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 현대의 상식과 진보에 대한 급진적 도전
이반 일리치 지음, 권루시안 옮김 / 느린걸음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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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공용(共用)'인가?

"예전에 어른들은 길에 평상을 내놓고 앉아 한담을 나누었고 아이들은 길에서 술래잡기와 구슬치기를 하며 놀았다. 이들은 지금 길이 공용이던 시대를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에 속한다.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의 대도시에서 큰길이 아닌 뒷길, 흔히 '이면도로'라 부르는 길에 가장자리를 따라 차선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얼핏 보행자를 위한 선 같지만 사실은 보행자를 위해 그린 것이 아니다. 사람을 노란 선 밖으로 내몰기 위한 것이다. 어두운 밤 좁은 뒷길을 달리는 자동차가 길가의 담이나 기둥, 전봇대 같은 것을 들이받지 않고 더 빨리 달릴 수 있도록 그린 선이다.
이제 길은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로지 통과를 위해 존재한다. 뒷길에 그린 노란 선은 길이라는 공용 밖으로 사람을 쫒아내는 선명한 색깔의 담장이다. 
그러나 한담을 나눌 때에는 카페에 가서 앉아야 하는 시대의 우리,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틀에 따라 삶을 살아온 때문에 길에서 술래잡기를 해본 적이 없는 우리는 저 노란 선을 보면서도 그 본질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달라져 있다."(p.370 옮긴이의 말 중에서)

이반 일리히의 사상을 읽는 관점,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관점으로 제시한 옮긴이의 후기다.

이반 일리히는 1970년대 <학교 없는 사회 Deschooling Society>, <병원이 병을 만든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등의 저술로 현대 문명에 근원적 도전을 던졌던 사상가이다. 그는 모두가 믿는 것,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것을 의심하고자 했다.
당시 학교(교육제도)와 병원(의료체계), 교통과 기술, 개발과 경제성장 등 진보와 보수, 자본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을 겨냥한 그의 발언들은 전 세계적으로 논란이 되었다. 

출판사는 일리히가 그의 말년 20여 년 동안 현대 문명에 대한 더욱 뿌리 깊은 사상적 도전을 치열하게 이어갔고, 현대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아시아로 도보 여행을 떠났으며, 동양의 여러 언어들을 익혔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사상의 여정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과거, 그 중에서도 12세기 중세 유럽이었다고 소개한다.
"현대의 여러 관념들이 형성되던 시기였던 12세기를 통해 일리히는 독자를 지배하는 현대의 관념과 확실성의 기원을 뿌리까지 밝혀 내고자 했다."

이 책은 이반 일리히가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중반에 걸쳐 경제, 교육, 의료, 언어, 종교 등 분야별 세계적 권위의 학회와 전문가를 대상으로 그들이 금기시하는 전제들에 도전을 던지고 연구 방향의 근본적 전환을 호소했던 12년 간의 연설문이 망라되어 있다.
일리히의 글이나 문장이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번역이 한글 문맥상으로 매끄럽지 않은지 모르겠지만, 읽는 내내 책장을 넘기는 것이 어려웠다.

제1부에서 일리히는 '공용'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띠는지 그려낸다. 일리히는 전통문화를 공동체에서 희소성 인식이 확대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일련의 규칙으로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현대화'나 '산업화' 또는 '자본주의'화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희소성'을 만들어 상품화하는 시스템임을 지적한다. 그는 그런 시스템을 '팍스 오이코노미카'라고 규정한다. '팍스 오이코노미카'는 "경제학의 전제, 즉 희소하지 않은 가치는 보호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전제를 통해 민중이 평화에 대한 위협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언제나 개발은 희소하다고 인식되는 상품 및 서비스에 대한 희소성 의존이 확산됨을 의미합니다. 개발 과정에서 환경을 개조하여 물자의 생산과 유통을 위한 자원으로 만드는데, 이때 필연적으로 자급 활동을 위한 조건이 제거됩니다. 개발은 따라서 필연적으로 모든 형태의 민중의 평화를 희생하고 그 자리에 팍스 오이코노미카를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용이 자원으로 탈바꿈될 때 인간이 무엇을 잃게 되는지 밝히고 있으며, '호모 오이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과 '부정가치' 그리고 '거부의 정치학'에 대해서도 논한다.

"진정한 의미의 여느 공용과 마찬가지로 길거리 자체도 사람들이 거기 살면서 그 공간을 살만한 곳으로 가꾼 결과물이었습니다. 그 길가에 늘어선 집들은 현대적 의미의 개인 주택, 즉 노동자를 밤새 보관해 두는 수납창고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적 생활공간과 공유되는 생활공간은 문지방을 중심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적 의미의 집도, 공용으로서 길거리도 경제 개발에서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거의 1백년 동안 수많은 정당이 환경 자원이 소수의 개인에게 집중되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환경 자원을 사적으로 이용한다는 차원에서 논의되었을 뿐 공용이 사라져 없어진다는 차원에서는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정치운동은 이제까지 공용을 자원으로 탈바꿈시키는 행위의 적법성을 뒷받침해왔습니다."
"공간이라는 공용이 섬세하여 교통이 동력화되면서 파괴되는 것처럼 말(言語)이라는 공용 역시 섬세하여 현대적 통신수단이 잠식해 들어오면서 쉽사리 파괴된다는 점입니다."
"공용이던 환경이 이처럼 생산을 위한 자원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환경 퇴화의 본모습입니다. 이런 퇴화에는 오랜 역사가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역사가 일치하지만, 오로지 그것으로 한정지을 수만은 없습니다. 애석하게도 정치생태학은 이런 탈바꿈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제까지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해왔습니다." (p.73)

제2부에서는 '교육자'를 대상으로 한 일리히의 강연이 담겨 있다. 일리히는 교육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구가 아니라 '교육에 대한 연구를 하자'고 호소한다. 당시의 교육 이론 속에 공통적으로 숨은 전제를 구성하는 '확실성'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호모 에두칸두스(배움을 특징으로 하는 인간)'의 사회적 발생을 연구해야 함을 역설한다.

