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거부하는 아이 아이를 거부하는 사회 - 입시문화의 정치 경제학
조한혜정 지음 / 또하나의문화 / 1996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1996년에 초판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내가 인터넷을 통해 구입한 것은 2011년에 출간한 것이다. 그만큼 여전히 이 책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려 15년이나 지났음에도 학생들의 교육현실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일까? 진보교육감이 들어서고 혁신학교가 운영되고 많은 이들의 노력이 경주되고 있음에도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일까?
 
나는 학생들을 무조건 학교나 학원에 붙잡아 놓으면 학생들이 공부할 것이라는 생각에 반대한다. 아이들은 바보가 아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쯤이면 나름 자신의 지혜와 생각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것이 생물학적 본능에 따른 것이든, 가정교육이나 매스컴, 다른 학습에 따른 것이든...
약간의 우연과 편차가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학생들을 아침 일찍, 또는 밤 늦게까지 붙잡아 놓고 공부하기를 강요한다고 하여 대부분의 경우 성적이 향상되지 않는다. 다른 어떤 인간의 활동도 그러하듯이 공부는, 학습은 스스로가 해야한다고 느껴야, 호기심과 재미와 흥미를 느껴야 시작할 수 있고 집중할 수 있다. 또 운동과 놀이와 여가와 휴식과 함께 적절하게 시간이 분배되어야 학습에도 집중할 수 있다.
따라서 학생들을 오랫동안 책상에 붙잡아 놓는 것으로는 그들의 공부를 강제할 수 없다. 오히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하고 싶지 않은 것을 강제함으로써 학생들의 반발과 저항감만을 키울 뿐이다. 부모나 교사들과의 소통만 어려워질 뿐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사회의 가정과 사회 현실을 돌아보면 학생들을 붙잡아두는 것 이외에 딱히 대안도 없다는 것이 더 비극이다. 저자가 책에서 "만약 야간학습을 없앤다면 가정과 사회는 이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고 나에게 묻는 듯이 말할 때 머리 속이 꽉 막혔다. 3시, 4시에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학생들에게 가정이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어려서부터 공부만 강조하던 부모가 학생들과 어떤 것을 '교육적으로' 할 수 있을까? 가정이 어렵다면 학교나 사회는 해 줄 수 있는 게 있을까? 학생들이 방과 후에 자신들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지원해줄 공간과 교재와 프로그램이 있는가? 학생들이 알아서 축구하는 것 말고, 당구치는 것 말고, PC방 가는 것 말고 무엇이 준비되어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당장에는 방법이 없다. 직장에서 빨라야 7시에 퇴근하는 부모의 경우, 또는 밤 늦게 퇴근하는 부모의 경우 가정에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학교도 사회도 정부도 대책이 없다. 아주 극히 일부의 학생만이 YMCA나 시민단체, 소모임에 참가할 수 있는 것 뿐이다. 그럼 나머지 학생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학생들을 정규 시간 이외의 추가 시간에 학교에 붙잡아 놓는 것에 반대한다. 차라리 학생들이 초저녁에 거리에서, 술집에서, 당구장에서, PC방에서 떼지어 몰려다니는 것이 사회문제가 되어 교육청이나 정부가 움직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학교와 교육청, 정부, 가업, 시민단체에서 준비를 하여 단계적으로 학생들의 시간과 공간과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학생들을 우리에 가두어 놓는 소나 닭처럼 대하면 그 학생들의 미래도, 우리사회의 미래도 암담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학생들, 청소년들의 문제를 교육제도나 학력,학벌주의 관점이 아니라 학생들이 직접 몸담고 있는 현실 속의 문화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 전인교육이나 바람직한 교육제도의 측면이 아니라 학생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감당하고 있는 모순적인 삶의 현장을 바라본다. 어른들이, 그들이 구성하고 있는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학생들에게 어떤 문화적 영향을 제공하고 있는지, 학생들이 가치관과 경험을 어떻게 형성해 나가는지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줄 것이다.

