자의 피해망상이 민주 진보세력 내에 조성한 '우리 안의 파시즘'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그 과정에서 2012년부터 종북몰이와 마녀사냥에 가담한 여러 유명 인사와 지식인, 정치인들이 보여준 '철학의 빈곤'과 '조중동 적폐 언론'과의 일시적 동거에 대해 구체적으로 비판한다.
이병창 교수의 결론은 "친노를 넘어서고, 참여민주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들의 철학적 배경인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며, 진실과 가치를 지향하는 새로운 진보진영의 등장을 모색하기 위해서라도 '아메리카노 자유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참여민주주의자, 친노가 거듭나는 첫걸음은 종북몰이, 마녀사냥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한다"라고 제안한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무제한적 무책임한 비판(비난)'과 '차별과 배제'를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 자유주의 현상은 정치권에만 존재하는 아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폄하, '김치녀'나 '기레기'처럼 일부 사람이나 집단의 특성을 과도하게 일반화시키는 현상 등이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자신의 중립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체쳐놓고 진행되는 강자와 약자의 갈등 문제 또는 갑을 관계에서 나타나는 문제에 대한 "양비론" 역시 무관하지 않다.
<굿바이, 아메리카노 자유주의>에 대한 필자의 챕터별 소감과 비평은 필자의 블로그(http://blog.daum.net/hy2oxy/8693623)를 참조...
[ 인상 깊은 문장 ]
"다시 말하지만, 인민의 의지가 역동적으로 변화하므로 그것에 따라서 정당도 자발적으로 새로이 출현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정당은 다양해야 한다. 만일 이런 영역에 법이 개입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런 정당은 되고 저런 정당은 안 된다고 법이 미리 정한다고 생각해 보자. 법은 현실이므로 현실을 옹호하는 보수적 정당만 살아남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윽고 정당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새로운 정당의 자발적 생성은 불가능할 것이다.
만일 법이 나서서 정당을 제약한다면, 결국 인민의 의지 자체가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게 될 것이니 민주주의라는 형식 자체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대선 이후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중산층 이하의 몰락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사회적 좌절이 심화됐다. 대선의 패배 이후 그들에게 가능성이 열리지 않았다. 그 결과 몰락한 중산층이나 일자리를 찾지 못한 노동자, 청년 등으로 이루어진 룸펜 프롤레타리아가 증가되었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룸펜 프롤레타리아가 바로 일베의 토대가 아닐까?
객관적으로 이들이 룸펜 프롤레타리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순진성과 기계적 반복성은 나치의 돌격대와 동일한 양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베는 파시즘의 원초적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베에 대해 대증요법적으로 대응할 필요는 없다. 나치 돌격대의 폭력을 사회적으로 부각시키자 오히려 나치 돌격대가 성장했던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차피 그들은 논리나 이유, 정치적 고려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 논리나 정치적 고려를 통해 대응할 수도 없다.
그냥 무시하자. 그들이 배설하는 쓰레기나 낙서를 스스로 즐기도록 내버려 두자. 중요한 것은 오히려 배가되는 사회적 좌절이다. 룸펜 프롤레타리아가 급증하는 사회적 현실에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룸펜 프롤레타리아가 줄어든다면 일베는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9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이진경은 들뢰즈, 가타리의 프랑스 무정부주의 사상으로 전향하였다. 그렇게 해서 이진경의 ‘수유너머’가 탄생했다.
이런 전향과 더불어 그는 갑자기 마르크스주의를 깡그리 부정하고 만다. 자신의 말대로 사회가 변했으므로 운동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인가? 좋다. 그렇다면 과거 교조적이었던 자기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내가 보기에 사실 이진경의 교조주의는 변함이 없다. 교조의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과거 그는 마르크스를 교조로 삼았다. 이제 그는 들뢰즈, 가타리를 교조로 삼을 뿐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교조인가가 아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누구이든 간에 교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순수 교조주의자이다. 그에게는 마치 어머니나 신처럼 교조가 필요하다."
