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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시원한 글쓰기
오도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8월
평점 :
글 쓰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굳이 시나 소설처럼 문학작품이 아니더라도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글 한 줄 쓰기는 어렵다. 그래서 페이스북의 담벼락 글이나 트위터의 기발한 140자 글을 읽다보면 주눅들 때도 많다. 하물며 기자들의 기사, 정치인들의 발표문, 변호사들의 변론글, 작가들의 작품, 고전작품을 생각하면 기가 질리기도 하다. 글 쓰기는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글 쓰기는 글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만이 가능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한글이 어떻게 세상에 나왔을까 생각해보자. 한글이 대중들에게 베포되기 전에는 중국의 한자가 조선 사회의 유일한 글이었다. 당연히 사대부와 양반들만이 글을 사용했고, 백성들은 글에서 소외된 채 착취받고 고통받기만 하였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도구가 없었다. 역사시간에 배운대로만 말하면, 세종대왕이 약670년 전에 백성들의 어려움을 '어엿비 너겨' 집현전 학자들과 한글을 만든 것이다. 이제 한국인들은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누구나 글을 읽고 쓰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글을 써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글을 써보지 않았을까?
한국인이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초등학교 입학 전후에 시작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일기도 쓰고 작문도 한다. 그런데 국가가 주도하는 제도교육 12년과 대학교육 4년을 경과해서도 사람들은 글 쓰기를 두려워 한다. 교과서나 교육 취지만 고려하면 중학교만 나왔어도 글쓰기는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중졸이든 고졸이든 대졸이든 모두가 어려워 한다. 왜 그럴까?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첫번째는 제도교육 12년이나 대학교육 4년 동안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쉽고 자유롭게 펼치고 서로 나누고 배우도록 하지 않고 학교가 제도교육의 틀에 맞추어 가르치기 때문이다. 특히 성적 위주, 시험 위주, 대학입시 위주로 이루어지는 학교 교육은 아이들에게서 말과 글을 빼앗아 갔다. 심지어 논술마저도 대학입시에 맞추어 성적이 나올 수 있는 논술을 가르치고 있으니 오죽할까 싶기도 하다. SNS상에서 자주 목격하는 욕설과 비방은 무섭기까지 하다. 이념을 떠나 정치적 적대관계를 떠나 세상과 사람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 테두리에 가두어 놓고 배설하는 욕설은 민망하기 그지 없다.
두번째는 글쓰기의 상품화와 독점화다. 이놈의 자본주의 사회는 무엇이든지 상품화한다. 무엇이든지 상품가치를 매기고 그에 따라 차별을 부추긴다. 소위 전문가라는 작자들이 이상한 기준과 수준을 설정해 놓고 자신들의 잣대에 맞으면 상품화를 부추기고 조금이라도 다르면 폄하하고 비하한다. 글의 내용과 진심을 보려하지 않고 6하 원칙이니 문법과 상징을 들이댄다. 그렇게 글쓰기를 밥벌이로 하는 자들이 글쓰기를 독점해 버렸다. 언론이나 인터넷 포탈, 논문지나 잡지마저도 엘리트나 유명인들의 글만을 모아놓고 마치 그런 글들이 최고인양 장벽을 친다. 그렇기 때문에 중학교 출신도, 대학 출신도 글쓰기에 주눅이 들고, 16년이라는 시간과 돈과 노력을 투입한 다음에도 여기 저기를 찾아다니면서 글쓰기 강좌에 다시 등록한다. 이게 무슨 낭비인지... 그런 사회적인 현실은 글쓰기가 학력이나 직업, 자산이나 소득에 따라 자연스럽게 차별이 이루어진다.
한국사회의 많은 부분이 그렇듯이 글쓰기라는 표현행위도 분위기 상으로는 많이 대중화되었다. 글쓰기라는 행위가 보편화 되었다기 보다 '글쓰기에 특별한 계급이나 자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보편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신, 그런 보편화는 기존 구조에 의해 또 다른 상품화를 가져온다. 유명인들이 어떤 책을 읽었는지, 어떻게 글을 잘 쓰게 되었는지, 어떻게 글을 쓸 것인지에 대한 교재나 강습이 광범위하게 생겨났다. 하지만 스스로의 필요성과 자질을 토대로 자신의 글쓰기를 유도하지 않는 대부분의 글쓰기 교재나 교양강좌는 '상품화' 내지 '밥벌이'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런 현실에서 이 책은 의미가 크다. 저자가 애기하는 글쓰기는 우리가 기억하는 '작문'이나 '논술'과는 차원이 다르다. 기존 학계나 전문가가 말하는 '작문법' 같은 것이 애초에 필요 없다. 저자는 보통 사람들처럼 시가 뭔지도 모르고 시인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하여 오랫동안 좌충우돌하던 자신의 경험에서부터 청소년, 농민,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글쓰기 수업을 하며 마주쳤던 어려움을 정감 있는 말투로 풀어놓는다. ‘글’이라고 하면 왠지 어렵게 느껴진다. ‘말’은 곧잘 하면서도 ‘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게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글이라면 말과 달리 뭔가 좀 그럴듯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바로 이런 생각을 깨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글을 쓰려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사람, 쓰고 싶은 이야기는 넘치는데 펜을 잡으면 손가락이 딱 굳어버리는 사람, 먹고살기도 바쁜데 무슨 글쓰기냐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들의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줄 ‘속 시원한 글쓰기’의 세계를 제시한다.
