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 나를 찾아 떠나는 유창선의 인문학 동행
유창선 지음 / 새빛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평] “내가 행복하지 못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 : 나를 찾아 떠나는 유창선의 인문학동행> 유창선 저, 2016. 3., 새빛


2016년 한국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시사평론가인 저자는 한국이 이미 ‘공동체로서의 기능이 정지된 사회’라고 진단한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직장이 변변치 않다는 이유로, 너무 정직하게만 살았다는 이유로 많은 한국인들이 좌절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오랫동안 OECD 국가 중 출산률과 자살률이 1위를 달리는 상태와 무관하지 않다. 한마디로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사회라는 공동체에서 희망을 잃었기 때문이고, 그 공동체가 젊은 세대에게 미래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트위터, 페이스북, 인터넷방송과 팟캐스트에서는 특정 정파나 정치인의 편에 서 있는 증오와 저주의 언어들이 쏟아지고 있고, 그 우물 안에 모인 마니아들은 열광하곤 한다. 이 같은 광경 그 어디에도 인간에 대한 예의와 사랑은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의 고통을 끊어내기 위해 밀알이 되는 진보의 숭고함이나 품격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진보의 숭고한 가치가 자리하고 있어야 할 머릿속에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에 대한 완고한 집착만이 가득 차 있다. 넓은 세상의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들의 곁을 떠나간다. 다른 사람들과는 소통하지도, 정서를 공유하지도 못한 채 자신들의 세계에 갇혀 지내는 진보의 자폐증이다.”(128쪽)


직업이 정치평론가였던 저자는 정치에 대한 기대도 접은 듯 보인다. 정치를 포기할 수는 없지만, 정치에 목을 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는 2008년 이명박-새누리당 정권이 집권한 이후 합리적이지 않은 이유로 방송과 뉴스에서 배제되었다. 그리고 2013년 박근혜-새누리당 정권이 등장한 이후로는 저자뿐 아니라 야권 성향이거나 중립적인 정치평론가들마저 베제되어 버렸다. 정치적인 경쟁 대상의 존재마저 부정하고 국민들의 시야에서 제거하려는 전근대적인, 70~80년대 군사독재정권 방식의 ‘정치 아닌 정치’가 다시 무덤 속에서 부활한 셈이다. 

방송과 뉴스에서 밀려난 이후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인터넷 소셜스페이스 공간에서 활동하며 박근혜 정권을 견디던 저자를 더욱 지치고 좌절하게 만든 것은 한국정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욕망의 쟁투’였다. 그 쟁투 중 특히 여야간의 대결뿐 아니라 야권과 진보진영 내부에서 벌어지는 쟁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삶’과 ‘사람’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


"숨기지 않고 말을 해도 된다면, 우리의 앞날에 대한 나의 전망은 비관적이다. 생존과 욕망에 눈멀지 않아도 되는 착한 세상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힘든 삶이 크게 달라지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기대했던 정치는 우리를 구원해줄 수 없었다. 정치의 세계 자체가 욕망의 덩어리였기에,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파벌 간의 쟁투는 우리의 기대를 번번이 배신하곤 했다. 그래도 우리가 정치를 포기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목을 매고 운명을 위탁한다면 우리는 너무 비루해진다. 변할 수 없는 진실은, 우리의 삶은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메시아는 없다.”(5쪽)


저자는 세상을 사는 것이 원래부터 힘든 일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말한다. 생존과 욕망에 눈멀지 않아도 되는 착한 세상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힘든 삶이 크게 달라지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임을 저자는 숨기지 않고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어려울수록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 나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이 저자가 하고 싶은 얘기였다.

정치보다도, 어떤 이념보다도 우선해야 할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그를 위해 우리는 더 넓고 깊어져야 한다는 것, 저자가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것이다. 이 책의 키워드는 사람, 사랑,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이다.


"개인적 삶에서든 사회적 삶에서든 쉬운 삶은 없다. 세상도 하루아 침에 바뀌는 것은 없다. 이 시대의 거대한 벽이 돌멩이 몇 개 맞아 해체되거나 재구성되는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세상을 더 낫게 변화시키는 일은 원래 어려웠던 것이고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려워도 더 나은 삶과 세상에 대한 지치지 않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가능성 여부를 떠나 그 길에 인간으로서 우리의 자존감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 것인가에 상관없이 자기의 힘을 키우고 신뢰하며 살아갈 때 삶의 지구력이라는 것이 가능해 질 수 있다."


"한번에 바뀌는 역사는 없다. 희망이 아니라 나 자신을 믿어야 지치지 않고 그 길에 서 있을 수 있다. 산 정상이 너무 높아 보인다면 아득한 그곳을 보며 오르지 말고, 한발 한발 내딛는 내 발을 보며 오르라. 가끔은 내려가고 싶은 충동을 견뎌내며 땀 흘려 오르다보면 어느덧 가고자 했던 그 곳에 서 있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240쪽)


삶이 힘들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지금 이것이 내가 원했던 삶인가? 이렇게 사는 게 인간답게 살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해 저자가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 준다. 

