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이 그렇게 잘났어요
장영철 / 사회평론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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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 교수의 <법정증언>을 통해 알게 된 탈북민들이 한국사회에 적응하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언론 인터뷰와 <법정증언>에서 인용된 문장은 "연변에서 온 동포 직업연수생들이 남한에서 얼마나 차별받고 멸시당했으면 집으로 돌아가며 '만약 전쟁이 다시 한 번 난다면 총을 들고 선참으로 한국에 와서 그놈들을 쏴 죽이겠다'는 악담을 퍼부었겠는가"였다. (기사 : “북한 붕괴,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이재봉)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9719&ref=twit)


 

이 책은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서독으로 가서 한국대 사관을 통해 망명한 저자가 귀순하기까지의 과정과 귀순후 서강대 학생으로 다시 시작했던 한국에서의 생활, 샐러리맨에서 평양냉면집을 계획하기까지 낯선 한국에서의 삶을 밝히고 있다.


 

저자 장영철은 1966년 황해남도 배천군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조선노동당 리당 비서였고, 인민학교 시절 아버지는 배천 자동차공업소 지배인이었다. 북한에서 일종의 중산층이자 주류에 속한 가정이었던 셈이다.

한국의 포항공대나 카이스트 정도로 보면 될 김책공업대학 지질학부를 다니다가 북한 당국의 지원으로 동독에 유학을 갔다. 북한 전역에서 20년 만에 파견되는 유학생으로 선발된 것이다. 북한에서는 미래 엘리트였던 셈이다.


 

장영철은 유학생활 초기부터 동독에서 문화적, 경제적 충격을 크게 받았다고 말한다. 생맥주, 남녀교제, 애정표현, 영화, 수세식 화장실, 마트의 상품진열 등 북한에서 배우고 알던 상황과 너무 달랐다는 것이다. “나는 나이만 먹었지 그런 방면에서 아직 어린아이일 수밖에 없었다. 애정표현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지내는 내 청춘이 억울했다.”(51쪽)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위상, 김일성 주석과 북한 체제에 대한 인식 등과 관련해서도 다른 국가의 유학생들과 충돌도 잦았다. “그의 날카로운 지적들은 그 후 나의 독일생활에서 비판적 시각을 갖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어느새 김일성 배지는 문제를 일으키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그것은 결코 북한을 선전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유가 없는 독재의 나라의 상징적 물건이 되었다.”(62쪽)


 

그렇게 가치관과 정체성의 혼란 속에 동독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장영철은 유학생활 3년이 지난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혼란 속에서 서독으로 도망갈 결심을 한다. 그는 도피자금 마련(2천 마르크)을 위해 유학생활 중 알게된 광산회사의 프로젝트 소프트웨어를 몰래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는 1989년 11월 베를린의 한국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한다. 그와 함께 넘어 온 사람이 바로 코미디언으로 알려진 전철우씨다.


 

아무튼 장영철은 1991년 서강대에 입학했지만 대학과 학생들 속에 어울릴 수가 없었다. 학생들의 농남을 따라갈 수도 없었고 북한과 많이 다른 문화와 언어에 익숙해지기도 어려웠다. ‘자유대한(?)’에서 데모하는 대학생들 역시 납득하기 어려웠다. 특히 ‘북한 사람’이라는 선입관이 그를 괴롭혔다. “언제나 따라다니는 ‘북한 사람’이라는 꼬리표 때문이었다. 나는 어떠한 변화도 따라가 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이방인처럼 눈만 두리번거렸다.”(120쪽)

서강대 91학번이면 아직 노태우 정권 시절이다. 노태우 정권은 직선제라는 형식을 거쳤을 뿐, 전두환 군사독재체제의 연장이었고 박정희-전두환 체제에 편승하고 기생한 이들이 장악한 사회체제였다. 그리고 1992년에 당선된 김영삼 정권 역시 겉으로는 민간정부였지만 노태우의 민정당과 김종필의 공화당이 합당한 군사독재체제의 연장이었다. 북한체제의 폐쇄성과 독재체제에서 아무 생각없이 살았던 장영철이 그런 한국 사회체제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아니러니다. 물론 장영철도 한국의 체제가 자신이 염원했던 ‘자유대한’에 가깝지 않아 스스로 혼란스러웠음을 고백한다.


