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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학력 학벌주의
이정규 지음 / 집문당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한국사회 전 부분에서 갈수록 '불공정'과 '불평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불공정'과 '불평등'은 특히 경제와 사회문화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불공정'과 '불평등'은 쉽게 '차별'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경제분야에서의 불공정과 불평등의 재벌과 대기업에 대한 정부의 특혜,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 생산자 및 공급자의 소비자에 대한 불공정 거래, 조세 및 재정에서의 불균형,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빈부격차의 심화로 나타난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이슈가 되는 분야도 경제문제다.
사회문화 분야에서의 불공정과 불평등도 만만치 않다. 수도권과 지방간의 불평등, 대도시와 중소도시간의 불평등, 국세와 지방세의 불평등, 지방자치제도의 미흡함, 전문가 집단의 일반직종에 대한 불공정과 불평등, 학력차별과 성차별, 장애인에 대한 차별, 지방대 및 지방 출신에 대한 차별, 지역주의에 근거한 차별, 학벌만능주의에 따른 차별과 대학서열체제 등이 문제다.
그렇다면 학력과 학벌은 어떤 역할이나 기능을 하고 있는가? 저자는 머리말에서 "한국사회에서 학력과 학벌은 개인의 삶의 기회 선택 뿐 아니라 개인가 집단의 사회적, 경제적 특권과 지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고, "학력과 학벌은 우리사회 불평등의 핵심 요인이자 공교육 위기와 혼란의 근원으로 질타의 표적"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학력과 학벌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인류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동의하는 가치가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 공평하고 평등한 사회, 안락하고 행복한 사회라 한다면, 이러한 사회를 유지하고 가능하게 하는 요소 중 하나가 '기회의 균등'이다. '기회의 균등'에서의 핵심 요소는 '동일한 출발선'이라 할 수 있는데, 정치경제적 지위와 능력을 이용하거나 학력과 학벌을 이용하여 출발선이 다르게 된다면 기회의 균등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21세기의 시대정신 중 하나가 공정과 공평이라면, 경제민주화와 더불어 학력,학벌주의의 청산 역시 사회 전체적으로 힘을 쏟아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라 할 수 있다.
언론에서 다루는 사회문제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직도 많은 이들이 학력주의나 학벌주의에 대해 심각성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를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면, 언론이나 여론을 주도하는 중산층들이 대부분 대학 이상의 학력과 서울대, 연대, 고대 이상의 학벌을 가지고 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초중고생을 아이로 둔 학부모 중에서 학력이 전문대졸 이하인 경우, 오히려 학부모들이 학력주의나 학벌주의에 심취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소득과 자산이 학력이나 학벌 때문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산직이나 서비스직, 비정규직이나 영세상공인의 경우 언론이나 여론을 형성할 자신감과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학력, 학벌주의에 직접적인 희생자인 아이들과 학생들은 직접 주체가 되기 어려운 성장시기이며, 대학입시전쟁 이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는 가족, 학교, 사회적인 조건이 작용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1987년 이후 사회가 민주화되었다는 인식 아래에서 방향성을 상실한 사람들이 '성공'과 '부자'를 향해 각개약진 방식으로 흩어졌다. 그 이후 약 25년간 사회 전체를 '승자독식 무한경쟁 사회'가 지배해 버렸다. 개인들의 이러한 인식과 행동에는 정부와 기득권층, 여론주도층의 이데올로기 분위기도 한 몫 거들었다. 쉽게 예들들어 TV와 라디오, 신문과 출판물에서는 "부자되세요~"라는 말이 전혀 아무런 거부감 없이, 비판 없이 전파되고 받아들여졌다. 처세술과 자기계발, 경쟁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사회에서 학력과 학벌의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학력과 학벌이 우리의 문화사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되었는지 분석한다. 그는 한국의 역사문화적인 관점에서 학력주의와 학벌주의의 형성과정과 동인을 추적하여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여기서 저자는 '학력주의'란 "학력의 실질적인 가치보다는 상징적인 가치가 능력과 실력으로 간주되어 과도하게 중시되는 관행과 경향"으로, 학벌(만능)주의란 "학연에 바탕을 두고 파벌을 이루어 정치적 파당이나 붕당, 사회경제적 독과점, 문화적 편견과 갈등 및 소외를 야기하는 관행이나 경향"으로 정의한다.
이 책은 학력과 학벌, 학력주의와 학벌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저서로서는 두 번째다. 김상봉 교수의 <학벌사회 : 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2004, 한길사)는 학력과 학연, 학벌(주의)를 철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저서였다. 참고로 강준만 교수의 <입시전쟁잔혹사>는 조선 후기 이후의 과거제도와 교육제도, 그리고 입시제도를 분석한 것이다.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학력, 학벌주의가 발생된 시점을 고려 초기 광종이 실시한 '과거제도'로 삼는다. 광종은 "당시 왕권을 위협하던 공신과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 내지는 억제함은 물론, 왕권을 강화하고 군주에 충복할 수 있는 인재를 관리로 선발, 채용하기 위하여 과거제도를 실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학력의 가치는 과거를 통하여 관직을 획득하는 것에 그 극대점을 두었다"고 분석한다.
