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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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저, 공문혜 역 <침묵 silence >을 읽고 / 2003. 01., 308쪽, 홍성사


<침묵>은 1966년 처음 출간되었으며, 17세기 일본 막부 체제가 가톨릭을 탄압했던 사례를 소재로 하여 '인간이 고통받을때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그리스도 교인의 고뇌와 의문을 담아낸 기독교 소설이자 역사소설이다.

1635년 카톨릭교 예수회는 일본에 파견된 선교사 페라이라가 배교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로드리고 신부를 다시 선교사로 보낸다. 일본에 도착한 로드리고 신부는 가톨릭 공동체에서 다양한 군상들을 발견한다. 대부분의 신도들은 박해 때문에 하느님 나라를 죽어서 가는 피안의 세계로 잘못 이해하고 있었고, 배교자라는 이유로 미움받는 기치지로는 자신의 나약함으로 고뇌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관헌에 붙잡혀 끌려간 로드리고 신부는 '하느님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라면서 기독교 신앙을 저버린 선배 가톨릭 신부 페라이라의 배교를 직접 확인한다. 자신도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고문당하는 교우들을 위해 배교를 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할 상황에 처해 고뇌하고 갈등한다. 
이때 그리스도가 그에게 말한다. "너는 내가 교우들을 외면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과 같이 고통받고 있었다", "나를 밟아라. 나는 밟히기 위해서 세상에 왔다"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그는 겉으로는 성화상 밟기로 배교하지만, 속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보전한다.

로드리고 신부는 파교한 이후 일본 막부의 배교정책에 적극 협조하여 카톨릭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서적을 발간하고, 일본인 카톨릭 교도의 배교 업무에 참여하고, 일본으로 들어오는 그리스도교 신부와 종교물품을 색출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중에 다시 자신에게 찾아온 기치지로에게 고해성사를 해준다. 그는 유럽의 교구나 교황청을 배반했을지언정 그리스도를 결코 배반하지 않았다고 다짐한다. 다만 그때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 모든 시련이 필요했으며, '나는 일본의 유일한 가톨릭 사제'라는 자부심을 갖고서 말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당시 일본의 모습과 주인공들의 상황은 역사적으로 비슷한 사건과 인물이 실존한다고 전해한다. 당시 일본에 파견된 유럽의 사제 조세페 캘러, 알로요, 카솔라 신부는 고문과 ‘구멍 매달기’ 형벌을 받아 파교하였다. 조세페 캘러는 파교한 뒤 막부 권력에 협조하면서 일본 여인을 아내로 맞아 살다가 8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작가는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가, 만약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고통받는 민중들을 외면하는 그분을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무기력한 분으로 보아야 하는가, 의지가 박약하여 종교적 신념을 지킬 수 없는 기독교인을 배교자라고 비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예수회 선교사인 로드리고를 통해 독자에게 하면서도 억지로 답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작품에 빠져들 수 있도록 하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작품은 카톨릭 교구에 보내는 편지 형식과 3인칭 시각으로 주인공의 행동을 묘사하는 형식이 섞여 있음에도 독자가 읽는 데 불편하지 않다. 서양인 신부의 시각으로 17세기 일본의 모습과 일본인의 삶에 대해 표현했지만 자연스럽기도 하다. 그리고 작가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세밀한 심리묘사가 장점이자 특징이다. 특히 고문당하는 교우들을 위해서 배교할 것인지 고민하는 가톨릭 신부 로드리고의 고뇌와 그리스도와의 대화장면은 작가로서의 실력과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이 잘 묘사된 장면이다.

<침묵>은 종교인과 신도들이 읽기에 불편할 수 있다. 카톨릭 사제였던 주인공이 결국 배교한 것도 불편하게 하지만, 종교인으로서 기존의 종교 이론과 해석을 부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인류는 아직 신이 존재하는지 증명하기도, 신이 존재하지 않는지 증명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로드리고 신부의 ‘배교’가 실제로 신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는 피교자의 발에 짓밟히면서도 이것을 용납하고 계셨다는 외경스러운 신앙의 역설을 통해 신의 존재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이 작품을 통해 종교가 아닌 인간의 ‘신념’ ‘양심'과 ‘신념/양심을 지키는 것’을 생각해 본다. 신념이나 양심을 지키려는 것 뿐만이 아니라 불의와 비상식 또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을 따르지 않으려는 마음까지 포함될 수 있다. 인간은 얼마나 강할까? 나약한 사람은 신념이나 양심을 가질 수 없을까?
누군가 세월호 희생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그림을 밟지 않으면 국가를 부정하는 매국노(빨갱이,종북)라며 고문(고발,공개)하겠다면 당신은 밟을 것인가? 그 그림이 세월호 희생자가 아니라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면? 그 그림이 이스람교의 마호메트 사진이고 당신이 기독교 신자라면 기꺼이 밟을 것인가? 북한의 인공기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밟을 수 있을까? 해산된 통합진보당의 깃발이라면 곧바로 짓밟을 수 있는가? 

