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에 反하여 희망하라 - 한총련을 위한 변명
최진섭 / 살림터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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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최진섭 저  < 희망에 반하여 희망하라 : 한총련을 위한 변명 >을 읽고 / 1999. 05., 312쪽, 살림터


이 책은 지난 2008년을 끝으로 활동이 종료된 학생운동 조직인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지메(왕따)' 현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책이다. 특히 1996년 '연세대 사건'과 1997년 '프락치 오인 치사 사건' 발생 후, 한총련에 관한 한 우리 사회의 누구도 선뜻 한총련의 원군이 되지 않으려 하며 언론과 지식인 사회도 마찬가지였던 태도에 대한 비판서라 할 수 있다.
책이름 '희망에 反하여 희망하라'는 성서에서 인용한 말이다.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로마서 4장 18절) 후세의 사람들이 '믿음의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1985년 '전학련(전국학생총연합)'으로 시작된 학생운동 연합조직은 1987년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을 결성하고 그 해에 6월 민주항쟁을 주도하면서 군사독재정권의 6.29 선언을 끌어내고 대통령 직선제와 87년 헌법 개정이라는 성과를 냈다.
1987년 대선에서 야권의 단결을 이끄는 데 실패하여 대선에서 패배하였지만 1988년 그 해 5공비리와 광주항쟁 청문회를 이끌어내어 전두환을 백담사로 유배보냈고, 1989년 임수경 방북으로 오랫동안 금기로 묶여있던 '통일'을 대중운동의 광장으로 끌어냈다.
1990년 3당 합당과 1992년 대선 패배라는 극우보수세력에게 역공을 당하는 과정에서도 꾸준하게 학생운동 조직역량을 키워냈다.

전대협을 계승하여 1993년 출범한 한총련은 1993년 대학생 8~10만명이 모여 출범식을 거행했으며, 출범식 참석 인원이 1994년 조선대 5만명, 1995년 경북대 4만명, 1996년 전북대 16만명(?)으로 급격하게 늘어난 것처럼 강력한 대중조직으로 거듭났다. 이에 따라 한총련은 1995년 군사쿠테타와 광주시민 학살을 저지른 전두환, 노태우의 구속 기소와 사형 판결을 이끌어내는 데 가장 큰 힘을 발휘했다. 
한총련은 해방 후 친일파가 한국의 기득권으로 정착하도록 만들어 주고 군사독재정권과 재벌 독점을 지원해 준 미국에 대해 정확한 역사인식과 해결방향을 제시했다. 즉 반외세 투쟁과 평화통일 투쟁도 거세게 벌였다.
극우보수세력과 김영삼 정권은 이후 한총련에 대한 대대적인 이념공세와 폭력탄압으로 반격했다. 이런 탄압은 1996년 '연대 사태'와 1997년 '프락치 치사 사건' 그리고 학생회 간부에 대한 폭력적인 한총련 탈퇴 강요라는 반인권적적인 행태와 불상사를 낳았다.
한총련 조직은 급격하게 위축되었으며 1997년 출범식은 한양대가 봉쇄되어 무산되고 고려대에서 5천명이 정리집회, 1998년 조선대 5천명, 1999년 경희대 5천명까지 정체되다가 2000년 부산대 2만명, 2001년 한양대 5만명, 2002년 서울산업대 1만명으로 부침을 격었으며 이후 침체를 거듭하다가 2008년 한총련 의장 선출에 실패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한총련 탄압에는 보수적인 사법부도 기여했다. 1999년 6기 한총련이 대법원에 의해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로 판결되어 정부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고 언론과 정치권, 지식인들로부터도 마녀사냥을 당했다. 이후 강령과 규약을 일부 변경한 2004년에도 또다시 대법원이 이적단체로 규정하여 시민단체와 학생회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국가보안법은 1999년 방송사 전화여론조사에서 시민들의 66%가 개정 내지 폐지에 찬성한 대표적인 악법이고, 국제앰네스티 등 국제사회에서 매년 폐지를 촉구당하는 상황이며, 참여정부 시절 폐지를 추진하다가 좌절된 바 있다.
한총련이 대법원에서 이적단체로 판정된 주된 이유는 한총련의 투쟁 목표인 '주한미군 철수'와 '연방제 통일' 등이 단순히 북이 주장하는 것과 같다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일본의 전쟁범죄 사죄와 보상' 역시 북이 주장하는 것이기에 국가보안법 상 찬양,고무이고 그런 개인은 이적행위이며 조직은 이적단체가 되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즉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하는 국가보안법 자체가 위헌이고 정당성이 없는 것이다.

