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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생활협동조합운동의 기원과 전개
(재)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엮음 / 푸른나무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서평] ICOOP 협동조합연구소 편저 <한국 생활협동조합운동의 기원과 전개>를 읽고 / 2012. 03., 352쪽, 푸른나무
협동조합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후, 대부분 유럽쪽의 협동조합에 대한 책들만 읽었다. 실제 출판사에서 발간한 협동조합 책들이 유럽의 책을 번역한 것이거나 유럽의 사례를 연구한 것들이 많다. 한국의 협동조합 역사가 짧은 탓이기도 하겠지만, 대학이나 연구소 등에 종사하는 학자들이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생태경제 등에 대해서만 주로 연구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한국의 대학이나 연구소에 속한 박사들 중 유학한 이들이 90% 이상 미국에서만 공부했고, 주로 주류 경제학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iCOOP 협동조합연구소가 생협 창립 10주년을 맞아 기획한 세미나 발표자료를 묶은 것이며 한국의 협동조합, 특히 생활협동조합의 역사적 기원과 전개과정을 다룬 드문 책이다.
조선 후기와 일제 강점기 사이의 협동조합 관련 사례와 자료가 부실하여 제대로 연구성과가 없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일제 강점기간 동안 독립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 뿐 아니라 자조자립을 위한 협동조합 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점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라는 무식한 독재정권 치하에서도 협동조합 운동이 꾸준히 전개되어 왔다는 점에서 신선한 느낌을 받는다.
2010년 현재 한국의 4대 생활협동조합(한살림, iCOOP, 두레, 여성민우회)은 전국에 312개 매장, 조합원 약 46만명, 매출액 5,300억원에 이를 정도로 크다. 대기업 매출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한국의 유통업, 특히 농산물 유통은 출렁이는 소비자 가격과 생산농가에 대한 저가 매입, 불안전한 안정성으로 악명이 높다. 하지만, 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은 안정적인 가격과 안전한 먹거리의 공급, 농산물 가격 안정과 농가 소득 보장을 조합원들과 농민들에게 제공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생협은 시민들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만든 협동조합이고, 농협을 비롯한 대부분의 다른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부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협동조합이 시작될 때에는 그 나라의 경제적 상황과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한국 역사 속에서 지금과 같은 생협이 생기게 된 것은 한국의 역사와 경제가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한다. 자본주의가 가장 먼저 발달한 영국에서 1844년 소비조합이 만들어지고 이어서 프랑스에서는 생산자조합, 독일에서는 신용협동조합과 농업협동조합 등을 시작하는 것도 이를 반영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어떤 역사적 경험과 경제 현실이 지금과 같은 생협이 만들어지는데 영향을 미쳤을까? 이 질문에 대한 연구 결과가 이 책에 담겨 있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1920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침략 당해 민족 경제가 무너지고 농촌이 해체되는 시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소비조합을 만든다. 하지만 일제는 1930년대 전시체제로 들어가면서 탄압하고 해산시킨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기를 겪은 이후 1960년대에 들어서서 도시에서 서민들이 사는 지역, 노동조합, 노동운동 그리고 농촌 등에서 낮은 임금 또는 적은 수입으로 품질 좋은 상품을 저렴하게 구매하기 위해 소비조합을 만든다. 이 시기의 소비조합은 군사 정권의 탄압, 경영의 부실 그리고 일부 지도부의 비리 등으로 다시 사라진다.
현재와 같은 국내산 친환경농산물을 중심으로 취급하는 소비자협동조합은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 출현했다. 명칭도 소비조합 또는 소비자협동조합에서 소비자생활협동조합(약칭 ‘생협’)으로 바꿨다. 이는 일본 생협의 영향이다. 일본이 1945년 2차세계대전 패전 후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생산과 소비 문제만이 아니라 생활 전반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판단 속에서 생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한국에 전해지면서 ‘친환경농산물 직거래’라는 의미로 잘못 전해 졌다. 1980년대 후반은 민주화 운동의 성공으로 군부 독재가 물러간 시기이자 개방으로 외국산 농산물이 밀려오던 시기다. 아울러 군사 정권에 의해 가려져 있던 공해, 환경오염, 농약 등의 문제가 봇물처럼 터져 나와서 환경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생협’이라는 말이 자리 잡고 아울러 ‘국내산 친환경농산물 직거래’로 바뀌게 된 것은 일본 생협의 영향과 1980년대 후반의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 현실의 반영이다.
1920년 5월 동아일보에는 '목포 소비조합'의 창립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목포 소비조합은 정관까지 갖추었다. 저자들은 목포 소비조합을 한국 생협운동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최초의 자주적인 최초의 협동조합은 1919년 강계의 공익조합을 제시한다. 동아일보 1932년에는 '전조선협동조합조사' 결과가 나오는데, 조사결과는 전국에 97개 협동조합, 조합원 4만명, 조합자금 42만원, 소비조합 73개(함상훈 조사로는 290개)였다.
해방 후 처음 협동조합은 1958년 충남 홍성군 홍동면에서 설립된 풀무학교의 선생과 학생들이 추진한 풀무신협과 풀무생협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소비조합 구판장도 개설했다.
YMCA는 일제시대부터 20세기 말까지 단절적인 과정 속에서도 협동조합운동의 맥을 이어오는데 크게 기여했다. YMCA는 1927년부터 국민고등학교 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하였고, 계몽과 농촌개혁, 소농 지원에 중점을 두었다. 원산 YMCA 등 일부 지역에서는 본격적으로 생협을 추진하였는데, 1932년 기준으로 65개 조합에 자본금 11,237원이었다. YMCA의 협동조합 역시 193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 되었다. 그 후 1972년 광주 YMCA가 신용협동조합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재개하였는데, 주로 신협, 양곡조합, 축산협동반, 신용계, 농민회를 설립하였고 농협의 민주화와 농산물 수입개방 반대, 양담배 판매 금지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97년 외환위기시 90% 가까이 해체되었다.