저자가 말하는 글쓰기의 핵심은 "자신을, 꾸미지 말고, 거침없이 토해내라"다.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내 행동, 내 생각, 내 모습을 그대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좀 더 멋지게 꾸미고 싶은 마음에, 잘 알지도 못하는 성인군자나 유명학자의 말을 인용하거나 이런저런 비유를 끌어와 표현을 부풀리곤 한다. 내가 진짜로 느낀 것도 아닌데 마치 그런 것처럼 써내려간다. 멋지게 꾸미고 싶은 마음은 그만 내려놓고,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에 집중하자는 게 저자의 조언이다. 자기가 아니면 그 누구도 쓸 수 없는 이야기가 있으니 말이다. 지구 위에서 사는 수 십억 사람 중에서 유일한 것은 내 생각과 느낌일 뿐이기 때문이다.
책에는 저자가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만난 수강생들의 글과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된 평범한 사람들의 글이 많이 인용되어 있다. 화려한 글이 아니라 그 자신이 아니었으면 하지 못했을 이야기를 솔직하게 적어낸 이런 글들을 보고 있으면 삶에서 우러나오는 글의 힘을 새삼 느끼게 된다. 더불어 누구나 좋은 글을 쓸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생긴다. 즉 ‘글이라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내 속에 있는 얘기를 옆의 친구에게 말하듯 그대로 글로 옮겨 보라.’ 이것이 글쓰기와 친해지는 첫 걸음이다.
"‘말과 달리 뭔가 좀 그럴듯해야 하고, 입에서 제멋대로 나오는 소리가 아닌 고상한 단어를 골라 써야 할 것 같다. 형식도 있어야 하고, 문법도 알아야 글을 쓰는 거 아닌가.’ 언뜻 들으면 맞는 말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여기선 이 말을 지겹도록 되풀이해 ‘씹을’ 것이다. 이 생각을 깨야 글쓰기는 골치 아프고 어려운 일이 아니란 걸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p.12)
그리고 "글을 쓸 때는 솔직하게, 쓰고 나선 뻔뻔하게"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솔직하게 글을 쓰는 데 성공했다면 이제 남에게 보여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글로 썼는데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그 글은 제 생명을 잃는다. 물론 남에게 보이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래서 조금은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고 이 책은 강조한다. 처음 한두 번이 어렵지 한번 뻔뻔해지면 그다음에는 쉽다는 것이다.
우선 주변 사람들에게 쓴 글을 보여주고 반응을 들어보라. 그냥 ‘좋네’ 하고 마는 사람들은 아마 제대로 안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냥 글만 휙 던져주지 말고, 쓴 글을 직접 읽어줘라. 옆에서 속삭이듯 읽다보면 스스로 입에 걸리는 부분도 나올 것이고 자기한테는 문제가 없지만 듣는 사람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대목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부분을 고쳐나가면 한결 좋은 글이 된다. 그래서 SNS에 올려 지인들의 생각과 의견을 겸허하게 듣거나, 서로 멘토가 될 수 있는 한 두명이 필요할 수도 있다.
글쓰기 선생으로서 저자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수업이나 주변에서 만난 평범한 사람들의 좋은 글을 신문사나 잡지사에 보내도록 끊임없이 독려한다. 일단 활자로 찍혀 나온 자기의 글을 경험하게 되면, 주변에서 말려도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글은 소통하려고 만들었다. 감추고 있으면 글이 제 생명을 잃는다. 남에게 보이는 일이 쉽지는 않다. 제 속살을 보이는 일과 같은데 어찌 쉽겠는가. 하지만 세상에 드러내야 글쓰기가 왜 즐겁고, 행복한지를 알 수 있다. 글쓰기의 참맛은 소통에 있다. 나는 뻔뻔함이 지나칠 정도다. 글 한 꼭지를 쓰면 온갖 호들갑을 떨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준다. 글 좀 쓰는 사람이 있으면 발목을 붙들고 귀찮게 한다."(p.64)
책의 후반부에서는 기사 쓰는 요령, 인터뷰하는 법 등을 소개한다. 시민기자나 르포작가가 될 수 있는 자신감을 불어넣는다. 샛길로 새고, 이렇다 할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마냥 침묵만 지키고 있었던 인터뷰도 멋진 취재의 일부라고 이야기한다. 실제 저자의 경험담과 그를 바탕으로 한 기사문으로 확인하고 나면, 독자들도 '나도 한번 해볼까?"라고 마음 먹을 수 있다.
이 책 속에 담겨있는 평범한 이들의 글은 몇 번이나 내 마음을 흔들었다. 유명학자나 기자들이 쓴 것보다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려운 글, 현란한 글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말해주는 글, 우리의 마음을 대시하는 글이 더 감동적인 이유다.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시 한 편이 있다. 노동자 시인인 박노해씨의 <이불을 꿰매면서>가 내 양심을 계속 찔렀다.
"이불호청을 꿰매면서
속옷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거지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 달라
물 달라
옷 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 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준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 근로자였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창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 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쳐지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족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짜꺼기를
배설해낸다
노동자는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호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 2012년 9월 26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