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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리크스, 비밀의 종말 - 가디언이 심층취재한 줄리언 어산지의 모든 것
데이비드 리.루크 하딩 지음, 이종훈.이은혜 옮김, 채인택 감수 / 북폴리오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위키리크스’를
다룬
책
두
권,
즉
마르셀
로젠바흐와
홀거
슈타르크
공저
<위키리크스,
권력에
속지
않을
권리>(2011, 21세기북스)와
다니엘
돔샤이트-베르크의
<위키리크스,
마침내
드러나는
위험한
진실>(2011, 지식갤러리)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었지만,
두
권과
달리
5년이
지난
뒤에야
읽게
되었다.
김용진의
<그들은
아는,
우리만
모르는 :
위키리크스가
발가벗긴
‘대한민국의
알몸’>(2012 개마고원)을
읽은
후,
위키리크스와
관련된
책을
더
읽어보려고
찾다가
<가디언>
기자들이
출간한
<위키리크스,
비밀의
종말>을
인터넷서점에서
찾았다.
앞서
마르셀
로젠바흐와
홀거
슈타르크
공저
<위키리크스
권력에
속지
않을
권리>와
다니엘
돔샤이트-베르크의
<위키리크스,
마침내
드러나는
위험한
진실>를
읽은
후,
개인적으로
줄리안
어산지와
<위키리크스>에
대한
최종
평가를
내리지
못했다.
어산지가
<위키리크스>를
설립한
취지와
이념,
정보공개
원칙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지지했지만,
그가
<위키리크스>를
운영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잘잘못을
따지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
<슈피겔>지의
기자인
마르셀
로젠바흐와
홀거
슈타르크는
어산지에
대해
높이
평가했고,
<위키리크스>
설립시
어산지와
함께했던
다니엘
돔샤이트-베르크는
권력의
비밀정보를
공개하는
것에는
적극
찬성했지만,
어산지가
<위키리크스>를
운영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비판적이었다.
돔샤이트-베르크는
어산지와
결별한
후
독자적으로
폭로사이트(http://lsk.pe.kr/2847)를
개설했지만
지금까지
<위키리크스>
만큼의
성과를
보여주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위키리크스
설립부터
줄리안
어산지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가디언>의
기자
두
명은
세계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숱한
사건들의
뒷이야기들을
파헤치고
‘정보
메시아’
혹은
‘사이버
테러리스트’
등
모순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줄리언
어산지의
모든
것을
이
책에
담으려
했다.
호주
출신의
줄리안
어산지는
무명의
해커에서
이제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를
만든
줄리언
어산지는
무명의
해커로
출발했다.
위키리크스는
익명의
정보
제공자가
제공하거나,
자체적으로
수집한
사적
정보
또는
미공개
정보를
공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웹사이트다.
주로
정부의
비밀을
폭로하는
일을
한다.
그래서
모토가
“우리는
정부들을
연다(We
open governments)”이다.
위키리크스가
지난
몇
년간
공개한
기밀문서의
숫자가
전
세계의
언론들이
지금까지
통틀어
공개한
것보다
많다.
2006년에
위키리크스를
만든
어산지가
유명해진
것은
2010년이
되어서였다.
그가
이름을
널리
알린
계기는
그
해
연속으로
폭로한
일련의
전쟁
기밀문서
때문이다.
위키리크스는
2010년
4월
‘부수적
살인(Collateral Murder)’이라는
제목의
38분짜리
비디오
파일을
공개했다.
여기에는
2007년
이라크에서
로이터
통신
소속
현지
기자와
주민들이
미군
헬기의
‘오인
공격’으로
숨지는
장면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이
비디오는
당시
인터넷과
신문,
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됐다.
제대로
된
확인도
없이
인명을
살상하는
장면을
본
전
세계
사람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해
6월에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일지’를
폭로했다.
이것은
미국
정부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르면서
기록해온
7만
6900건의
미공개
문서들이다.
10월에는
‘이라크
전쟁
기록’을
공개했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치르면서
작성한
약
40만
건의
문서들이다.
여기에는
이라크와
이란
국경에서
숨진
모든
사람에
대한
정보가
상세히
담겼다.
수감자
학대에
대한
보고서도
폭로됐다.
결정타는
11월에
공개한
미국
국무성의
외교전문이었다.
미국의
외교관들이
현지에서
유력인사를
만나고
작성한
다양한
정보를
담은
기밀문서였다.
