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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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에릭 호퍼(Eric Hoffer) 저, 이민아 역 < 맹신자들 The True Believer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을 읽고 / 2011. 09., 255쪽, 궁리출판사

공부모임 교재로 채택되어 읽게 된 에릭 호퍼의 대표 저서. 이 책은 '거리 위의 철학자'로 유명했던 에릭 호퍼를 위대한 사상가로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책을 읽은 소감은 서구의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이 20세기 초중반 대중(민중)의 광범위한 저항운동을 폄하하고 비난하기 위해 반갑게 맞이하였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호퍼가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운영방식을 바꾸고자 나섰던 이들을 줄곧 개인적으로 무능하고 이기적이며 자기부정과 권태에서 출발한 광신도라 규정하기 때문이다.

1951년에 첫 출간된 이 책을 1990년 대한교육공사가 한국에 처음 번역 출간했던 제목은 <대중운동의 실상>이었다. ‘실상’이라는 단어에서 뭔가 ‘불온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 책은 “민주화와 노동운동 등 사회 운동'을 억누르려는 정부와 저항적 대중운동을 삐딱하게 보고자 하는 권위주의적 관변학계 지식인들에게 일종의 복음이 되었던 책”(장정일의 독서일기, 한겨레 2011. 10. 14.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00866.html)이기도 했다.

물론 장정일은 이 책의 순기능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적 통찰로 충만한 이 책은, 딱 소리와 함께 야구장을 가로지르는 ‘빨랫줄 타구’처럼, 대중운동을 좌우·선악 양단으로 구획하지 않는다. 호퍼는 수구나 진보 공히 대중 동원이나 선동에 취약하다고 보며, 대중운동을 무조건 악으로 타매하기보다 “정체된 사회를 각성시키고 혁신하는 요인”으로 긍정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는 맹신자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개성과 주체성을 돌보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오늘의 주체가 일망감시와 통치성에 속속들이 식민화된 지금, 지은이의 채근은 성공한 예외자의 순진한 해결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번에 출간된 제목은 'The True Believer'에 맞는 번역인 '독실한 신자'가 아니라 '맹신자'다. 이 제목 또한 출판사와 역자의 의도와 편견이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신념이나 사상 따위를 다른 것으로 바꿈"이라는 뜻을 가진 '전향'이라는 단어를, 좌절하거나 현실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대중운동에 뛰어드는 것을 지칭하는 데서도 출판사와 번역자의 수준 또는 악의가 느껴진다.

에릭 호퍼는 서문에서 여러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책을 발간했다고 말한다. 그는 모든 유형의 헌신과 신념, 권력 의지, 단결과 자기희생에는 어떤 획일적인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 광신적 기독교 신자, 광신적 이슬람교 신자, 광신적 민족주의자, 광신적 공산주의자, 광신적 나치가 서로 다른 것은 분명하지만, '광신'이라는 점에서 한 부류로 취급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대중운동'은 반체제 저항운동뿐만 아니라 인간이 집단을 만들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운동을 아우른다. 초기 기독교 운동, 종교개혁 운동,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나치즘, 일본의 근대화, 시오니즘 운동 등을 포괄하는 의미다.