그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시대에 어떻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지 함께 손을 잡고 고민하고 싶어 한다. 끝없이 강요받는 경쟁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을 잃어 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라 말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돌아본다는 것은 밀실 속으로의 도피를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배려를 통해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갈 때,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과 손잡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잃어버린 나를 찾을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람들이 재산과 명성을 얻는 데는 몰두하면서도 자기 내면의 영혼을 돌보는데 소홀한 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자기 영혼을 돌보지 않는 모습이 반드시 이기적이거나 탐욕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자기보다 사회를 우선하는 이타적 삶을 사는 사람들 가운데도 자기 영혼을 돌보지 않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세상을 위해 이타적 삶을 살면서도 정작 자신의 영혼은 피폐해지고 스스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들 말이다.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느라 그렇다고 설명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좋은 삶이라 하기는 어렵다. 내가 행복하지 못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는가"(16쪽)


저자는 오랫동안 정치평론가 생활을 하면서 정치적 상황에 따라 자신의 활동이 좌우되는 일을 많이 겪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이 외부에 의해 휘둘리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삶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그 생각들을 써내려갔다고 말한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는 총 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에는 우리 삶의 고민이 고전의 대가들과 함께 펼쳐져 있다. 소크라테스와 니체와 톨스토이와 고흐가 자신의 삶에서 느꼈던 고통과 번민이 오늘 우리의 고민과 손을 잡으며 잃어버린 자신을 찾도록 도와준다. 철학을 우리 삶의 울타리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는 남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느냐만 중요하게 생각했던 독자들의 삶을 반성하게 한다.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저자의 독서량이 엄청나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정치평론을 하면서 언제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책을, 그것도 자기 것으로 깊이 있게 읽어냈을까 놀라게 될 정도다. 독자들은 이 책 한 권으로 고전 100권의 힘을 그대로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부터 칸트와 니체를 거쳐 푸코와 데리다에 이르는 철학, 소포클레스와 오비디우스에서 시작하여 단테,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카프카, 카뮈에 이르는 문학, 그리고 다윈과 윌슨, 도킨스의 과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수많은 통찰들이 이 한 권의 책에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독자 대신 책을 읽어주고 요약해주는 것이 아니라 책, 철학, 인문학을 공부하는 진정한 목적이다.


"우리가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으면서 공부하는 이유는 깨우침을 얻기 위해서이다. 마음속에 울림이 생기면 사람은 생각이 변화하게 된다. 생각의 변화는 다시 내 삶의 변화로 이어질 때 의미를 갖는다. 머리만 큰 사람이 아니라 다리가 튼튼한 사람이 되어 뚜벅뚜벅 걸을 수 있어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내가 연결되어 있는 세계의 변화로 이어질 때 나의 변화는 비로소 완성된다. 생각이 사람을 바꾸고, 그 사람은 다시 세상을 바꾼다.”(248쪽)


‘나를 찾아 떠나는 인문학 동행’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저자가 인문 고전 공부를 통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찾는 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일반 독자들이 저자의 공부를 따라가기에는 무척이나 벅차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라는 한 권의 책 속에 저자 자신이 회의하고 고민하는 여러 개념들-인간, 삶, 탐욕, 불안, 행복, 진보, 자유의지, 자존감, 분노, 부활, 이념, 혁명, 고통, 부끄러움, 죽음, 자살, 용기, 희망, 연대, 도덕 등-을 설명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부터 현대 서구의 철학자들의 사상과 이론이 등장한다. 철학자 이외에 소설가와 시인의 작품의 일부가 소개되기도 한다. 그 수가 무려 백 명이 넘는 것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그렇게 많은 철학자와 인문학자가 동원되어야 할지 모르겠다. 공부할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따라주지 않는 일반 독자들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그런 세상 역시 ‘불공평’할 것이다. 철학자나 소설가의 작품 하나를 이해하기에도 보통의 시민들은 힘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


- 인상 깊은 문장 -


"절제되지 않은 분노의 해악이 역사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도 과잉 분노가 만들어내는 거칠은 인간 심성 의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분노를 다스리는 주인이 되지 못한 채 그 노예가 되는 경우를 말이다.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분노하여 세상을 바꿔 야 한다는 '진보적인'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런 모습은 흔하게 나타난다. 중요한 정치적 고비 때마다 진보라는 마을의 사람들 내부에서 나타났던 내부에서 나타났던 민낯은 이 사 회에서 진보가 어째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해왔던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권력을 향한 증오의 언어들이야 정치적 정 당방위라 설명될 수도 있겠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언어의 총질 또한 그에 못지않게 격하다. 

정치인 지지충들 사이에서는 정치인들보다 더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언어들이 난무한다.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을 비판하는 행위는 악으로 간주되고, 내가 지지하는 인물만이 무오류의 절대선이다. 이들에게는 '나의 것은 선, 나와 다른 것은 악’이다."(127~128쪽)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은 큰 불행이다. 인간으로서 갖고 태어난 그 엄청난 능력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죽어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랜 진화의 과정을 거치며 생각의 능력을 갖게 되었건만, 정작 내가 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채 묻혀두고 있다면 그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14쪽)


"자신을 돌본다는 것이 자신의 사적인 욕망을 키우고 그것에 매달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하든 간에, 언제나 자기가 서 있는 곳을 생각하며 돌아보는 노력은 소중하다. 

세상을 바꿔야한다며 정치적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도 정작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 황폐화된 삶을 살게 된다. 그런 삶에서는 세상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기운이 나오기 어렵다."(17쪽)


[ 2016년 7월 24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