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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 - 여성주의 정치경제 비판
J K 깁슨-그레엄 지음, 엄은희.이현재 옮김 / 알트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서평] J.K 깁슨 - 그레엄(J.K Gibson Graham) 저, 엄은희/이현재 역 < 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 The End of Capitalism, as we knew it : 여성주의 정치경제 비판 >을 읽고 / 2013. 11., 427, 알트
저자들이 이 책을 쓴 이유는 "자본주의를 경제의 자연스러운 지배적 형태로, 혹은 사회적 공간과 동격으로 공존하는 완전무결한 경제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기존의 사고방식이 사람들의 변혁(혁명) 열망을 어떻게 가로막고 있는지 규명(p.09)"하기 위해서였다 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런 사고방식의 언저리에 머무르는 한 비자본주의적인 발전 프로젝트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늘 자본주의의 작은 틈새나 미래에 위치한 불가능한 것으로, 아니면 그저 미숙한 예측 정도에 그치고 말 것이라고 염려했다. 달리 말하면, 그런 프로젝트들은 하찮은 주변으로 밀려나 '차일피일의 정치'에서나 목청을 드높이게 될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 연장선 상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담론과 이론이 오히려 '자본주의의 지구촌 지배'를 더 공고화시켰다고 도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맑스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자본주의를 비판해 오는 동안,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 비판의 담론이 자본주의 옹호의 담론 만큼이나 자본주의를 막강하게 묘사하고 그 힘을 강화시키는 전제와 논리들을 사용해 왔다는 것이다.
깁슨-그래엄에 따르면, "비판담론이 체제옹호 담론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통일된 힘으로 묘사하는 한, 우리는 이 담론 안에 갇힌 채, 자본주의의 지배에 대해 치를 떨며 분노를 표현할 수는 있지만 그 지배를 극복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해결방향은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기존의 담론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열정 속에서 분노를 해소시키는 새로운 담론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크게 두가지, 즉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경제형식의 공존과 다양한 계급과정들로 분석한다.
자본주의 비판 담론이 자본주의 체제 옹호에 기여했다는 깁슨-그래엄의 문제의식은 신선하면서도 의미하는 바가 컸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근본주의, 제국주의 또는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 담론은 자칫하면 우리가 풀어가야 할 상대 또는 숙제를 너무나 거대하고 완벽하게 만드는 경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깁슨-그래엄이 새로운 담론을 만들기 위해 선택한 것은 '여성주의적' 관점이었다.
기존까지 정치경제학자들이 다루는 경제는 시장과 화폐교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공적' 경제활동 즉 남성 중심의 자본주의적 관계를 중심으로 규정되었고 이런 점에서 여성적 혹은 '사적'인 영역으로 구분되는 가정경제는 담론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깁슨-그래엄은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주로 이루어지는 가정경제를 또 하나의 경제형식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가정경제 뿐만 아니라 시장거래가 아닌 윤리적 공정거래나 협동조합 방식의 교환, 개인적 선물이나 국가적 배분과 같은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로 확장시킨다.
이와 같이 깁슨-그래엄은 기존의 자본중심적 경제담론을 자본주의적 방식과 비자본주의적 방식의 경제형식이 공존하는 사회경제 체제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나서 자본주의 마저 하나의 통일된 형태가 아니라 여러가지 경제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기존에 존재하는 자본주의 경제담론의 '총체성'과 '단수성'과 '통일성'을 해체시킨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강력하거나 통일적인 영웅 혹은 최후의 승리자가 아니라, 경제적 차이의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과의 절합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해 온 하나의 경제형식일 뿐이다.
결국 깁슨-그래엄의 경제담론 속에서 자본주의는 다양한 경제형식 중의 하나로만 존재하게 된다. 또한 깁슨-그래엄의 비자본주의 역시 더 이상 무력한 경제형식이 아니라, 생각보다 우리의 일상에 널리 퍼져 있으며 고유의 힘을 통해 자본주의를 변형시키게 된다.
두 번째 분석틀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본질주의적 계급 모델, 즉 부르주아지 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이다.
앞에서 깁슨-그래엄이 위에서 사회경제체제를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경제형식의 절합으로 설명하였기에 계급분석 역시 다양한 게급적 특성들이 그 생산-분배 과정에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 개인의 계급성은 복합적인 과정들이 중층적으로 얽히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계급과정이 단면이라는 것이다.
역자의 후기에 의하면, 깁슨-그래엄의 이론은 구성주의적 분석논리와 계급과정의 모호성 등 여러가지 면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문제제기는 정치경제학자들에게 많은 문제의식과 시사점을 던져줄 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일반화의 오류'나 '구체성의 부족' 그리고 '상상력의 부재'에 대해 돌아보게 할 것 같다.
이 책을 온존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21세기 전후까지 이어진 서구 학계의 맑스주의 논의와 여성주의에 대한 사전 지식이 어느 정도는 전제되어야 할 거 같다. 책을 읽는 동안 '대문자 자본주의'와 같은 자주 접하지 않았던 개념과 어휘 그리고 알튀세르나 라캉 등에 대한 사전 학습이 전제되지 않아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어떤 추상적 자기유사성에 의해 통합될 때, 하나의 개념 지대가 모순으로부터 해방된다."라는 식으로 번역한 문장이 다수 등장하는데(80년대 이진경 씨류의 문장 이후 처음인듯..ㅋ), 번역이 후지다고 주장하기에는 나의 관련 지식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 책을 통해 1990년대 이후 계속되는 서구 좌파학계(또는 영미권 좌파학계)의 혼란과 치열함이 느껴진다. 그와 달리 국내의 맑스주의 또는 좌파 학자들의 움직임은 잘 보이지 않는다. 정부와 정치권, 학계와 대학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인 문제인 '학문주체성'의 부재이기도 하지만, 그런 흐름이 사대주의가 무척이나 강한 국내 학계(소위 좌파학계 포함)가 언젠가부터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유라고 느껴지고 국내 좌파 중 일부가 생태, 환경, 여성, 협동조합, 자립공동체 등 분산해 가는 이유 중 하나일거라는 생각도 든다.
[ 2014년 2월 0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