 

장영철이 대학을 졸업한 것은 1995년이다. 그 이후 그는 방송사 PD, 작가의 꿈을 깨고 포스코에 입사해 자재관리부에서 샐러리맨으로 살았다. 후배들은 그의 회사자랑 소리가 듣기 싫어 그를 만나기를 꺼려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이 책이 출간되기 얼마 전 친구의 꼬임(?)에 빠져 남들이 부러워 하는 대기업 직장을 때려치웠다. 갑자기 방송인 전철우씨와 일산 자유로변에 평양식 냉면집을 차리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서른 살 총각사장이 된다.

그가 이 책을 출간했을 때에는, 일상의 탈출을 꿈꾸는 다른 샐러리맨들처럼 한 달에 몇 천만 원의 수익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꿈꾸고 있었다.


 

장영철이 이 책을 출간한 가장 큰 이유는 책의 제목 “당신들이 그렇게 잘났어요?”에 나타나 있다. 장영철이 책의 초반에 자신이 한국으로 탈출한 이유와 과정을 밝혔지만, 그가 책을 통해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남쪽 사람들의 북쪽에 대한 이해’와 ‘민족동질성 회복’에 관한 것이었다. 제2부 ‘남한 사람이 북한을 이해 못하는 이유’와 제3부 ‘김책 공대 82학번, 서강대 91학번’에 걸쳐 장영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남한 대학생들은 북한 노래를 ‘촌스럽다’고 느끼고 평가한다. 북한 사람들은 술자리를 하다가  남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남한 노래가 꽤 알려져 있다.

“귀순 직접 동기 80%가 여성과 얽힌 문제 해결”이라는 <월간 중앙>의 제목. “티눈 만한 사실을 전체로 확대 해석하여 제멋대로의 기준으로 남의 삶을 마구 헤집어 놓는 회포성, 상업적 가치만 있다면 자기 아버지라도 팔아 넘길 듯한 그 살벌함, 그저 자본주의의 병폐라고 보아 넘기에는 우리들이 받은 상처가 너무 크다.”(158쪽)

코메디나 교양 프로에서 나오는 북한사람들의 의상과 언행으로 이미지화되는 ‘북한의 촌스러움’ “북한의 주민들은 한없이 바보로 만들고, 또 그들 위에서 군림하는 고위층들은 끝없이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 한국의 매스컴이다.”(162쪽)

남한 사람들이 북한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네 삶의 처지에 맞는 상황을 이해할 뿐이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들은 배고프기 때문에 남한 사람들이 미국 식민지로 고통받고 남조선 어린이들이 굶고 있다는 당국의 선전을 곧잘 이해하지만, 남한 어린이들은 ‘배고프면 라면 먹지’라며 굶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167쪽)

“과거 귀순자들이 하던 역할은 이제 설 자리를 잃었다. 구태여 귀순자들을 등장시켜 북에 대한 남의 우월을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미미한 가치는 남아 있다. 그러나 한둘이 와서는 더 이상 흥미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족단위의 집단이 오거나 북의 고위층이라야 받아준다. 선별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338쪽)


 

대체로 위와 같은 내용들이, 장영철이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을 이해하도록 설득하는 대목들이며, ‘민족동일성 회복’을 위한 그의 노력이다.

이 책의 가치는, 탈북자들에 대한 한국사회의 편견과 폄하를 고발하는 것이다. 탈북 후 제대로된 교육과 일자리 기회를 준비하지 않은 채 정부와 탈북단체에서 탈북을 기획하고 부추기는 행태도 비판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당신들이 그렇게 잘났어요?>를 읽은 독자들이 책을 통해 받을 느낌은 오히려 ‘북한에 대한 부정적 혐오적 시각’과 ‘북한 인민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될 것이다. 장영철이 애초에 의도했던  ‘남쪽 사람들의 북쪽에 대한 이해’와 ‘민족동질성 회복’은 이 책을 통해서는 여의치 않다.

