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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사도 - 위대한 군주와 잔혹한 아버지 사이, 탕평의 역설을 말한다
김수지 지음 / 인문서원 / 2015년 10월
평점 :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년)는 ‘탕평제도’로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 조선 21대 임금이며, 사도는 '뒤주에 갇혀 굶어죽은 비운의 왕세자’로 남아있는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년)다. 그리고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正祖 1752~1800년)는 영조의 손자다. 이 책은 영조에서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했던 가족사이자 조선후기 왕조사에 대한 탐구서다.
<조선왕조실록> 등 조선시대에 대한 정사 그리고 근대 이후 주류사학계의 사관이 반영된 역사책이 아닌 다른 관점과 사실을 발굴하여 해석한 역사서에 대한 관심이 이 책을 연결해주었다. 몇몇 개인의 개별적인 성격이나 행위에 의해 역사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경제적인 구조와 여러 세력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역사가 구성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조-사도세자-정조로 이어지는 시기는 조선 후기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하나의 국가로서 조선이 왜란과 호란을 겪은 후 사회경제적인 구조가 변해가는 시기였고, 국가로서도 사회로서도 공동체로서도 한 단계 발전이 필요한 시점이었다.(물론 그런 시각은 후대가 과거 역사를 돌아보았을 때의 평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측면에서 영조-사도세자-정조로 이어지는 시기는 단순히 ‘윈대한 군주’니 ‘가혹한 아버지’ 또는 ‘정신병이 있는 아들’이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돌아볼 게 아니라 가족사이자 왕조사에 얽혀있던 당시의 정치세력인 붕당(남인南人과 소론少論과 노론老論)의 정치구조와 갈등을 좀더 알아보고 싶었다.
저자는 “온갖 가지 이유로 피해자 사도세자에게 참화의 책임을 돌리고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다른 관점과 역사적 사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영조와 사도>를 썼다고 말한다. 정작 사도세자의 죽음을 겪었던 당대 사람들은 “혜경궁 홍씨의 입장에 전혀 동조하지 않았”고, 그 살해 사건이 “얼마나 정치적인 목적에서 행해질 수밖에 없었는지 모두 알고 있었음을 오늘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도세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영조가 태어난 해(1724년)부터 자신의 유일한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해(1762년)까지의 정치적 상황을 역사적 사료에 근거해 그 격 동의 전말을 살펴보았다. 조선왕조실록과 기존에 발표된 여러 논문 과 단행본을 기초로 했지만 『한중록閑中錄」과 그것만을 기초로 사도세자의 정신병만을 참화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해석하는 단행본들의 주장은 근거로 삼지 않았다. 이들의 주장은 이미 널리 대중에게 알 려져 있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이고 이 책은 그러한 주장들에 반대 되는 증거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쓴 것이라는 것이 다른 한 가지 이유다.
영조(1694-1776, 재위 172-1776)는 즉위 당시 이복형인 경종(조선 20대 임금)을 살해하고 즉위했다는 논란에서 숙종(조선 19대 임금)의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논란까지 정통성이 매우 취약했다. 왕조 국가에서 취약한 정통성을 강화하지 않고는 왕권 강화는커녕 왕좌를 유지하기도 힘든 법이다. 저자는 우리가 익힐 알고 있는 영조의 ‘탕평책’은 이 사태를 무마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책으로 나왔다고 평가한다.
영조가 즉위했을 당시 조선의 상황은 왜란, 호란으로 민생이 피폐해진데가 양란 이후 천재지변이 연이어 발생하고 조정의 실정이 이어지면서 평민들뿐 아니라 적지 않은 양반들도 먹고 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조정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커짐에 따라 전국에 실향민과 난민, 도적떼가 증가하고 있었다. 여기에 숙종, 경종 때까지 살륙당하고 탄압을 받은 남인 세력과 소론 강경파 관련자들의 반란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영조 자신의 왕권뿐 아니라 조정과 사대부의 지배체제 자체가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영조는 즉위 후에 자신의 즉위에 찬성하지 않거나 반대했던 소론들을 자기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면서 그들을 척신(戚臣 왕과 성이 다른 왕의 인척)으로 만든다. 소론 대신 조문명(趙文命, 1680~1732년)을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구)의 장인으로 만든 것이 그 일환이었다. 영조는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무신란戊申亂)’을 겪왜서 소론을 포용하는 탕평책을 더욱 강화했다. 이런 소론 포용 탕평책은 영조 31 년(1755)에 소론을 멸종시킨 사건인 을해옥사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즉, 탕평책은 영조가 자신만의 정치세력을 확대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영조 11년(1735)에 태어난 사도세자는 사실상 영조의 소론 포용 탕평책의 모범적 선전용으로 훈육되었다. 효장세자가 영조 4년에 10살의 나이로 사망한 후 영조와 소론에게 사도세자 이선(李愃)은 ‘효장세자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대타’였다. 이선은 자연스럽게 친소론 정서 속에서 자라났고 이것은 영조가 자신을 반대했던 소론을 자신이 적극적으로 포용했다는 것을 대외적의로 알리기 위한 정책적 의도였다.
