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정치다 - 이헌재의 경제특강
이헌재 지음 / 로도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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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헌재는 전형적인 한국의 엘리트 관료 출신이다. 60년대 '명문고'로서 고교 입시전쟁을 불러온 경기고 출신이자 한국 학벌주의의 본산인 서울대 출신이며, 그 중 가장 엘리트독점이 심한 법대 출신이다. 그리고 보스턴 대학원에서 경제학과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을 거친 전형적인 미국파 관료라 할 수 있다. 60년대 말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엘리트 관료로 발을 내딛었으며 엘리트 공직생활을 거쳤다. 재무부 재정금융 심의관, 국민의정부에서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실무기획단장,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 재정경제부 장관을 거쳐 참여정부에서는 2005년 3월까지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을 지냈다. 그는 실물경제에서 경험도 했다. 80~90년대에 대우그룹에서 대표이사를, 한국신용평가에서 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경제분야 종사자들로부터 '모피아의 대부'로 불린다. '모피아'란 재무부와 재정경제부 출신 인사를 지칭하는 말로 재무부 (MOF, Ministry of Finance : 현 기획재정부)와 마피아(Mafia)의 합성어이다. 재무부 출신의 인사들이 정계, 금융계 등으로 진출해 산하 기관들을 장악하며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주면서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MOF와 마피아의 발음이 비슷하여 마피아에 빗대어 부르는 모피아라는 말이 등장하였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70년대 경제정책을 실무적으로 수행했고, 경제관료로서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IMF 구제금융 조건을 앞장 서서 이행했을 것이고, 참여정부에서 동북아 금융허브와 금융자유화, 부동산 거품의 급증, 공기업 민영화, 재벌우대정책, 비정규직 양산, 부자 감세에 기여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식 신자유주의 정책을 한국에 도입하여 이식한 실무책임 관료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인물이 최근에 발간한 책을 읽는 이유는 안철수 후보 때문이다. 지난 9월 안철수 후보가 이헌재씨를 경제멘토로 대선 캠프에 합류시킨다는 기사를 접한 직후였다. 안철수 후보가 지난 7월 출간한 <안철수의 생각>을 읽어 보면, 안 후보는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와 재벌중심 경제구조, 금융자유화와 비정규직 양산에 대해 단호히 반대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안 후보가 저자를 영입한 것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저자에게 무슨 '양심의 변화'나 '철학의 대혁명'이 있었던 것일까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이 책은 9월에 발간된 것이지만, 주요 내용은 2011년 하반기에 저자가 특강한 내용을 중심이다. 책을 덮으면서 내 궁금증이 참 허망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칠순에 가까운 이헌재씨의 철학이나 생각이 바뀔리가 없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었던 내 자신이 한심했다. 아마도 안철수 후보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지지가 나에게 그런 생각을 품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책의 머리말에 "공직에 있는 동안 제대로 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아쉬움도 남지만 미련이나 후회는 없다"고 잘라서 말했다. 이 말은 군사정부 10년과 민주정부 10년 동안 엘리트 관료로서 자신이 정부에서 담당했던 경제정책이 좋은 결실을 맺었고, 그런 정책으로 인한 수 십년 간의 중산층,서민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으로 들린다.
그런 저자는 엉뚱하게도 '과거 시스템'의 종말을 말한다. 현재의 한국사회가 '정부 주도의 경제 정책, 일사불란한 실행, 토론 없는 문화'와 '노인의 시대'가 이어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사회의 중심세력이어야 할 40~50대는 60,70대에 눌려 기회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채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낡은 세력은 곳곳에서 변화와 발전의 질곡이 되고 있다"라고 진단합니다. 그는 이런 주장을 직접 자신을 겨냥해서 책의 본문에서 다시 꺼낸다. "새 인재들이 새 시대에 맞는 가치관을 펼칠 수 있도록 과거의 주역들은 길을 내줘야 한다. 어쩌면 이번을 마지막으로 한꺼번에 퇴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 변화의 물결에 쓸려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쓸려 가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치다가는 익사하기 딱 좋은 것이 시대의 흐름이다."(p.131) 이런 의견은 이 책에서 몇 개 안되는 '인정할 만한 주장'이었다.
이렇게 말했던 그가 몇 주만에 안철수 캠프에 합류했다. 안철수 후보가 영입한 것인지, 아니면 본인이 자신이 책에 밝힌 생각을 잊어버린채 찾아갔는지, 안철수 캠프에 들어가기 위해 급하게 이 책을 발간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책을 읽고서 이헌재씨가 "참 두서없는 사람이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미국에서 대학원까지 다녔고 정부에서 20년 넘게 경제관료를 엮임한 사람임에도 제대로 된 철학도, 이론도, 정책도, 계획도, 비전도 읽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여기저기서 짜집기한 듯한 단어와 개념과 사례만 나열하고 있다.
공정한 시스템을 말하지만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재벌과 대기업에 대한 비판은 책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머리말에서부터 '창조경제' '창의기업' '열린사회'를 제시하지만 제대로 된 내용은 발견할 수 없다. 책 속에서 서로 논리적 연관성도 없는 공정한 시장질서, 도전 정신, 혁신경제, 창의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안철수 후보의 <안철수의 생각>을 읽고 베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관료의 사례를 접하면 과거 임창렬 부총리의 경우 처럼 한국의 '엘리트 관료'가 얼마나 허약하고 무능하고 무책임한 것인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객관식 사지선다형 문제에 강한 엘리트,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동료와의 경쟁에서 앞서는 엘리트, 창조성보다 출제자의 의도에 따른 정답을 먼저 찾는 엘리트, 자신이 뛰어나다는 착각, 권한의 남용하고 책임은 지지 않는 엘리트, 오만과 무능...
 