특히 한총련의 선배라 할 수 있는 전대협동우회 등 전대협 출신 일부가 한총련에 대한 극우보수정권과 언론의 탄압에 대해 침묵하고 동조함으로써 후배들에 대한 마녀사냥이 동참한 것이 한총련 세대들에게도, 사회운동측에게도, 한국사회 전체에서도 뼈아픈 일이었다. 한총련에게도 비판받을 면들이 많았을테지만, 비판과 왕따(배제, 마녀사냥)은 전혀 별개다.
소위 민주정부라 불렸던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에서 연거푸 한총련을 탄압하면서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를 지키지 못한 것과 국가보안법을 폐지 내지 전면 개정하지 못한 것은 민주정부가 대다수 국민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헌법을 올바로 세우지 못하는 큰 이유 중 하나인 셈이다. 극우보수세력의 전가의 보도인 국가보안법과 분단트라우마를 획기적으로 개선시키는 데 필요한 제도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1998년 11월 한국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서는 '한총련 이적규정 철회를 위한 목요기도회'가 열렸다. 이날 기도회에서 강연을 맡은 강희남 목사의 연설, 1998년 10월 목요기도회에서의 홍근수 목사의 강연, 1998년 가을 김종맹 목사의 조선대 교지 인터뷰 일부를 소개하면,
"3.8선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학생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서 '나는 죄인이다'고 자책한다. 한총련만이 민족의 예속에 분노하고 저항할 줄 안다. 한총련은 아직도 살아 있는 민족의 양심이다. 국민들은 나라가 외세에 종속되어 있고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데도 분노할 줄을 모른다.
구한말의 어느 선비는 글 배운 사람들이 사람 노릇하기 힘들다고 했다. 수많은 선비들이 총들고 싸우거나 자결로써 외세에 저항했다. 그런데 지금 대다수 지식인이 분단이 역사를 방관하고 있다. 역사는 이들의 태만함과 비겁함을 묵인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지식기사에 불과하다. 이들 모두를 합쳐도 몸을 던져 싸우는 한총련 학생 하나만도 못하다.(강희남 목사)"

"한총련 학생들이 꽉 막힌 역사의 출구 앞에서 고난을 당할 때, 우리 기성세대는 무엇을 했고 무슨 말을 했는가? 우리는 한마디로 말해서 비겁하고 용기가 없어서, 역사에 대해서 무책임하여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만일 예수님이 이 사회에 오신다면, 그는 틀림없이 좌경, 용공, 빨갱이라고 낙인찍히고, 유죄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에수님이 빨갱이로 규정된다면 예수의 제자로서 좌경이면 어떻고 용공이면 어떻습니까?(홍근수 목사)"

"지금 우리 사회는 재야단체가 실종된 위기시대라고 생각한다. 군부독재시대에 많은 재야인사들이 탄압 속에서도 투쟁했지만 문민정부 들어서면서 재야가 유명무실해지고 군부독재 시절의 재야인사들이 모두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도 되는 등 자기의 자리를 확고히 차지하고 있다. 노동자들과 학생들만이 외롭게 고통당하고 있고, 대부분의 재야인사들은 관망만 하고 있을 뿐이다. 한총련은 한국 학생운동사의 정통성을 잇는 큰 동맥이다.
이제는 새로운 재야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한학협(한총련학부모협의회)은 순수한 학부모들로 구성할 것이고 만약 학부모들의 한계점이 나타난다면 순수한 인권단체들과 함께 연대해서 문제를 풀어볼 생각이다. 시작은 순수하게 한총련 학부모들로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21세기 우리의 통일조국을 이끌어나갈 사람들이다. 학생들을 훌륭하게 여기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부모가 자식들을 억압하고 무시하면서 키운다면 삐뚤어질 수밖에 없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역사가 증명해 주듯이 대통령이라고 해서 학생들을 탄압하고 무시한다면 그 정부는 성공할 수 없다. 학생들을 탄압한 정권은 망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정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사를 지고 나갈 젊고 귀중한 학생들의 입장을 존중해 주고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김종맹 목사)"(p.272~275)

그 때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그분들은 여전히 똑같은 말을 하실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 같다. 한총련의 왕따 과정을 살펴보니 작년 통합진보당에 대한 엄청난 언론 왜곡 공세와 마녀사냥, 왕따와 종북공세가 떠오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한국사회에 꼭 들어맞는 교훈이다.
1990년대 중후반 이후 한총련이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당할 때 이를 지지,지원해주 않고 오히려 분단 마녀사냥에 가담한 선배들, 지식인들, 정치인들의 과오가 너무나 컸다. 그리고 참여정부 시절 국가보안법을 폐지 내지 개정하지 못한 당시 국회의원들, 장관들, 청와대 참모들, 지식인들, 언론인들, 학자들, 법조인들은 모두 국가 범죄, 극우보수세력의 악행을 저지하지 못한 죄를 저지른 셈이다.
당사자들은 지금이라도 뼈를 깍는 각오를 하고 국가보안법 폐지에 나서야 한다. 국가보안법이 이 땅에서 존재하는 한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총련은 '이적단체'에서 복권되어야 하며, 역사는 그들을 '민족자주와 평화통일의 전사'라고 평가할 것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악법의 거미줄로 둘려싸여 있는 사회에서 있을 곳은 감옥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양심을 버려 준법서약서를 써서 사면되느니 차라리 감옥을 택하는 사람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최진섭의 시각은, '반백 년이 넘도록 분단의 마취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의 등을 내리치는 죽비가 되어 독자 가슴을 울릴 것이다."(편집자의 말)

* 이 책을 통해서 박노해(박기평) 시인이 왜 최근까지도 민주진보진영측 대다수 사람들에게서 신뢰와 애정을 받지 못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동안 막연히 주변 친구 몇 명에게서 박 시인의 사적인 평판에 대해서만 들어왔는데, 이 책을 통해 박 시인이 1990년대 말 악명 높은 '준법서약서'에 날인하고 감옥에서 나왔고 당시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알게 된 것이다.
비록 10년이 훨씬 넘은 과거의 일이지만, 현재 박 시인의 모습과 당시의 모습은 일치하지 않는 것 같다.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당시 생각과 행동의 연장선인가. 사람의 일이란 참 모를 일이다.

[ 2013년 8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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