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없는 방 - 삼성반도체 공장의 비밀 평화 발자국 10
김성희 글.그림 / 보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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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인생이 '인연'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실감날 때가 많다. 내가 매달 후원하는 단체 중 하나는 '나눔문화연구소(www.nanum.com)'이라는 비영리 시민단체가 있다. 정부나 대기업의 협찬을 받지 않고, 언론에 홍보하지 않으면서 '생명, 평화,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는 소규모 단체다. 재작년부터 박노해 시인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통해 알게된 후 매달 조금씩 후원하고 있고, 봄 가을에 실시되는 '평화나눔아카데미'라는 강좌도 신청하여 강연을 듣곤 한다. 몇 주 전에 그 아카데미에서 '나는 건강하게 일할 권리가 있다'라는 제목으로 공유정옥씨의 강연을 들었다. 공유정옥씨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라는 단체에 주요 참여자 중 한 명이다. 공유정옥씨를 통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백혈병과 관련한 비밀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물론, 나눔문화 홈페이지에는 몇 년 전부터 연구원이나 대학생들이 삼성전자 백혈병 인정을 위해 꾸준히 일인시위도 하는 등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게을러서 '그런가 보다'하고 자세하게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런데 공유정옥씨로부터 직접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노동자들이 어떻게 대우받고 백혈병에 걸렸으며, 회사 경영진과 관리자들이 어떤 식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는 지 들었을 때, 내 감정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강연을 받고 그 자리에서 서울행정법원의 산재 인정 탄원서에 서명을 했고, 더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알리기 위해 이 책과 <사람 냄새>를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두 권의 만화책은 삼성 백혈병에 대해 '두 개의 시선'을 보여준다.

 

올해(2012년) 3월까지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http://cafe.daum.net/samsunglabor)’에 제보된 반도체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자 수는 155명이고, 그 가운데 이미 사망한 사람은 62명이라고 한다. 삼성전자, 삼성전기, 삼성SDI 등 삼성에서 일하다 직업병을 얻은 이는 138명에 이른다. 하지만 삼성은 이들의 병이 회사와 아무 관계가 없는 개인 질병이라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의 산업재해를 적극적으로 찾아 그 피해를 밝혀내고, 재해에 처한 노동자들에게 보험금을 지급하고, 재해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감독하고 관리해야 하는 근로복지공단은 무기력하게 방관만 했다. 공단은 몇 년 동안 반도체 공장 직업병 피해자들의 산업재해 승인을 하지 않고 있다가 지난 4월 10일 처음으로 반도체공장 직업병에 대해 산재 승인을 했다.
전자산업 분야의 직업병 문제를 세상에 처음 알린 이는 택시 기사 황상기 씨다. 그리고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11년 동안 일해왔던 정애정 씨도 이 싸움에 함께 하고 있다. 황상기 씨의 딸 황유미씨는 백혈병에 걸려 병원으로 이송 중 아버지가 몰던 택시 뒷좌석에서 숨을 거뒀다. 황유미씨의 그 때 나이가 꽃다운 나이 23세였다. 정애정 씨의 남편 황민웅 씨 역시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둘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을 했다는 점이다. 정말 삼성의 말대로 이들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 질병일까?
 
이 만화책은 삼성이 가리고 싶어 하는 백혈병의 진실을 파헤친다. '청정산업'이자 한국의 '미래산업'으로 홍보되는 반도체 산업. 한국 내 제조업 중에서 노동자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고 있다고 알려진 삼성전자. 불법 비자금과 정관계 뇌물 로비, 그리고 불법 경영권 승계로 얼룩진 삼성전자 이건희 일가와 가신들의 부정부패는 끝이 아니었다. 노동조합 설립을 방해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도청하고 납치하고 협박하는 삼성전자의 경영진과 하수인들이 과연 반도체 공장에서는 인간적으로, 합리적으로 사업을 운영하고 있을까?
 
