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 글항아리 이슬람 총서 3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배성민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서평]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저, 배성민 역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 Islam and Modernity>을 읽고 / 2015.03., 97쪽, 글항아리

2015년 1월 이슬람교 신도들 중 일부 근본주의 테러리스트 단체 ‘이슬람국가(IS)"에 의해 저질러진 ‘샤도부 엡도 테러 사건’이 발생한 후, 프랑스 파리의 대규모 집회에 모습을 나타낸 이스라엘 수상과 영국 총리 등 서방 국가 수반들과 경찰을 환호하는 프랑스 시민들을 목격하면서 지젝은 혼란스러웠다.
“테러집단이 가한 위협은 기적을 이루어내고 말았다. 네타냐후와 올랑드, 라브로프와 캐머런, 그리고 시민과 공권력을 하나로 만든 것이다. 1968년 급진주의자가 낳은 세대를 1968년 급진주의자가 맞섰던 원래의 적과 화해시킨 것이다. 미국의 애국법이 프랑스식으로 실현된 것 같다. 자신을 스스로 감시에 내맡긴 대중이 애국법에 환호하는 꼴이다.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이 되었나?”(13쪽)

하지만 지젝은 '지금이 바로 생각할 용기를 낼 때’라며 진지한 사고를 요구한다. "우리는 왜 이슬람을 읽어야 하는가?”
"자유주의 좌파는 왜 가짜 좌파인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은 왜 가짜 근본주의자들인가?”라는 질문들을.

이슬람 근본주의의 성향을 지닌 두 형제 테러리스트가 풍자 주간신문인 샤를리 에브도 사에 들이닥쳐 총기를 난사했다. 총격 끝에 열두 명이 숨졌다. 이 경악스러운 테러는 언뜻 샤를리 에브도에 실린 만평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샤를리 에브도는 이미 여러 번 이슬람을 풍자하는 만평을 실었고, 그 때문에 폭탄 테러나 방화로 의심되는 화재 사건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샤를리 에브도는 이슬람을 풍자하는 만평 게재를 중단하지 않았다. 
즉 이 사건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분노가 극단적인 테러로 이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정말 그럴까?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샤를리 에브도는 이슬람을 풍자하는 만평을 실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만평이 테러나 방화 사건을 불러왔을 때 잠깐 잘 팔렸을 뿐 늘 적자에 시달리던 인기 없는 신문이었다. 그렇다면 질문. 어째서 두 형제는 이런 한물간 신문에 실린 만평에 ‘분노’를 느꼈을까? 진정한 근본주의자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특징들이 그들에게는 유독 보이지 않는다. 진짜 근본주의자에게는 시기도 원한도 없다.”(18쪽)

그는 묻는다. "혹시 테러리스트가 보이는 저 열정은 오히려 그에게 진짜 확신이 없음을 증거하는 게 아닐까? 얼마나 믿음이 연약했기에 풍자 주간지에 실린 한심한 만화를 보고 위협을 느꼈겠는가!" 말하자면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휘두른 폭력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확신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스스로 열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19쪽)이라는 것이다. 

세계 자본이 민족국가의 힘을 잠식하는 방식에 반대하는 투쟁이 전개되면서 ‘이슬람국가IS’가 나타났다. 그러나 세계 자본이 가져온 경악과 두려움을 똑같이 일으키는 주체가 IS 체제이기도 하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바로 이 IS 안에서 자신의 극단적인 모습을 발견했다.
사실 ‘근본주의’라는 말은 아랍어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용어도 서구권, 특히 영어권에서 붙인 이름이다. 원리주의라고도 일컫는 근본주의가 단지 전통과 교리 준수를 중시하는 것이라면 모든 이슬람 종파가 그러할 것이다. 여기서 근본주의가 가리키는 것은 테러를 단행하는 등 훨씬 과격한 태도다. 그렇다면 이슬람 근본주의는 단지 전근대적이기만 한 걸까?