그는 책의 머리말부터 마지막 단락에 이르기까지 북한 체제와 지도부, 북한의 사회문화, 북한 인민들의 태도와 생활에 대해 부정적이고 동정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여러 가지 컴플렉스도 극복하지 못했다. 말로는 남한 언론과 사람들이 ‘북한의 촌스러움’과 ‘북한의 주민들은 한없이 바보로 만들고, 또 그들 위에서 군림하는 고위층들은 끝없이 영웅으로 만든’다고 주장하면서도 초지일관 북한 인민들의 장점과 살아가는 동력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북한도 “사람이 사는 사회”이고, 남한과 비슷한 명절을 쇠고 비슷한 놀이와 문화를 갖고 있으며, 순박하고 열정적인 사람들이 산다는 점을 강조하지 못한다. 결국 장영철도 국내외에 존재하는 극우적이고 일방적 냉전적 사고방식인 ‘흡수통일’이라는 망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대북비방 전단 살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추구했던 2000년과 2007년의 남북정상회담과 교류 시기에 장영철의 소감과 움직임이 궁금했지만,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었다.)


 

적지 않은 국내외 학자들과 정치인들도 북한 체제와 지도력 성립의 역사, 냉전과 체제봉쇄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했던 북한의 노력, 북한 지도부와 인민들의 관계, 북한 내 사상철학의 장점과 단점을 거론하면서 남북관계 회복과 동북아 평화를 위한 대화를 통한 평화회복을 주장한다.

장영철이 아무리 북한체제를 버리고 남한으로 귀순한 처지라고 해도, 남북관계 회복과 민족동일성 회복을 위한 진심이 있었더라면 자신만은 북한사회와 인민들의 입장에서 변호하면서 차이점보다 공통점을, 부정적이고 폄하할 내용보다 자랑하고 긍정할 만한 내용을 담아야 했다.


 

물론 그의 곤혹스러운 입장도 이해한다. 장영철은 1989년 11월 귀순(?) 후, 서울에서 서강대학 91학번으로 대학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그는 1년 동안 국정원(안기부?)과 관련 기관에서 탈북에 대해 조사 받고 한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이후 지금까지 국정원과 공안기관의 감시와 보고 틀 속에서 생활해야 했을 것이다.

이 책 내용 중에서 탈북에 따른 공안기관의 수사와 교육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것도 밝히지 않는다.(그래서 이 책 내용도 미리 공안기관에게 검증받았을 것이라 감안해서 읽는다.)


 

한국살이 7년은 장영철에게 냉혹한 자본주의, 한국식 신자유주의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는 정부에서 제공한 정착금 1억원을 주식투자로 날리기도 했다.

“한국살이 7년 동안 느낀 것은 냉혹한 현실의 벽이었다. 이질적 문화의 벽, 학문의 벽, 언어의 벽, 인맥의 벽이 겹겹이 나의 앞길을 막아섰다. 간신히 하나를 넘고 나니 또 다른 벽이 막아섰고 그 높이는 전의 것보다 곱으로 높았다.

이 땅에서 나의 삶을 돌이켜 보건대 ‘좋구나’ 또는 ‘자유스럽구나’를 느낀 것은 순간이요, 낮설음과 혼란 속에 헤메이며 좌절과 실패의 쓰라림을 맛본 나날들이 대부분이었다. 첩첩산중 넘어가야 할 길 또한 걸어온 것보다 더 멀 것이다.”(230쪽)


 

장영철은 탈북자 중에서 그나마 정부에서 가치를 인정한 축에 속하여 지원도 많이 받았고 개인적인 능력이 있어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19년 동안 서서히 한국사회에 정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한때 정부와 탈북자단체, 공안기관에 의해 정치적인 목적으로 ‘기획 탈북’을 하게된 수천, 수만 명의 탈북자들 중 장영철 만큼의 지원도 못받고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살아남을 능력도 부족한 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최근 대선 국면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다고 기자회견한 탈북자들과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면 제3국으로 망명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한 탈북자들이, 2017년 탈북자들의 처지를 보여준다. 여전히 정치권에게, 권력에게, 공안기관에게 이용당하고 있다.


 

-장영철 관련 기사-


 

[이사람] 두고 온 고향에 ‘마음의 짐’ 갚고파 (2007년)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00601.html


 

<탈북자들 "봉사로 하나되고 싶습니다"> - 작성자 연합뉴스 (2013년) http://app.yonhapnews.co.kr/YNA/Basic/SNS/r.aspx?c=AKR20131118071500065


[2017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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