이
문서들은
25만
건이
넘어
한꺼번에
공개하지
못하고
순차적으로
전
세계에
뿌렸다.
전문을
공개했다는
뜻에서
이
폭로는
‘케이블(전문)
게이트’라는
별명을
얻었다.
미국이
우방의
유력인사들과
나눈
이야기를
노골적일
정도로
상세하게
담은
이들
문서
때문에
미국은
외교적으로
곤란한
처지가
됐다.
하지만
튀니지
같은
경우엔
국민들이
오랫동안
염원하던
혁명을
이뤄낼
수
있었다.
튀니지
주재
미국
재외공관에서
전송된
외교
전문에
튀니지
지배층의
부패와
월권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
‘케이블
게이트’
전문은
<위키리크스,
비밀의
종말>에
수록됐다.
<가디언>은
‘위키리크스’의
설립
초기부터
‘위키리크스’와
독점정보계약을
맺었다.
위키리크스의
설립자는
줄리언
어산지는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을
폭로의
과정에서
아주
영리하게
행동했다.
그는
힘과
영향력,
신뢰도가
높은
영국의
전통적인
신문사
<가디언>
및
독리,
미국의
잡지사들과
손을
잡았다.
어산지는
자신이
폭로하는
내용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대중의
이목을
끌기
위해
전통적인
매체에
위키리크스가
담고
있는
방대한
자료를
독점적으로
제공하여
기사화하게
한
것이다.
아울러
자신의
행동이
자유언론과
관련
있는
정의로운
행동이라는
이미지를
심는
데도
성공했으며
스타의
지위로까지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
책의
감수자는
이
책이
어산지와
위키리크스가
어떻게
하나의
세포에서
하나의
개체로
성장했는지를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가장
객관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표현했다.
그와
처음
접촉하고
전
세계에
비밀을
폭로할
계획을
함께
세웠던
영국
최고의
권위지
<가디언>의
기자들이
썼기
때문이다.
<가디언>의
기자들이
엄청나게
많은
자료를
받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방대한
디지털
자료를
이용할
수
있는
검색
엔진을
구축하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자료의
타당성을
검증할
아프간과
이라크
분쟁에
관해
상세한
지식을
가진
해외특파원들과
외교
분석가들
등
폭넓은
전문
인력을
은밀히
영입했다.
이
모든
작업은
엄청난
시간과
노력,
인력
지원과
끈기를
필요로
했다.
정보를
분류하고
파악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그렇게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다루었던
언론사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였다.
자료
전체는
대략
약
3억
단어에
달하는
분량이었다.
1971년
<뉴욕타임스>가
폭로한
미
국방성
관련
문서가
250만
단어에
불과했음에
비추면,
그
방대함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들은
어산지와
그의
팀이
세계의
내부
고발자로부터
제보
받은
방대한
문서를
살펴보고
검증하고
분석하고
가치를
따져
보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고
평가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산지가
파트너로
잡은
<가디언>
및
전통의
인쇄
매체들이
그
방대한
내용을
살펴보고
확인까지
한
뒤
그
가치를
평가하고
이를
대중에게
알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점을
간파한
어산지도
자신이
제보
받은
기밀문서를
통째로
언론에
보냈고
확인
작업,
중요도
결정,
그리고
보도
시기까지
모두
언론에
맡겼다.
그
결과
위키리크스는
엄청난
위력의
폭로를
전
세계를
상대로
효과적으로
하는
데
성공했다.
위키리크스와
<가디언>의
상생관계가
큰
시너지를
발휘한
것으로
평가한
셈이다.
<위키리크스>가
등장하여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
권력의
비밀정보들을
폭로했지만,
세계는
아직도
온갖
비밀정보와
비밀권력,
비밀행위
등이
지속되고
있다.
오바마와
미국
정부,
미국의회
역시
집권
8년
동안
<위키리크스>가
폭로했던
비밀정보에
대해
진실을
밝히거나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
전쟁범죄에
대해
어느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고,
정치적으로
책임지지도
않았다.
미국
언론과
미국인들
역시
폭로된
범죄에
대해
눈을
감았다.
<위키리크스>의
노력이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는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결국,
개인이나
일부
집단이
권력의
어두운
비밀을
폭로하는
것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에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다.
미국인
개인,
전세계인
개개인이
뭉쳐
비밀권력과
비밀정보를
무너뜨리고
국가와
정부,
정치경제와
삶의
주인으로
자각하고
나설
때만이
어떤
변화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 2017년
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