정애정씨는 삼성반도체 공장에 들어가 처음으로 반도체를 만났다. 기름때와 어두운 색깔의 작업복으로 생각되는 일반적인 공장과는 달리, 반도체 공장에서는 티끌 같은 먼지 하나도 철저하게 관리한다. 하얀색 방진복과 방진모, 마스크를 쓰고 ‘에어 샤워’까지 한다. 공장 안은 특수 배기시스템을 통해 먼지가 걸러진 공기가 흐른다. 공장 안에서는 모든 것이 깨끗해야 한다. 먼지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람도, 물건도 공장의 청정수칙에 따라 다뤄진다. 반도체는 먼지에 아주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반도체 공장을 '클린룸이라 부른다. 그러나 정말 깨끗할까? 큰 설비와 수많은 기계에서는 기계 소리가 계속 났다. 공장 안에 들어서면 항상 화학약품 냄새가 났다. 직원들 사이에서 누구는 아들을 못 갖는다는 둥 뜬소문이 돌았다. 여성 작업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생리불순이나, 하혈은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생기는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 심지어 종종 들리는 유산 소식도 단순한 개인의 문제로 돌려졌다. 그 누구도 공장의 환경이 반도체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깨끗한지 묻지 않았다.

 

삼성전자에서 근무했던 정애정씨는 삼성에서 남편을 잃었다. "내 고막이 터지도록 고래고래 소릴 지르고 있었습니다. 삼성에 희망을 걸고 내 꿈을 키운 대가 치곤너무 무섭다고. 난 그렇게 죽어라 일한 죄밖에 없다고." 정애정 씨는 열아홉 살에 삼성반도체 공장에 들어갔다. 엄마 품을 떠나 독립을 했다는 것이 좋았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삼성에 입사한 것도 좋았다. 삼성맨이라는 자부심으로 열심히 일을 했고, 그곳에서 남편 황민웅 씨를 만났다. 첫째아이로 아들을 낳고 둘째아이를 가졌을 즈음에 남편이 백혈병에 걸렸다는 걸 알았다. 남편은 둘째아이의 출생신고를 손수 마치고 골수이식 수술을 기다리다 끝내 세상을 떠났다.
애정씨는 남편 없이 아이 둘을 혼자서 키우기 위해 11년 동안 일했던 반도체 공장을 그만뒀다. 아이들에게는 아빠가 해외에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병이 공장의 근무 환경 때문일 수도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남편이 죽은 진짜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고 황유미 씨 아버지인 황상기 씨의 문제 제기로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싸움을 처음 시작할 때는 아무도 삼성을 이기지 못할 거라고 말을 했지만, 5년이 지난 지금 무재해 사업장 삼성을 상대로 첫 산재 승인을 이끌어냈다.(현재 근로복지공단은 어처구니 없게도 삼성측의 도움을 받아 서울행정법원에 항소를 한 상태다. 며칠 전인 11월 초에 항소심 판결을 앞두고 법원은 대통령 선거 뒤인 12월 27일로 판결을 연기했다. 삼성의 장학생이 드글드글한 법원, 그리고 헌법과 법률과 양심과 이성 보다 승진과 상사와 권력과 자본에 더 약한 한국 사법부의 현실은 까마득하다.)

 

이 책은 유명 작가의 만화책은 아니지만, 어느 장면 하나도 쉽게 넘길 수 없는 무게감이 있다. 작가는 비록 이 책이 얇은 만화일 뿐이지만, 불편한 진실을 펼쳐 보이는 묵직한 역사가 될 것이라 믿으며 장면 하나하나에 온 마음을 담아 그렸다.
김성희 작가는 자료조사 더불어 끊임 없는 현장 노동자들에 대한 취재를 통해 한 번도 제대로 공개된 적 없는 반도체 공장을 만화로 그려 냈다.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전자제품에 필수로 들어가는 반도체가 무엇인지, 그 반도체는 어떤 환경에서, 어떤 노동을 통해 만들어지는지 이 책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어느 한 기업을 질책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전자산업 현장 노동자들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는 한 기업을 나쁜 기업으로 매도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도체를 모르는 일반 독자들에게 이 문제를 알리는 것과 더불어, 반도체 공장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해와 연대를 구하는 것도 이 책이 가지는 큰 의미 중 하나다.
 
[ 2012년 11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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