호퍼는 태동기 대중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이들은 자신의 삶이 순식간에 극적으로 변한다는 전망에 이끌리기 쉽다고 주장한다. 대중운동의 지도자도 이러한 대중의 열망을 꿰뚫어보고 보잘것없는 현재를 극복하면 영광스러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대중을 선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장밋빛 미래에 이끌리는 이는 주로 좌절한 사람이며, 현재의 자신을 경멸하는 좌절한 사람은 자기의 삶이 통째로 바뀌는 급진적인 변화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변화를 갈망하는 이러한 좌절한 이들의 심리 상태 때문에 모든 초기의(태동기) 대중운동은 좌절한 사람들한테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고 호퍼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쓸모없다는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자신에게서 벗어나 좀 더 완전하고 숭고해 보이는 무언가를 추종하기가 쉽다. 숭고한 대의에 에너지를 쏟음으로써 자신의 하찮은 삶, 망가진 인생으로부터 도피한다는 것이다. 실로 좌절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열정적으로 매달릴 어떤 대상이 필요한 것이므로 그것이 종교든 사회혁명운동이든 민족운동이든 가리지 않는다. 따라서 호퍼에 따르면 광신적 공산주의자가 광신적 애국주의자나 광신적 가톨릭 신도로 바뀌는 일은 이치에 맞다. 맹신자에게는 대의명분이나 이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매달릴 수 있느냐 여부에 있다.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을 거부하고 하나의 조직에 완전하게 하나된다는 호퍼의 주장은, 조직이나 대의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일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고 조직이 그리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 폭력을 동원해야 한다면 더 없이 무자비해질 수 있다는 논리로 비약된다. 
따라서 호퍼의 책은 시공을 초월하여 극단적 테러리스트, 자살폭탄자의 심리를 '광신도'로 해석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호퍼는 결론을 대신하여 좋은 지도자의 예로 링컨, 간디, F.D. 루스벨트, 처칠 같은 지도자를 꼽는다. 이들은 히틀러, 스탈린, 루터, 칼뱅과는 달리, 좌절한 영혼을 대중운동의 재료로 삼지 않았다. 이들 "지도자의 자신감은 인간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며, 자신이 인류를 명예롭게 대하지 않는 한, 아무도 명예로울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에릭 호퍼가 대중운동의 본질에 대한 단상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다분히 선험적이고 단정적이다. 특히 대중운동에 참여하는 개인들이 "자신이 쓸모없다는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자신에게서 벗어나 좀 더 완전하고 숭고해 보이는 무언가를 추종하기" 쉽고 "숭고한 대의에 에너지를 쏟음으로써 자신의 하찮은 삶, 망가진 인생으로부터 도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압과 세뇌에 의해 노예같은 삶을 살던 개인들, 민중들이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나서기 위해 각성하고 자립하는 운동을 심하게 폄하하고 왜곡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호퍼가 대중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속성을 규정하는 방식에는 대부분 합리성이나 논리적인 연관은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는 좌절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불만과 증오가 생겨난다거나 쉽게 남을 믿는 사람이 남에게 사기치는 경향이 강하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이는 상식적으로도 이론적으로 적절하지 않다. 사람이 좌절하게 되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며, 또한 그를 좌절하게 하는 요인이 내부나 외부에 존재하느냐에 따라, 고립적인 환경인지 집단적인 환경인지에 따라, 교육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에 따라 당사자나 집단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는 자는 외부에서 맹종할 대상을 찾을 수도 있지만, 역으로 삶을 포기하면서 움직임 자체를 거부할 가능성이 있기도 하다. 호퍼는 사람들의 특정한 처지와 심리상태에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신의 의도에만 한정시키는 오류를 범한 셈이다.

독일의 경우에도,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인해 심각한 좌절에 빠진 독일 민중들이 히틀러를 선택한 것은 히틀러의 대중 선동이 크게 작용하였으나 그 이전에 민중들이 지지하고 참여했던 독일 사회민주당 등 진보좌파 진영이 노선과 정책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이탈리아 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호퍼의 주장에 타당성과 시사점이 있는 부분도 있다. 대중운동의 대오 속에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뛰어 들었거나 광신적, 맹신적 속성을 가진 개인이 일부 존재할 수 있으며,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 모두에게 맹신적 속성이 내재해 있을 수 있다. 그런 불완전한 개인이나 개인의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그리고 그런 맹신적 개인이 대중운동 내에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대중운동이 애초 목적에서 변질될 수 있음을 잊지 않도록 호퍼가 경고해주는 셈이다.
특정 최근 논란이 된 '일베(일간베스트)'의 일부의 경우 극단적인 자기 혐오에서 비롯된 가능성이 있으며, 정치인 지지자 중에서 명백히 '빠' 성향을 보이거나 극단적인 이념성향, 공격성향을 보이는 경우도 경계할 일이다.

광신적 대중운동이나 이념운동에 빠진 사람은 '광신적'이라는 특성 때문에 또 다른 광신적 운동으로 변질된다는 지적은 크게 공감이 된다. 1980년대에 이념적으로 과격하고 광신적이었던 김영환 씨 등의 뉴라이트 세력이 친일을 찬양하고 사회운동에 적대적인 사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라는 말이 근거 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선전 선동만으로 내키지 않는 마음을 억지로 움직이지는 못하며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주입시키지도 못하고 이미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설득하지도 못한다"(p.156)는 호퍼의 주장 역시 시사점이 크다. 희망이 없는 선전선동만으로는 대중운동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지적이다. 2008년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지금까지 시민의식을 가진 이들과 민주당 등 정치권이 정권과 기득권에 반대하는 선전선동만으로 대중과 유권자에게 지지를 구하다가 2012년 총선, 대선에서 연거푸 패배한 것이 호퍼의 그런 주장을 입증한 셈이다.
한국의 사회운동 진영과 진보정당 진영이 선전선동 이외에 '희망'과 '대안'을 꾸준히 모색해야 함을 경고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대중운동에 대거 참여한 대중들이 "자기희생을 각오하는 열정"을 쏟아 붓는 반면 이런 주체가 만들어놓은 그 대중운동의 열매를 가져가는 이들은 "개인의 성공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는 호퍼의 주장은 선견지명이 있다. 1980년대 사회운동의 성과를 야당 정치인이 독식하고, 그 이후의 대중운동 역시 일부 출세주의적 운동가들이 보수 정치권에 몸담으면서 사회운동과 진보정당을 약화시켜온 것이 한국의 대중운동, 진보정당 운동사였기 때문이다.

[ 2013년 6월 0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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