"자유주의자는 타자(the other)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일까? 그는 타자를 처음에는 막연하게 자신과 동일한 존재라 본다.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것은 아메리카노냐, 다방 커피냐 하는 차이일 뿐이다. 본질에서는 동일한 존재야! 내가 자유를 욕망하듯이 그 역시 자유를 욕망하지! 자유란 보편적 가치이니까.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은 처음에 너무나도 관대하게 말한다. 차이를 인정하자. 그리고 서로 대화하자. 그리고 합의하자.
실상 이들의 관대함은 상대방이 자기와 동일한 존재라는 점을 전제로 하는 관대함이다. 자유주의자는 곧 자기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낯선 타자에 부딪히게 된다. 미국의 자유주의자는 자기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슬람 종교적 독재에 부딪힌다. 한국의 자유주의자는 자기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북한의 세습에 부딪힌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의 욕망을 낯선 타자에게 강제적으로 투사한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의 눈으로 볼 때 이슬람 국가와 북한의 국민은 독재자의 억압에 의해서 자신의 근본적인 욕망에 대해 말도 하지 못하는 가련한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자는 억압된 국민을 자기가 대변하기로 결심한다. 그들은 낯선 타자인 독재자에게 보편적 인권의 이름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슬람이나 북한의 통치자들이 독재자인가 아닌가에 대해 이 자리에서 논하고자 하지 않는다. 문제는 ‘독재자냐 아니냐’하는 판단은 어디까지나 자유주의적 개념 틀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자유주의의 개념 틀이 모든 나라에서 유효한 틀인가?"
"아름다운 민주주의의 논리가 종북몰이 논리로 전도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자의 배후에 있는 생존의 두려움이 아닐까? 그들은 무리, 다수 속에 끼어들어 가야만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들은 무리 속에서 서로 몸을 비벼대면서 안전하다는 쾌감을 즐기는 것이다.
결국, 이런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다수, 무리 속에서 타자를 배제하는 논리가 되었다. 개인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반이념적인 포스트모던 자유주의가 타자를 배제하는 논리로 변질하는 이 기막힌 사건을 우리는 지난해 종북몰이에서 여실하게 보았다. 이 종북몰이에서 선봉에 섰던 사람들이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렇게 해서 이해하게 된다.
종북몰이란 실상 자기 자신의 두려움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자기의 두려움이 외부의 적, 섬뜩한 타자라는 환상을 낳는다. 종북몰이란 두려움이라는 피를 먹고 사는 뱀파이어이다."
"두려움이 없다면, 우리는 남들이 불온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속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을 보자. 이제 재판도 막바지에 이르러 사건의 실체는 어느 정도 드러났다. 종북몰이에 혈안이 된 조중동조차 포기한 사건, 기소를 유지해야 할 검찰도 신이 안 나는 사건이니 그 결과야 어련할까? 하지만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동 속에 정작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 빠져있다.
이석기 의원이 제기한 문제를 보자. 그것은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전쟁이 일어났을 때 진보주의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그 결론이야 어떻든 간에 이런 문제 제기는 귀중하다. 앞으로 진보주의를 사유하는 누구도 그 문제 제기를 피해나가지 못할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진보 세력은 남북의 통일에 대해 침묵한다. 이명박 정부 5년간 남북은 답답한 대결을 이어갔고, 그 사이에 단 한 번의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진보 세력은 이런 답답함을 뚫어 보려는 어떤 적극적인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에게야 남북 간의 긴장된 대결이 그 자신의 생존 조건이다.
그러니 사사건건 일을 비틀어 남북 간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대결을 조장하는 게 그들로서는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진보가 기초하고 있는 바로 그 민중이 아닌가?
그런데도 진보는 지난 5년 동안 이 답답한 국면을 해소하려는 의미 있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 아닌가? 진보는 마치 남북의 통일 문제가 정권의 특권인 것처럼 멍하니 바라만 보았고, 그저 정권이 교체되기만 목 빼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다 진보가 이 모양이 되었나?