저자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진단하는 것은 입시제도와 그에 따른 학교,학생문화다. 저자는 우리 모두가 병적인 입시제도에 '사채시장의 공모자들처럼 너무나 깊숙하게'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안정된 상태로 유지'되어 개혁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정당성의 위기를 수시로 겪어 온 국가 권력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패한 교육 공무원은 자기 주머니를 챙기기에 바빠서, 청렴하고 충실한 관리와 교사들은 불합리한 규칙이나마 열심히 지키면서 맡은 바 '도리'를 다하느라, 그리고 어머니들과 일선 교사글은 각자 자신 나름의 사랑법으로 맡은 바 '도리'를 다하느라고 입시 브로커들과 팀이 되어 잘 짜여진 드라마 한 편을 완성해 냈다"(p.05)

저자는 장기간 부실했던 제도교육의 폐해가 대학에서도 발견되는 것을 발견하며 위기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제와 급격한 산업화와 정당성을 상실한 국가주의에서 교육문제의 뿌리를 찾는다.

"이제 교육의 위기는 대학의 현장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대학 강의실에서 기계적인 학습에 길든, 초등학생보다 낮은 감성 지수를 가진 '모범생' 출신 학생들을 만나면서, 또한 '학습'에 대해 체질화된 거부감을 갖고 있는 자칭 '날라리' 출신 학생들을 만나면서, 나는 더욱 교육에 대해 절망한다. 요즘 나는 우리가 주요 수술을 할 시기를 놓쳐 버렸다는 악몽에 시달린다. ...
장기화된 우민화 교육 속에 대학 자체도 종이 호랑이로 존재해 왔음을 본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가? 어디에서 급진적 실험과 미래를 만들어 갈 상상력과 에너지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왜 준비를 하지 않을까? 문제는 입시 위주 교육을 해결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중략)
요약하면, 이제까지의 교육은 일본 제국주의가 잡아 놓은 틀을 그대로 이어 온 극히 보수주의적인 교육으로서 자생력을 기를 기회가 허용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져 왔다. 해방전에는 식민지 통제를 위해, 해방 이후에는 정권의 정당성 확보와 양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교육이 수단화되어 왔던 것이다. 곧 교육의 초점은 산업화를 추진하는 국가 주도적 경제정책에 순응하고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정권에 대해 침묵하는 탈정치화한 대중을 만드는 데 맞추어졌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학교가 어떻게 하면 국가 발전에 공헌할 수 있을까?'만을 물어 왔지 '학교가 어떻게 하면 인간의 성숙에 공헌할 수 있을까?'를 애써 묻지 않았던 것이며, 이 결과 학교는 사회의 모든 부조리를 그대로 안고 있는 관료 조직의 한 하부 조직으로 전락해 버렸다.
학교는 인간을 길러 내는 선발의 기능만 하는 공장이며, 여기서 독창성과 협력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무수한 기계적 인간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생력을 기르지 못한 교육계와 획일적 관리제도로서의 교육 제도는 교육 주체자들의 자생력을 억업해 왔고, 문화적인 자원을 더욱 크게 늘려 가야 하는 후기 산업사회 시대로 들어서면서 그 위기감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이런 위기 사황이 오래 지속되는 가운데 생긴 패배주의 역시 상황을 극도로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p.84)

저자는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시급하고 근본적인 것은 '기르는 것에 가치를 두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배와 경쟁, 소유와 통제, 그리고 집단주의적 원리로 움직이는 사회의 기본 구성원리를 바꾸어 낼 수 있어야 한가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학생들도 삶을 소중하게 일구기 시작할 것이다."
저자는 실험교육 현장을 통해 학생들이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는 교육과 문화 현실을 분석한다. 그리고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 '자기학습을 바탕으로 한 개방교육'이 필수적임을 역설한다.