이 책에는 이러한 배경과 함께 그 동안 한국 생협 운동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도 다루었다. 지역 사회에서 협동조합을 만들려고 노력했던 여성들의 움직임,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그리고 도시빈민 운동에서 소비조합과 의료협동조합 운동을 어떻게 추진했었는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홍성과 원주 지역에서 진행하고 있는 협동조합 운동(생협 중심으로)과 협동교육연구원의 역할 그리고 정권의 탄압으로 사라진 양서협동조합운동 등도 언급하고 있다.
충남 홍성지역은 생협운동의 전통이 강하다. 남강 이승훈이 1907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용동촌에 오산학교 설립하였고, 고당 조만식은 세 차례 오산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1920년 200명 규모의 조선물산장려회, 1933년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였다. 밝맑 이찬갑은 오산학교 재학 중 자치조직인 용동 자면회 조직, 1928년과 1938년 일본 도쿄와 치바현, 시즈오카를 방문하여 소비조합 연구한 후 귀국하여 오산 소비조합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찬갑은 1948년 북한의 토지몰수와 종교박해를 피해 충남 홍성군 홍동면으로 월남하여 1958년 풀무고등공민학교 설립하고, 1959년 교사와 학생으로 협동조합 형태의 구매부를 설치했다가 1969년 정식 소비조합을 발족시켰다. 1972년 풀무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고, 1980년 풀무소비자 협동조힙으로 재발족한 후, 1999년 생협법 시행으로 풀무생횔협동조합으로 재창립하여 2006년 현재 조합원 957명, 출자금 3억5천만원, 자산 25억원 규모가 되었다.
노동조합에서도 개별적, 집단적으로 소비자 협동조합 운동을 진행했는데, 1959년 대성목재 노동조합이 소비조합 점포를 개설한 것이 최초라 할 수 있다. 1961년 상업은행 노조가 구내매점 개설(조합원 6,579명 출자금 1천만원), 1962년 제일은행과 국민은행 노조가 뒤를 이었고 1963년 금융기관소비조합연합회를 결성하였다. 한국노총은 1981~1987년 협동조합본부를 운영하였는데, 1987년 전두환의 하사금으로 혼수품샌터 개설하고 소비조합 사업을 소비자협동조합연합회로 전면 이관, 1989년 노동복지사업본부 구성하였다가 1989년 이후 소비자협동조합연합회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이후 개별 소비자 조합은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에 의한 회유와 탄압, 자체 부패로 소멸되었다. 1981년 조사 결과, 한국노총 산하에는 전체 1,696개 단위 노조 2,539개 지부 중 2,055개 조사 대상, 837개 조합이 응답 41% 응답율, 380개 조합에서 구판장이나 매장 존재, 그 중 노조 소비조합 운영이 92개, 신협 또는 새마을금고가 145개, 회사 운영 76개, 개인 운영 67개로 조사되었다.
이 책은 도시산업선교회와 협동조합연구원에 대해 재평가했다. 1960년대 이후 영등포, 인천, 청주, 울산 산업선교회가 협동조합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특히 영등포 산업선교회는 1964년 조지송 목사 부임 후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1968년부터 노동자들 중심의 폐타이어 재생공장 설립, 주택협동조합 추진(9세대), '영등포산업개발신용협동조합' 설립하여 '다람쥐회'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왔다. 또한 1976년부터 공동구매조합 활동을 시작하여 2004년 창립한 '서로살림상활협동조합'으로 이어졌다.
협동조합연구원은 카톨릭 메리놀회 소속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가 1952년 부산 메리놀 병원에서 구호사업 실시하면서 시작되었는 바, 1957년 캐나다 프란시스 세비어 대학 부설 코디 국제대학원에서 연수받은 후 귀국하여 1960년 5월에 27명으로 성가신용협동조합 설립했다. 1962년 협동조합교도봉사회 구성하여 강습회를 실시하다가 1963년 서울로 이전하며 협동조합연구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운영하였다. 1964년 동교동에 건물 신축하고 전국신협 대표 51명이 모여 한국신용협동조합연합회를 설립하였다. 1965년부터 협동조합 일반에 대한 교육과 조사도 병행하여 1972년부터 3년간 거제도 실험을 실시하기도 했고, 1977년까지 교육과정 수료자가 40,091명에 달하였다. 1981년 신협중앙회 연수원이 준공되면서 교육 수요가 격감하여 1996년 폐쇄되었다.
연구소는 현재와 같은 생협이 출현한 배경으로 1980년내 정치적 변화(87년 6월 항쟁 이후 다양한 이해관계 분출과 조직 구성)와 경제적 변화(물가상승, 노동자 대투쟁 후 실질임금 상승), 그리고 농가경제의 변화(저곡가 등 농업의 정책적 위축, 수입개방, 먹거리 안정성)를 지적한다. 이에 따라 80년대에 다양한 경로의 생협이 출현하는데, 한살림 생협은 신협의 농산물 직거래 활동에서 기원하였고, 한살림생협과 두레생협은 농민운동과 협동조합 운동에서 기원하였으며, 여성민우회 생협은 시민단체 활동에서 기원, 아이쿱생협은 민중운동 진영이 지역운동으로 전환한 경우이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두레와 계, 향약, 향도, 접과 도 등에 대한 연구결과도 궁금하다. 갑오동학혁명의 전개과정을 얼핏 돌이켜 보면, 그 때 당시의 기술 발전 수준으로 그렇게 많은 인원이 신속하게 결집하고 움직이면서 일본군이나 관군과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조직적인 비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2012년 12월 0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