-작가 소개-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년 3월 27일 ~ 1996년 9월 29일)는 일본의 작가이다. 이모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1955년 발표한 《백인》(白い人)으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상을 수상하고 《바다와 독약》(海と毒藥)으로 일본 문학가로서 자리를 굳혔다. 대표작으로는 17세기 일본 막부의 가톨릭 탄압을 소재로 한 《침묵》(沈默, 1966년)이 있는데, 침묵은 홍성사에서 한국어판으로 출판하였다. 엔도는 현대 문학에 영향을 끼쳐서 영국의 가디언지에서는 엔도 슈사쿠의 별세를 기념하는 기사를 작성하였다.

-인상 깊은 문장-

”1638년 1월 일본에서는 3만 5천 명의 카톨릭 신도들이 반란을 일으켜 시마바라를 중심으로 막부군과 악전고투한 결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학살되었다는 것이다.”(17쪽)

“저희 종교가 이 지방 농민들에게 물밀듯이 확대되어 간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사람들이 인간의 따뜻한 마음을 보았기 대문입니다. 오로지 인간으로 취급해 주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의 인자함에 동요되었던 것입니다.”(50쪽)

“아니, 기치지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조금 더 다른 무서운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박해가 시작되고 오늘까지 20년, 여기 어두운 일본의 땅에 많은 신도들의 신음이 가득 차고 사제의 붉은 피가 흐르고 교회의 탑이 붕괴되어 가는데, 하나님은 자신에게 바쳐진 너무나도 참혹한 희생을 보면서도 아직 침묵하고 계십니다. 기치지로의 어리석은 원망에 그러한 물음이 깔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86쪽)

"그가 혼란에 빠진 것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뜰 안의 정적과 매미 소리와 파리의 날개 소리였다. 한 인간이 무참히 죽었는데도 바깥 세상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전과 다름없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바보스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순교란 말인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왜 당신은 침묵하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저 애꾸눈 농민이 오로지 당신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런 정적이, 이런 고요가 계속되는가? 이 한 낮의 고요함. 매미 소리. 이런 어리석고 참혹한 일과는 전혀 관계 없다는 듯이 그분은 외면하고 있다. 그것이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186쪽)

"이것이 기도한 말인가? 기도란 당신을 찬양하기 위해 있는 거라고 오래오래 믿어 왔지만 그러나 이런 당신을 향한 기도는 마치 저주를 위한 것 같습니다. 갑자기 비웃음이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이윽고 내가 죽임을 당하는 날도 여전히 바깥 세상은 변함없이 흘러갈 것인가. 내가 죽임을 당한 뒤에도 매미는 여전히 울고 파리는 졸음을 재촉하는 날개 소리를 내면서 날아다닐 것인가. 그렇게까지 영웅이 되고 싶은가. 네가 바라고 있는 것은 남모르게 죽는 참된 순교가 아니라 허영을 위한 죽음인가. 신도들에게 칭송받고 기도받고, 그리고 저 신부는 성자였다는 말을 듣고 싶기때문인가.  희생의 제단 앞에서 피리 소리가 구슬프게 흐른다.”(186쪽)

"그때 하늘은 잔뜩 흐리고, 태양은 구름 뒤에 사라진다. "온 땅에 어둠이 임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이것이 오랫동안 생각해 온 순교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본 농민의 순교는 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오두막, 저 사람들이 입고 있는 남루한 옷처럼 초라하고 가련하기만 했다.”(187쪽)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276쪽)

"그 성화 위에 나도 발을 놓았다. 그때 이 발도 움푹 들어간 그분의 얼굴 위에 있었다. 내가 수없이 생각한 얼굴 위에. 산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나 옥사에서 언제나 생각해 내며 따뜻한 위로를 받았던 그분의 얼굴 위에. 인간이 생존해 있는 한 선과 아름다움 그 자체인 얼굴 위에. 그리고 평생을 사랑만을 베풀려고 했던 그분의 얼굴 위에. 그 얼굴은 지금 성화판의 나무판자 속에서 닳고 패어 버린, 그리고 슬픈 듯한 눈을 하고 이쪽을 보고 있다. "밟아도 좋다"라고 슬픈 듯한 눈빛으로 나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간들과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293쪽)

"성직자들은 이 모독의 행위를 격렬하게 질책하지만, 나는 그들을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콘 그분을 배반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내가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 오늘까지의 모든 시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나라에서 아직도 최후의 가톨릭 신부이다. 그리고 그분은 결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비록 그분이 침묵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오늘까지의 인생은 그분과 함께 있었다. 그분의 말씀을, 그분의 행위를 따르며 배우며 그리고 말하고 있었다.”(293쪽)

[ 2015년 8월 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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