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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여름휴가 - 내가 본 북조선
유미리 지음, 이영화 옮김 / 615(육일오)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추천 [서평] 유미리 저 <평양의 여름휴가 : 내가 본 북조선> -
지난 8월 14일 여의도에서 진행된 광복 69주년 815 평화통일한마당에 참석했을 때 구한 책이다. 예전에 신문 어디선가 연재를 읽은 기억이 떠올라 기행문 전체를 다시 읽고 싶어서…ㅎ
유미리 작가는 일본에서 재일동포로 태어나 힘들게 자랐다고 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남편과 사별하고 대인공포증 같은 것도 있어 힘들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 결과 정신질환도 앓았고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한 전력도 있었다. 그나마 글을 쓰면서 책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자신의 정실진환을 극복하는 중이었다. 글을 쓰면서 심리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걸 보니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작가는 북한을 세 차례 방문하여 그곳에서 자신의 조국과 동포를 만나고 느끼면서 자신의 정신질환을 극복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음을 책 안 곳곳에서 밝힌다.
우리들은 일본에서 조선인 또는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데, 힘든 이유 중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다른 것도 많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일본사회는 특이한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상존하고 섬나라의 일부 폐쇄성 극우 반공적 정서의 소유자들이 많은데, 이들은 남북한 전체에 대하여 식민지 시대의 차별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고, 작가는 증언한다.
그런 일본인들로부터 작가 유미리씨는 평생 수시로 갖은 협박과 야유와 멸시와 비난을 당했기에 ‘조국’이란 술어가 주는 느낌은 남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작가의 국적이 대한민국이면서도 실감하지 못했던 핏줄의 의미, 그 ‘마음이 조국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자각하는 과정이 감동적이면서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작가는 2008년 10월과 2010년 4월 그리고 2010년 8월에 북한을 방문했다.
작가가 첫 번째로 방문하던 2008년 4월은 국제 정세가 유동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어머니와 남동생에게는 방북을 알리지 않은 채 아홉 살이 된 아들을 맡게 된 동거인에게만 알렸다. ‘만약의 사태’까지 논의할 정도였다 한다. 체재기간은 열흘이었다.
책의 제1장은 첫 번째 방북기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특히 북한의 현대사를 일별할 수 있도록 중요한 관광지를 두루 돌며 한국전쟁 이후의 북한주민 생활사와 역사의식이 소박하고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다. 북한에 웬만큼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다 아는 내용들이지만 그런 사실을 재일 동포 인기 여류작가의 시선으로 재확인한다는 점이 다르게 새삼 느껴진다.
작가는 열흘이 다가올수록 단 한 번의 방문으로 북한과 북한 사람들에게 이별을 고할 생각이 없고 더욱 알고 싶기에 재방북을 결심한다. 그 이유는 “나에게 있어서, 이 나라는 내 조국이니까.”
첫 번째 방문에서 작가는 방북 목적을 ‘조국 방문’이라고 썼다. 작가는 자신의 국적은 한국인데 방문 목적을 ‘조국 방문’이라 한 이유에 대해 간략하게 자신의 가족사를 설명한다.
“왜냐하면 조부가 일본으로 건너왔던 그때 조선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지 않았고, 장거리 주자로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하고 있던 조부가 달리는 걸 그만 두고 조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사건(해방 후 조부는 공산주의자 혐의를 뒤집어쓰고 투옥됐다. 인민군이 남하하면 투옥되었던 사람들이 인민군에 가담할 게 뻔하다며, 유치장을 통째로 불태우려고 가솔린을 뿌리고 수류탄으로 폭파하려 했으나 조부는 그 직전에 탈옥했다.-한국전쟁 초기에 이승만 정권의 교도소 학살 사건을 말하는 듯..- 조부의 남동생도 남로당 청년조직인 민주애국청년동맹의 간부가 되어, 장거리 주자로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을 때 남한 군인들에게 사살당했다.)을 생각했을 때, 조부의 남동생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형제가 모두 북으로 갔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p.14)
2010년 4월 작가는 북한을 두 번째로 방문했다. 평양마라톤대회와 태양절(4.15) 기간에 맞추었다. 두 번째 방문을 다룬 제3장에서 인상 깊게 남은 대목은 재인 한국인과 재일 조선인들의 일본으로의 귀화 상황과 작가의 입장이었다.
"1980년대부터 연간 5천 명 정도로 추이하고 있던 일본 귀화자 수는, 서울 올림픽ㅇ이 개최된 1988년을 계기로 7,8천 명으로 급증했고, 납치문제가 크게 보도된 2003년에는 11,778명으로 절정에 달했다. 나 자신은 귀화를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일본에서 받는 ‘부자유’, ‘불편함’,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귀화할 수는 없다. ‘부자유’, ‘불편함’, ‘불평등’ 입장을 계속 강요당하는 한, 일본은 내게 있어 ‘고향’이 아닌 ‘태어난 토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p.93)
이 문장을 읽으면서 한반도 남단에서 친일파 후예들이 설치고 군사독재정권의 후예들이 온국민을 부자유스럽고, 불편하고, 불평등하게 만드는 한국을 고향이 아닌 ‘태어난 토지’로 생각하도록 강요하여 작가와 같은 ‘유랑민’을 늘리지 않나 싶다.
2010년 8월 작가는 아들과 함께 세 번째로 북한을 방문한다. 그녀는 아들에게 대동강변, 모란봉, 을밀대, 백두산, 개선문, 아리랑공연, 푸에블로호 전시관, 판문점 등을 함께 다니고 경험하도록 한다. 아들을 북한에 데리고 간 이유에 대해 작가는 “최초로 조선을 방문하고 나서부터 2년간, 나는 아들과 손을 잡고 대동강 강변을 걷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그것은, 혈육을 나눈 아들에게 조국의 역사를 알려주고 싶은 엄마로서의 마음이기도 했지만, 나와 아들의 개인사를 조국에 대면시키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라 말한다.
작가는 북한의 현실적인 여러 정황에 대하여 구태여 이해하고자 하지 않은 채 그냥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사실 그대로를 르포화 한다. 독자들이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려하기 보다는 일본사회에서 자란 자유주의자답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그대로 담아낸다. 이런 점이 오늘의 북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국가보안법’이 상존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더 이상 적이 아닌 적이 북한이요, 한 핏줄이라는 큰 깨달음으로 그의 아들에게까지 모국을 일깨워준 작가에게 존경을 보낸다.
“서울에서 판문점과 개성을 가보았던 그가 다시 평양에 가보고, 그 두 가지 체험 속에서 진정한 조국과 민족이 무엇인가 깨달아가는 모습은, 아직도 미지수이지만 현재 보다 ‘미래’에 속해 있는 젊은이들에게 참다운 민족적 화두 모색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문병란 후기)
[ 2014년 10월 0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