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빈곤 경제학고전선집 15
헨리 죠지 지음, 김윤상 옮김 / 비봉출판사 / 199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 [서평] 헨리 조지(Henry George)저, 김윤상 역 < 진보와 빈곤 Progress and Poverty >을 읽고 / 1997. 01., 589쪽, 비봉출판사

 

헨리 조지가 이 책을 처음 출판한 것은 1879년이었다. 유럽에서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때가 1848년이고 '파리꼬뮌'이 일어난 것이 1871년이니 민중혁명과 사회주의의 격동기에 출간한 셈이다. 일제가 조선에 군사적 위협을 가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때가 1876년이니 한반도 민중들은 암흑 속에 갇혀 있었다.

 

헨리 조지는 "부는 계속 증가하는대 데 왜 빈곤은 증가하는가?"라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연구했다. 그의 이론을 간략히 요약하면 "물질적 진보가 자본의 이자나 노동의 임금이 아니라 토지의 지대(토지가치의 상승)으로 몰리면서 임금이 하락하고 빈곤이 창궐한다"와 "임금과 이자는 어디에서나 지대선 내지 경작의 한계에 의해 정해진다"고 정리할 수 있다.

 

헨리는 당시 서구에서 창궐하던 경제학에 대한 주류 이론 내지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이 책을 발간한 것이다. 아담 스미스, 존 스튜어트 밀, 버클, 프라이스 등의 임금 학설을 비판하면서 "임금이 자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대가로 지불되는 노동의 생산물에서 나온다"는 논리를 전개하였고, "노동자의 생계비도 자본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맬서스의 <인구론>, 즉 "인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생존물자는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주장 또는 이론의 허구성을 사례와 이론으로 통하 비판한다.

 

그는 지대와 지대법칙, 이자법칙, 임금과 임금법칙, 그리고 법칙 간의 연관성과 조화에 대한 정의와 이론을 먼저 수립한다.
"어느 토지의 지대는, 동일한 투입으로 사용 토지 중 생산성이 가장 낮은 토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도를 초과하는 생산물이 의해 결정된다."(지대법칙 p.161)
"임금과 이자 간의 관계는 자본이 재생산 형태로 사용될 때 그 자본이 가지는 평균적인 증가력에 의해 결정된다. 지대가 상승하면 이자는 임금의 하락과 더불어 하락한다. 즉 이자는 경작의 한계에 의해 결정된다.(이자법칙 p.194)
"임금은 생산의 한계 즉 지대를 지불할 필요 없이 개방된 자연의 최고생산점에서 노동이 얻을 수 있는 생산물에 의존한다."(임금법칙 p.203)

 

그런 후에 저자는 인구의 증가와 기술 개선이 실제 산업과 사회 현실에서 어떨게 부의 분배에 효과를 미치는지 그리고 물질적 진보에 의해 생기는 기대 효과에 대해 분석한 후, 물질적 진보가 대부분 지대에 의해 흡수되고 여기에 투기적 토지 거래에 의해 임금과 이자가 증가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토지 투기의 영향으로 지대가 상승하는 현상은 진보하는 지역에서의 부의 분배 이론을 완성하는 데 무시해서는 안된다. 물질적 진보와 연관된 이 힘 때문에, 진보가 생산을 증가시키는 정도보다 더 큰 비율로 지대를 계속 상승시킨다. 따라서 물질적 진보는 임금을, 상대적으로만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감소시키는 경향이 생긴다."(p.247)
또한 이러한 토지 투기현상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산업불황의 근본 원인"이며 "부의 증가 속에서 계속되는 빈곤의 증가의 근본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헨리 조지는 물질적 진보에 따른 지대 상승과 토지의 독점을 해결하는 방법은 "토지를 공동소유로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토지공개념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토지 공유제라는 해결책의 정당성을 다른 관점에서 제시한다. 토지사유제의 부정의성과 토지사유제의 궁극적 결과로서 노동자가 노예화됨을 설명한다.
그가 제세하는 결론, 즉 궁극적인 해결책은 "지대를 모두 조세로 징수"하는 것이며 대신 기존의 조세를 모두 폐지하는 것이다.

 

부동산으로 밥벌이를 하고 부동산과 주거 문제를 고민하면서 헨리 조지의 명저를 읽지 못한 것을 여러번 후회하다가 마침내 이 책을 읽었다. 마르크스 등에게서 느꼈지만, 19세기 후반에 출간한 저서임에도 주장을 전개하는 데 있어 논리적이고 구체적인 것이 무척 인상적이다. 어렵지도 않았다.(번역이 훌륭해서인가? ^^)

