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만의 복권 - 조용수와 민족일보 재조명
고승우 지음 / 유니스토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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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고승우, 김민환, 김지영, 원희복 저 < 반세기만의 복권. 민족일보와 조용수의 재조명 : 민족일보 50주년 기념자료집 >을 읽고 / 2011. 11., 238쪽, 문예원

2012년 12월 4일.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 tv토론회에서 한국현대사 60년 만에 이정희 후보의 발언을 통해 처음으로 드러난 이름. "충성혈서를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누군지 알 거다. 한국이름 박정희. 군사쿠데타하고 굴욕적인 한일협정 밀어붙인 장본인"
이승만 정권이 1956년에 대선에 출마한 조봉암 씨를 사법살인하고 진보당을 해산시킨 것처럼, 박정희도 1961년 군사쿠테타 후에 조용수(趙鏞壽, 1930년생) 씨와 민족일보(民族日報)에게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민족일보 폐간 및 조용수 씨 사형 사건"은 한국언론사 가운데 가장 가혹한 언론 통제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우리 나라 언론사에서 많은 언론인이 필화를 겪었지만 신문이 폐간되고 그 신문의 발행인이 처형당한 예는 민족일보 사건뿐이다.

민족일보는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61년 2월에 창간됐으며,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비애를 호소하는 신문" 등 네 가지를 사시로 내걸었다.
그러나 1961년 친일파 일본군 출신 군부였던 박정희 일당이 5.16 군사반란(쿠데타)를 저지른 후 92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됐고, 30대의 젊은 조용수 사장도 같은 해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당했다.

그 이후 45년 만인 2006년 참여정부의 과거사진실화해위원회가 이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한 뒤 조용수 사장은 법원 재심 결과 무죄와 국가 배상 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2008년 1월 1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가 재심에서 북한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혐의로 사형이 선고됐던 조용수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것이다.
고승우 씨 등 저자는 2011년 민족일보 발간 5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민족일보 발간의 언론사적, 사회적 의미와 짧지만 민족일보가 진행했던 활동을 평가하기 위하여 기념집을 발간한 것이다.


김민환 고려대 교수는 '민족일보 사건의 성격과 언론학적 함의'라는 글에서, 민족일보는 중립화 통일론과 남북교류론 등으로 반국가단체의 목적사항을 선전 선동했다고 검찰이 공소장을 제출했으나, 민족일보가 제기한 중립화 통일론 자체가 사회주의를 지향한 것이 아니었으며 친북노선이 아닌 반공 반북노선을 기저에 깔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김 교수는 또한 민족일보 사건은 언론학적으로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며, 민족일보는 1960년 4.19혁명을 통해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사회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 지 자유 토론이 전개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수정주의적인 통일론을 펼친 대안언론으로의 역할이 컸다고 말했다.

원희복 경향신문 선임기자는 민족일보 사건이 재심 무죄 판결으로 그 진실과 법리논쟁, 국가배상이 사실상 마무리 됐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향후 과제에 대해 제시했다.
원 기자는 조용수는 대표적인 언론민주화운동, 통일운동가이면서 권위주의 정권의 사법살인에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보상법의 적용대상이 되지 않아 추모공원 안장대상이 되지 않고 이명박 정부들어 과거사 관련 단체들이 줄줄이 해체되면서 조용수 사장의 묘소를 민주공원에 옮길 곳이 없다며 조용수의 민주화공원 안장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할 문제로 꼽았다.

김지형 한양대 동아시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재심 무죄판결 이전까지는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이영근에 대한 연구와 혁신계와 민족일보의 관계에 대해 조명했다.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이영근이 미국 cia의 첩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민족일보]의 성격을 민족지로 볼 것인지 혁신계 대변지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음을 민족주의자인 이종률 초대 편집국장의 영입과 퇴사과정을 통해 조명해 [민족일보]가 혁신계 대변지로 변화됐음을 밝혔다.

고승우 6.15언론본부 정책위원장은 [민족일보] 폐간 이후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는 제대로 된 [민족언론]이 탄생할 수 없었고, 결국 1987년 6월항쟁에 힘입어 [한겨레신문]이 등장했고, 6.15공동선언의 열린 공간에서 [통일뉴스]와 [민족21]이 나왔다고 봤다.
특히 이명박 정권 들어서 민족언론이 위축됐다며 미디어악법에 의해 탄생시킨 종합편성채널이 연말에 뜨게 된다는데 민족언론이 더욱 위축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민족언론의 재정적 자립성을 강조했다.
물론 한겨레는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를 지나오면서 창간 정신과 제호의 취지를 잊어버렸고, 창간 26년이 지난 현재 상업안보주의와 재벌기득권에 포섭된 보수야당의 대변지로 전락한 상태라고 보여지지만...

 

 


헌정유린 범죄집단 국정원에 뿌려진 삐라. 그 출처도 불분명한 녹취록에 의해 여론몰이와 마녀사냥을 당하는 통합진보당과 이석기 의원을 보면서 책꽂이에서 이 책을 꺼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교훈이 화석화되어 버린 느낌이다. 민주적인 헌법과 법, 제도가 존재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정치인, 언론, 사법기관, 시민들이 그것을 무시하면 그만인 것을.
분단 트라우마를 악용하는 자들과 분단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하는 한 남북화해나 평화, 통일은 커녕 초보적인 민주주의도 지켜내기 어렵다는 것을 지금 한국인들의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던 것은 [민족일보]의 사시나 기사 또는 군사독재의 탄압과정이 아니었다. [민족일보]를 창간하고 운영했던 조용수 씨가 5대 총선에 출마했을 때의 나이가 만 31세, [민족일보]를 창간했을 때가 만 32세였다는 사실이었다. 그 나이 때 나는 무엇을 했나 기억하면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전에 김영삼 씨처럼 26세에 국회의원이 나타나기도 했다. 해외에서도 위대했던 20~30대의 인사들도 많았다. 로마시대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과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로마군 장수 스키피오의 나이도 26세였고,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이탈리아 원정군 총사령관이 된 것도 27세,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36세에 연방 하원의원이 되었다. 모두들 젊은 나이에 대단하다고 칭송했다.
그런데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만 29세에 공화국 원수가 된 것에 대해서는 일부에서 "어린 게 뭘 안다고" 식으로 말하는 걸까?

[ 2013년 9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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