지젝은 "좌파는 총체적으로 실패했다”고 진단한다. 중동에서 좌파의 실패가 근본주의를 낳았다는 것이다. 
세계 각국에서 IS에 합류하기 위해 비행기 티켓을 끊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고, 프랑스는 9.11 테러 이후 미국처럼 우경화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휩싸여 있다. 어째서일까? 이슬람 근본주의자에게 자신이 우월하다는 진짜 ‘인종주의’다운 확신이 없었듯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맞서 자유와 평등을 지킬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실제로 내재하는 결함에 대한 반응이 바로 이슬람 근본주의”(20쪽)라는 것이다.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이미 '근대적 언어'로 말하고 있다고 말한다. 내용은 전통적일지라도 말하는 방식은 근대적이라는 것이다. 가령 IS 지도자인 아부 바르크 알 바그다디의 사진을 보면 멋진 스위스제 시계를 차고 있다. IS는 온라인으로 선전하고 금융거래를 할 만큼 잘 조직되어 있다. 즉 그들은 "근대화를 극구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도착적 근대화를 보여주는 사례”(21쪽)에 가깝다.

하지만 지젝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관점 안에 내재해 있는 모순도 강조한다. 이슬람교도가 신성모독을 대면할 때 침묵하지도, 가만히 있지도 못하듯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진영 역시 자신들의 '자유’가 모독당하면 가만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유지상주의자는 정치적이고 영적인 모든 권위를 비웃고 풍자한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타인이 겪는 고통과 모욕에 대한 과민한 반응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2011년 프랑스는 이른바 ‘부르카 금지법’을 만들었고, 이에 대해 파키스탄 출생의 한 여성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제소하기에 이르렀지만 유럽인권재판소는 그것이 적법하다고 판시했다.”
그렇다면 두 인종이나 두 종교 집단이 함께 살지만 양립할 수 없는 삶의 규칙을 갖고 있을 때, 이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서구에서는 “아동에게 선택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이유로 서구식 교육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이 ‘관용’을 베푸는 “자유로이 선택하는 주체”, 즉 아미시 공동체나 미국식 교육이냐 혹은 부르카를 쓰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주체가 등장하려면 그들은 먼저 자기 뿌리와 전통에서 잘려나가고 특수한 생활세계에서 분리되는, 지극히 험한 폭력을 당해야 한다

그럼에도 원래의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여전히 어렵다. 우리는 왜 이슬람을 읽어야 하는가? 우리는 샤를리 에브도 사건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역자는 지젝을 비판한다. 역자는 지젝이 "아마도 이 질문을 이슬람교 안에서 던지고 싶었던 것 같다"고 해석한다. 자유주의의 언어로 이슬람교를 상대하면 상황이 더 나빠지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와 이야기하려면 이슬람교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만 지젝은 이 질문을 던질 뿐,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는 이슬람교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서로를 이간질한다. 이슬람교 앞에서는 자유주의를 옹호하고 자유주의 앞에서는 이슬람교를 옹호한다.”며 지젝을 비판한다.
역자는 “이슬람교 안에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이 자리를 재규정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세속적 자유주의를 이슬람교의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유일신교 안에서 기독교와 이슬람교, 유대교, 세속적 자유주의가 공존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훨씬 더 차기 있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세속적 자유주의가 당당하게 유일신교 안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유일신교도 그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테러는 잘못된 것인가? 아니다. 누가 ‘테러’가 무엇인지 규정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비난하는가? 주로 국제 정치경제를 지배 또는 주도하는 서구진영의 개념과 논리이다. 또한 ‘근본주의’나 ‘원리주의’ 그리고 ‘풍자’와 ‘멸시’, ‘자유’와 ‘평등’,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같은 근대적 사상, 도덕 개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이슬람교나 중동지역 사람들도 그런 서구진영의 개념이나 세계관, 논리나 도덕을 받아들였을까?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들만의 고유한 사회문화를 수백, 수천 년 동안 지녀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젝이 이슬람교와 서구의 화해와 대화를 모색하려면 서구적 관점과 개념으로는 쉽지 않을 것이다. 지젝을 비롯한 서구의 좌파가 오랫동안 동양 및 이슬람과 화해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는 이유는 혹시 그런 기본적인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2015년 8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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