"대다수의 사람에게 학교 교육은 유전적 차이를 억지로 비틀어 퇴화를 이끌어내는 공인된 과정입니다. 건강을 의료화하면 현실적이고 유용한 수준을 훨씬 넘어설 정도로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동시에 상식적인 건강 즉 유기적 대처 능력은 떨어지게 됩니다. 혼잡한 시간대에 움직여야 하는 대다수는 수송 때문에 교통의 노예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 자유의사로 선택하는 이동과 상호 접근성이 모두 감퇴됩니다." (p.109)
"확실히 어떤 지역에서든 지배적이고 표준적 언어가 누리는 우월한 지위는 글쓰기를 통해 더 강화됐고, 인쇄를 통해서는 더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지배 언어가 다른 언어를 식민지화하는 힘은 인쇄술에 힘입어 막강해졌습니다."


제3부에서는 정신공간의 분수령으로서 구술, 문자 및 컴퓨터와 '질료의 역사'를 다룬다. '질료'라는 말로 일리히가 의미하려는 것은 물이 H2O로 변해가는 과정을 고찰하면서 나타난다.
특히 일리히는 자신이 70년대에 출간한 <학교 없는 사회 Deschooling Society>의 핵심 주장을 부정한다. 그는 자신이 교육을 위해 '학교 제도의 폐지'를 주장했는데 이것이 실수였음을 지적한다. 그는 "학교라는 제도를 폐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은 조건 없이 주어진 여가의 선물이던 교육이 절박한 필요로 되어가는 추세를 뒤집는 일"이었다고 평가한다. 여기서 희소성을 핵심으로 하는 개념인 호모 에두칸두스가 다시 등장한다.

"이렇게 하여 저는 '배움'이 교육을 생산하는 수단 안에서 희소성을 전제로 이루어질 때 그것이 교육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이 관점에서 교육이라는 '필요'는 소위 희소의 사회화를 위한 수단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믿음과 합의의 결과물로 나타납니다."

"관을 타고 도시로 들여온 물을 하수도를 통해 다시 도시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도시 설계의 기본 원칙이 된 것은 증기기관이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 되고 나서였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이러한 생각이 당연하게 되었습니다." (p.205)

제4부에서는 의료가 더 이상 핵심 쟁점이 아님을 주장한다. 일리히는 인류가 탐구해야 하는 주제는 바로 '생명'을 궁극의 자원으로 인식하고 부지불식간에 관리하는 행위임을 지적한다. 결국 "생명윤리학의 가면을 벗기자"는 것이 요점이다.

"의료 윤리라는 말은 안전한 성, 핵 보호, 구사 정보만큼이나 모순적인 어법입니다. 1970년 이후로 생명 윤리가 역병처럼 버지면서, 본질적으로 비윤리적인 맥락에서 윤리적 선택 비스무레한 것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제 인간의 생명이라 불리는 것이 보살핌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한 인격체를 '하나의 생명'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죽음을 가져오는 시술이며, 아담과 이브 시대에 생명의 나무를 향해 손을 뻗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합니다."

더글러스 스미스는 추모글에서 이반 일리히 사상의 핵심 중 하나인 '근원적 독점'과 현대의 '근대적인 가난'을 연관시킨다. 
"어떤 물건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 그것을 사용하도록 강요하는(스마트폰처럼...) 근원적 독점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1단계는 새로운 상품이 만들어졌지만, 가격이 비싸서 소수의 부유층만 구매할 수 있는 단계다. 2단계는 가격이 떨어지면서 보통 사람들 대다수가 구매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상품은 갖고 있으면 '편리'한 물건이다. 3단계는 그 상품 없이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을 만큼 사회가 재조직되는 단계로, 이제 물건은 '편의품'에서 '필수품'이다."

일리히는 '근원적 독점'과 함께 '반생산성' 개념으로 현대 기술의 근원적 문제를 지적했다. '반생산성'은 기술이 어떤 한계점을 지나면 애초에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의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이제 그의 진단은 현실이 되었다. 병원은 치료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병을 만들어낸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스스로 배울 능력을 빼앗고, 감옥은 죄를 양산하며, 자동차는 교통을 지체시킨다. 
반생산성 단계에 이르면 제도로 인해 개인들은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고 문제를 푸는 능력을 빼앗기고, 그 대신 전문가의 지식에 의존하도록 내몰린다. 급기야 제도가 인간의 삶을 대신하고, "역사상 가장 부유한 인류가 역사상 가장 무기력한 인간"이 된다.

나도 법정스님으로부터 소개받은 <성장을 멈춰라 Tool for Conviviality>를 시작으로 이반 일리히의 저서를 여러 권 읽으면서 일리히의 관점과 문제의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고 있다. 내가 읽은 일리히의 저서로는 <성장을 멈춰라> 이외에도 <학교 없는 사회>, <병원이 병을 만든다 Limits to Medicine>,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Energy and Equity>, <그림자 노동 Shadow Work> 등이 있다.
성장에 대해, 교육제도나 의료체계에 대한 기사나 글, 책을 읽을 때면 종종 일리히의 책을 다시 들여다보곤 한다. 그렇지만 이반 일리히는 여전히 어렵다. 무언가 인류사회의 당연한 것 같은 흐름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문제제기하는 그의 생각은 정해진 이론이나 일방적인 관점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붙잡아 준다.

[ 2014년 12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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