그는 조선시대를 '학력주의와 학벌주의의 발육기'로 규정한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왕권의 강화를 위한 관리 선발의 수단일 뿐 아니라 양반집단의 세력 신장을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시대는 유생양반을 중심으로 당파가 성행하였다. "학연과 파벌로 이루어진 당파 혹은 붕당은 현대판 학벌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말 개화기 및 일제시대는 '학력주의와 학벌주의의 태동기'였다. 조선말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도와 과거제도가 철폐되었으며, 신분에 관계 없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학교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구양반 계층은 관학교육기관에서, 상민이나 평민계층은 선교사들이 세운 사립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제국주의는 한반도의 식민 통치와 더불어 학력의 제도화를 구축하였다. 일제의 학력의 제도화는 식민통치를 위한 수단이었으며, 당시 관공립 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대부분 구양반 계층이었다. 그리고 일제의 관공립 학교를 졸업한 이들이 사회 주요 분야의 요직을 차지했고, 이러한 위치는 해방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저자는 미군정기 및 대한민국 시대를 '학력주의와 학벌주의의 형성,정착기'로 규정한다. 특히 미군정이 재기용한 대부분의 고위공직자들은 "일제하에서 고학력과 학벌을 통하여 사회경제적 지위와 이익을 획득하였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는 "현대 한국사회의 학벌주의의 뿌리는 일제시대에 그 연원을 두고 있으나 학벌주의의 발동은 미군정시대에 그 기회를 맞게 되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이 시기에 학력주의를 강화시키고 학력의 가치를 극대화시킨 주요 요인들은 "분단국가로서의 정치 상황, 피폐한 경제 현실, 미비한 제반 사회제도, 전통문화와 식민문화의 유산, 공교육체제 강화, 국민의 교육열 등의 복합적 요소에 기인"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저자는 1990년대~2000년대 정부 및 공공기관 등의 자료를 토대로 학력과 학벌의 가치, 흐름, 격차 등을 분석한다. 그는 학력별 공무원 합격자, 학력별 직종별 취업자 수, 학력에 따른 산업별 종사자 수, 연도별 학력별 임금격차, 직종별 평균임금 격차, 산업별 학력별 임금격차 등의 데이터를 통해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학력은 "사회지위 이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직업 선택뿐만 아니라 임금 수준을 결정하는 합리적인 기제로 인식되어, 더욱 더 높고 나은 사회경제적 보상을 위해 학력의 종,횡적 분화와 경쟁의 심화를 초래"하고 있음을 밝힌다. 이런 흐름은 고학력 경쟁이 유발되고 학력 인플레이션이 진행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또한 출세주의에서 파생된 현재의 서울대를 정점으로 여타 몇몇 출신대학을 위주로 한 학벌주의 역시 심화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오늘날 준신분화되고 있는 학벌주의는 업적주의 내지 능력주의에 기인한 학력의 순기능보다도 형식주의 혹은 명목주의에 기인한 역기능을 우리사회에 파급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단 한 번의 대학입시 결과에 의하여 개인의 학력만을 검정받은 후에, 그 결과 학연에 근거한 학벌주의에 의하여 일생동안의 삶에 프리미엄을 얻어 자신의 개인적 영달과 영화를 위해서 소아적인 지식인으로서의 길을 간다면, 그것은 이생에 있어서 개인의 능력에 대한 보상의 평가방법과 과정이 불합리하고 불공평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지식인은 사회공익성을 위하는 진정한 엘리트가 아닌 소위 출세지향적이며 기회주의적인 '기능적 지식인'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p.160)
"이미 학력은 사회평등화의 기제로서의 순기능보다 사회불평등을 조장하는 역기능의 도구로 전환되었으며, 학벌은 공공의 복지와 행복을 위한 엘리트의 상징성보다는 개인의 영달과 동류 집단의 이익추구를 위한 '소아적 식자(識者)의 간판'으로 전락되었다고 볼 수 있다.(p.167)
저자가 학력주의와 학벌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제시하는 정책 방안은 기존 연구자들과 대체로 비슷하다. 따라서 여기에서 또 다시 열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가치는 현대 한국사회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인 학력주의와 학벌주의가 제도교육이 정착된 해방 이전에, 즉 과거제도가 시행되기 시작한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역사적, 문화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학력주의와 학벌주의라는 불평등 의식과 문화가 한국인들의 문화적 유전자에 뿌리 깊게 박혀있다는 의미다.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은 아니지만, 어떤 문제인지 아는 것부터 해결은 시작되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제부터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모두가 인식하고 나서야 할 것이다. 학력주의와 학벌주의로부터 피해를 받는 이들뿐 아니라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고 있는 서울대, 연고대 출신들 역시 책임을 통감하고 나서야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 2012년 9월 3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