결국 의지의 문제이다. 진보가 통일 문제에 대해 5년 내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진보의 의지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진보로서 발목이 묶인 점도 없지 않다. 언제부터인가 같은 진보 세력 내부에서부터 종북이라는 악의적인 비난이 악성종양처럼 자라났으니, 통일을 지향하는 진보세력은 감히 숨조차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었다. 우선 몸이라도 챙기기 위해서 일단 오해를 불러일으킬 일을 피해야 했다. 결과적으로는 남북의 대결이 악화함에도 불구하고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진중권 교수는 이제 국회의원의 사상을 검증하자고 한다. 북한에 대해서, 북핵과 삼대 세습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라는 것이다. 그것을 밝힌다면, 그에 따라서 그가 종북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여 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모르겠다. 공직자의 의무에 이웃나라의 내정에 대해서도 자기 입장을 고백하는 게 포함되는 것인지. 그러면 공직자는 의무적으로 일본의 자민당에 대한 입장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략에 관한 입장과 중국의 인권문제에 대한 입장도 고백해야 하는 것인지. 누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고백한다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진중권 교수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건 나는 모른다. 내가 맡은 임무는 그저 판단하는 것일 뿐이라고. 하기야 그다음은 진중권 교수가 맡은 일은 아니다.
그가 찬사를 받으면서 심사석을 떠나간 다음에 그 자리로 찾아오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아마도 먼저 조중동이 나타날 것이다. 조중동은 준엄하게 선언할 것이다. 여기는 대한민국이고 종북파인 당신이 있을 곳은 저기라고. 이 땅에서 떠날 때까지 우리는 나발을 불어 당신의 숙면을 방해할 것이라고.
그리고 조중동이 떠난 그다음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한 번이라도 국정원에 끌려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지 않을까? 70년대 초 박정희에 의해 자행된 사상전향 공작의 그 끔찍한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물론 더 잘 알 것이다."
"종북몰이꾼은 종북주의자를 맹목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과 체제에 동조하는 바보로 본다. 하지만 실상 그들 자신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믿고, 상대방은 허위라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닐까? 자기주장만이 절대적으로 옳으며, 다른 사람은 허위라고 맹목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파시즘적인 것이다. 그것이 소위 ‘우리 안에 있는 파시즘’이다.
현대의 모든 철학들은 ‘우리 안에 있는 파시즘’을 극복하려고 노력해 왔으며, 낯선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낯선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대화와 토론이다."
"자유로운 합의,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말임에도 불구하고 곧 그 한계를 누설하고 만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합의란 그 형식상 이미 자기 모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논리적 사유를 전개해 보자. 자유로운 합의를 통해서 형성되는 일반의지는 개인의 개별적 의지를 넘어 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반의지는 그것을 담지 할 구체적인 개인의 의지가 없다면, 단순한 추상적 관념에 불과하게 된다. 만일 일반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 개인이 일반의지를 담지하게 한다면, 이번에는 개인이 자기의 사적인 이해를 일반적 의지로 주장하는 전도가 일어난다.
쉽게 말해서 자유로운 합의가 독재로 전도 된다는 역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로운 합의라는 조건 자체가 만들어내는 필연적 결과이다. 그런데 자유로운 합의의 자기모순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의 사유를 여기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밀고 나가 보자. 일반의지를 담지하는 자가 개별자라면 일단 모든 개별 시민이 그 자격을 갖게 된다. 그와 동시에 모든 시민은 서로 다른 시민이 독재자가 될 가능성을 예감한다. 그러므로 서로서로 의심하는 가운데 다만 혐의가 있다는 의심 때문에 서로를 죽이게 되는 일반적인 공포가 출현하게 된다.
이미 루소적인 일반의지, 즉 자유로운 합의의 자기모순은 역사적으로 프랑스 혁명기에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로 실현되었다. 헤겔은《정신현상학》에서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를 평가하면서 의심 때문에 마치 배추 밑동을 자르듯 사람의 모가지가 잘렸다고 말한다.”
[ 2017년 5월 2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