저자는 세자 이선이 결국 비극적으로 아버지 영조에게 살해당한 정치적 배경에는 이런 소론 포용 탕평책이 차츰 무너져간 것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영조는 소론을 포용하는 탕평책을 이용해서 소론이 자진해서 당론을 버리고 영조와 노론에게 투항하게 하는 정세를 만들어갔다. 척신과 소론을 이용해 경종 재임시 자신을 역모의 수괴로 기록했던 ‘임인옥안(壬寅獄案)’을 폐기한 것이다. 정세가 변화함에 따라 친소론의 홍보물로 이용되었던 사도세자는 영조 이후 차기 권력을 노론 일당독재로 만들고 싶어하던 정치세력들(노론)에게 자연스럽게 타도 대상이 되고 만다. 영조는 ‘나주벽서 사건’과 을해옥사(乙亥獄事)로 소론을 전멸시킨 후 왕권이 전에 비해 강화된 후로는 소론 포용 탕평책을 계속 추진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오 히려 왕권을 강화하는 데 불필요하고 귀찮은 정책으로 여겨졌다. 장성한 세자의 존재가 왕권 강화에 걸림돌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영조는 세자를 눈엣가시로 여겼고 이것을 알아챈 정치세력들은 부자지간이 더욱 멀어지게 부추겼고 온갖 모함을 해댔다. 이 정치세력이 이른바 ‘노론 벽파僻派’이다.
한마디로,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였으며, 필요가 없어지자 ‘팽’을 당했다는 것이다. 사도세자에게 씌워진 혐의를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차기 권력인 세자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면 왕좌는 자신의 것일 세자가 아버지를 죽이고 왕좌를 탈취할 모반을 꾸민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사도세자가 살해당할 때 조정의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 벽파에 의해 사도세자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다는 주장들이 『영조 실록」에 기록되었고 이후 사도세자비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의해 한 번 더 유포된다. 오늘날 사도세자의 정신병 논란은 『한중록」을 연구하는 국문학자들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사도세자의 정신병 논란은 더 증폭되어 분노 절장애를 앓았다는 정신분열을 앓았다는 둥 여러 가지로 변주되더니 이제는 사도세자가 독특한 정신적 문제를 가졌던 인간으로 각색되어 TV드라마나 영화 같은 미디어에 의해 고착되고 있다. 사도세자가 왜 죽을 수 밖에 없었는지 그 배경에는 어떤 정치적 혼란들이 깔려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들은 가차 없이 희석되고 폄하되고 있다.
“사도세자 정신병 논란은 어찌 보면 가해자들을 지독하게 온정적으로 옹호하고 피해자가 되레 혹독하게 비난당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미 300년 전에 잔혹하게 죽음을 당했고, 또 자신의 입장을 한마디도 변호할 수 없는 사도세자에게는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6쪽)
가해자가 위로받고 피해자가 비난당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는 한국현대사 속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일제의 식민지 강점을 극복하기 위해 수년, 수십년 동안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독립투사들이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와 독재자들에게 ‘빨갱이’로 몰려 학살을 당하고, 후손들은 씨가 마르거나 대대로 한국의 어두운 골목에서 빈궁한 처지로 살아가고 있다.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분단을 극복하고자 통일운동을 전개했던 이들은 ‘종북좌파’로 내몰리고 있고, 피땀을 흘려 한국의 경제성장과 풍요를 일구어낸 노동자와 농민들은 재벌과 언론에 의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먹고 살기에도 벅찬 소득에 허덕이고 있다.
[ 2016년 7월 1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