약 140년 전에 임금과 이자와 지대에 대한 법칙과 연관성을 연구한 저서임에도 21세기인 현재 시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서 해방 이후 국내 총생산과 토지 가격의 증대, 그리고 임금소득과 지대를 계산하여 통계를 낼 수 있다면 헨리 조지의 이론을 검증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소 의아한 것은, (내가 유럽의 사상사를 잘 몰라서 그렇겠지만) 헨리의 주장과 이론 속에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1848년)과 <자본론>(1867년) 자체에 대해 그리고 마르크스의 이론이나 주장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미국에 살았거나 미국인이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헨리 조지의 논거와 이론에 크게 공감이 된다. 특히 토지 사유제를 부정하는 철학과 정당성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는 지구는 인류뿐 아니라 생물체 전체가 공유하는 재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 밖에 없는 지구, 그리고 동식물이 공존하는 대지를 어떻게 인간이, 그것도 인간의 일부가 사유할 수가 있단 말인가?
"자연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처지에 있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자연은 노동의 결과 외에는 인정하지 않으며 노동의 결과라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인정한다. ... 자연의 법칙은 창조주의 뜻이다. 자연법은 노동의 권리 외에 어떠한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다. 자연법에는 모든 인간이 자연을 사용하고 향유할 권리, 노력을 자연에 투입할 권리, 자연으로부터의 대가를 수취하여 소유할 권리의 평등헝이 폭넓게 그리고 명백히 규정되어 있다. 자연은 노동에게만 주므로 노동을 생산에 투입하는 것이 배타적 보유의 유일한 권원이다."(p.322)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의 논거와 이론에 대해 전폭적으로 지지,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몇 가지 때문이다.
첫째, "지대의 상승이 자본 이자와 노동 임금을 전부 가로챈다"를 논리적을 넘어서 구체적으로 연결하려면 계산과 통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저자는 아담 스미스와 존 스튜어트 밀의 '임금 학설'이나 맬서스의 '인구론'을 비판하기 위해 동원했던 수 많은 통계와 수치를 지대 독점론과 지대 과세 정당성에서는 제시하지 못한다. 그리고 '지대 독점론'은 자본주의 태동 이래 자본의 기하급수적 증가와 노동의 산술급수적 증가 내지 정체(물가상승을 감안한) 및 제국주의적 착취를 설명하지 못한다. 한 가지 요소 또는 제도가 나머지 모든 제도와 상황을 규정짓는다는 것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만큼이나 단선적, 일면적이다. '지대 독점론'은 지본가가 힘과 권력을 장악하여 부정의한 제도를 통해 분배정의를 왜곡하는 책임에 면죄부를 줄 수 있다.
둘째, 이론적으로 지대 취득자와 이자 취득자를 나눌 수 있지만, 실제 경제 현실에서는 복합적이고 이중적이다. 대부분의 대규모 토지 소유자는 동시에 이자 취득자이면서 자본가인 것이 현실이다. 물론 헨리 조지가 연구할 무렵 유럽에서는 봉건 지주와 부르조아 자본가가 어느 정도 분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봉건 지주 중에서 지대 이외에 이자 취득자 생활을 하거나 자본가를 겸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을까?
셋째, 헨리 조지는 생전에 알지 못했지만, 사회주의를 표방하며서 혁명을 일으키고 건설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토지 공유제를 중심으로 토지 소유 구조를 운영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들의 물질적 진보가 인민들의 삶의 개선에 직결되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헨리 조지의 '정의'와 '정당성'에 대하여 공감하면서도 서구인 특히 미국인으로서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제5장 미국의 토지사유제에서 "우리가 미국 국민성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모든 요소, 우리의 생활과 제도를 오래된 국가보다 더 낫게 하는 요소의 근원은, 새로운 토양이 이민자에게 개방되어 있고 미국의 토지가 저렴하였다는 사실에 있다."(p.376)고 자랑스러워했지만, 그 이전에, 즉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유럽 프로테스탄트부터 시직하여 미국인들이 향후 200여년 간 당초 토지공유제(토지 사유 개념이 야초에 없었던 인디언)였던 토지를 인디언들에게 구걸과 아첨, 사기와 농락, 힘과 폭력으로 강탈하여 토지를 집단적으로 갈취하였고 자신들끼리 사유했다는 점을 거론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헨리 조지가 주장한 물질적 진보와 인간의 품성, 그리고 사회 환경과의 연관성에 대해 주목한다. 아래 문장을 읽으면 저소득층일수록, 학력이 낮을수록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는 작년 대선 출구조사 분석 기사가 생각난다.
"사실 인간이 가진 동물 이상의 품성도 동물이 가지고 있는 품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인간이 지적, 도덕적 품성을 배양하려면 동물적 옥구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동물적 생존에 소요되는 필수품을 얻기 위해 뼈 빠지게 일해야 한다면, 사람들은 기술 개선의 자극제라고 할 수 있는 근면의 의욕을 잃고는, 의무적인 일만 하려 할 것이다. 인간이 더 이상 크게 나빠질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서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 상태를 개선할 희망이 없다고 한다면 앞날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여가를 주지 않는다면 - 이 때의 여가는 일자리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할 필요성이 없다는 뜻이다 - 어린이를 초등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키고 어른에게 신문을 공급해 주더라도 지적 능력을 갖추게 할 수 없다.
어느 국민 또는 어느 계층의 물질적 생활이 개선된다고 해서 지적, 도덕적 개선이 당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임금이 상승하면 처음에는 나태하고 낭비하는 버릇이 어느 기간 지속될 수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근면, 기술, 지적 능력, 절약이 나타난다. 서로 다른 국가, 국가의 다른 계층, 같은 민족의 다른 시대, 같은 민족의 이민 전후의 상태를 비고하 보아도 언제나 일관성 있는 결과를 보여 준다. 즉 물질적 생활이 개선되면 위와 같은 인간적 품성이 나타나고 물질적 생활이 약화되면 인간적 품성이 사라진다.
빈곤은 번연(John Bunyan, 1628~1688)이 꿈에서 본 '절망의 수렁'이었고, 이 수렁에는 아무리 좋은 책을 던져 주어도 소용이 없다. 인간의 근면, 절제, 기술, 지적 능력이 향상되려면 궁핍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예에게서 자유인의 덕목을 기대하려면 우선 노예를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한다."(P.295)

 

아무튼 이러한 문제의식과 더불어 국내 환경,생태운동에 대해서는 더 어려움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유권자들이 궁핍과 불안정으로 인간적 품성을 보유하기 힘든 조건에서, 자신들의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해당하는 최저임금,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무상교육 등에 대해서도 올바른 의사표시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보다 더 간접적이고 한 차원 높은 생태나 환경 문제에 대해 이해하고 움직일 수 있을까 의문이다. 결국 상류층과 중산층만 공감하고 동조하는 캠페인이 되버리지 않을지...

 

[ 2013년 5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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