그리고 그에게는 특이하게도 80~90년대가 '잃어버린 시간'인 것 같다. '60년대식 경제체제'를 말하면서 바로 건너뛰어 2012년을 이야기한다. 그에게는 '87년 체제'도 없다. 87년 이후 군사체제의 청산과 문민정부의 등장, 경제권력과 언론권력의 부상, 개방체제, 금융자유화 등에 대한 진단이나 평가없이 한국이 60년대 체제를 최근까지 지속해 온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서 제대로된 현재 사회경제체제에 대한 평가와 대안이 나올리 만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는 자신이 담당한 업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과거에 잘하든 잘못하든 간에 정부운영과 정책이 존재한다면 자신이 담당했던 구체적인 정책사안을 통해 밝여햐 하는데 몇 개 정도 언급되지만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고 지나간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마치 국민의정부나 참여정부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듯한 태도다.
자신이 "미련이나 후회는 없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다시 꺼내어 평가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 그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제시하는 사례는 60~70년대 국내사례와 이명박 정부정책, 그리고 해외사례 일 뿐이다. 이명박 경제체제가 문민정부와 민주정부 15년 동안의 과정에서 이어지고 자리잡힌 체제라는 것을 모르는지, 무시하는지 알 길이 없다.
 
아무튼, 이헌재씨의 '경제특강'은 독자들이 읽고서 도움이 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말짱 황'이다. 그에게서는 따뜻한 가슴도, 뜨거운 열정도, 냉철한 이성도, 현명한 비전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모피아의 대부로서 금융기관과 경제부처, 대기업과 연구소에 잔뜩 포진되어 있는 '이헌재 사단'의 상징으로서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나마 이 책을 통해 얻은 소득이 있다면, 그것은 '모피아의 대부'마저 겉으로나마 시장만능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는 사실이다. 20년 가까이 자본주의 변방 한국에서 마지막 위력을 떨치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비로서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왜 이런 사람을 안철수 원장이 경제정책의 멘토로 삼고 중용했는지 더 궁금해졌다...ㅠㅠ 그는 자신의 말대로 벌써 '퇴장'했어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만간 안철수 후보가 정책과 공약을 발표할 것이다. 부디 이 책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났으면 좋겠다.

[ 2012년 10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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