어제(9월 18일) 일간신문 한겨레에서 현재 경찰에 신고되어 있는 가출 청소년이 2만명이며, 실제로는 약 20만명의 청소년이 가출하여 우리사회의 음지에 존재한다는 기사를 읽었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2252.html).
저자는 학업을 중퇴한 학생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청소년들이 몸담고 있는 학교, 가정, 소비공간, 대중매체 등 여러 영역 간의 괴리와 분열, 또는 결탁을 지적한다. 어찌보면 "입시에 대한 압박이 아니라 이 영역들 사이의 '괴리'가 청소년들을 정신 분열증적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학교 중퇴자를 외형적으로 학교를 떠나는 학생들 뿐 아니라 교실 내에서 학습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까지를 포괄적으로 인식해야 함을 강조한다. 저자는 현재 교육,문화현실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중퇴자들을 많이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한국사회의 문제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그리고 학업 중퇴자들의 문제를 더 이상 '불우 청소년'을 구제하는 차원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총체적 위기 관리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라고 주장한다.
또한 저자는 학교가 21세기를 살아갈 학생들을 위한 장소로서 '턱없이 부적합하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학교와 가정과 일반사회가 드러내 보이는 상호 모순적인 구성원리 석에서 이중생활을 하면서 전반적으로 '불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결국 '학교 붕괴'의 또 다른 설명이 된다.

저자의 결론은 근본적으로 학생들의 이중생활을 청산하기 위한 사회 전체의 근본적, 구조적인 수술이다. 그리고 단기적으로는 가출 청소년과 학습을 포기한 학생을 위한 '문화 공간과 프로그램의 제공'이다. 그리고 대안 교육에 착수하는 것이다.
 
"이제 교육 문제의 핵심은 경쟁에서 이기는 아이를 기르는것이 아니라 자포자기 하지 않고 세상을 버티며 살아가는 아이를 길러내는데 있다. 탈근대적 흐트러짐 속에서 자기를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기르는데 있다. 그래서 논의의 초점은 좁은 의미에서의 교육이 아니라 청소년 문화와 그들의 '주체형성'에 놓여야 하는 것이다.
십대에 형성된 주체는 한 인간이 긴 인생을 통해 만들어갈 삶의 폭을 결정한다. 그리고 개개 구성원 들의 삶의 폭은 곧 그 사회의 미래를 가늠한다. 어떤 사회를 만들것인가? 우리의 탐색은 그래서 학교를 훨씬 벗어난다. 세대 문제, 상징 자본 ,일상의 정치 , 입시 문화의 정치 경제학, 이런 새로운 단어들을 불러들인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p.45)

물론 저자가 제도교육의 입시제도를 그대로 두자고 인정하거나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 역시 입시제도의 조속한 개혁을 주장한다. 하지만 입시제도가 쉽사리 바꾸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학생들의 이중생활과 저급한 문화로의 편입을 마냥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청소년들의 성 문화에 대한 저자의 의견을 소개한다.
 
"지금 청소년들 사이에 만연한 성과 사랑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전쟁상황을 방불케 하는 긴장된 입시 준비 상태와 그 동안 근대화 과정에서 급속하게 붕괴되어 온 인간 관계의 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타산적인 상업주의는 그 붕괴 상태를 최대한 이용하면서 돈을 벌어들인다.
그나마 사회를 지탱해 오던 가정이 최근 급속하게 붕괴되면서 대안이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점점 더 자극적인 감성에 집착하는 경향이 번지고 있다. 죽음을 불사하는 폭주족, 깊은 몰입의 관계를 꿈꾸며 끊임없이 이성 관계의 절정에 대해 생각하는 아이들, 무료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아이들, 부모와 어른들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아이들에게 비밀스런 공간과 행위를 제공하는 성은 매우 유혹적인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청소년들은 대중 매체를 통해서 많은 지식을 주워들었고, 쉽게 음란물을 접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이 알고 있는 성지식이 파편화된 지식이며, 성기 중심의 성일지라도 많은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알 것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은 더욱 성교육이 어렵다.
청소년들 중에는 호기심에서 이성을 만나 여러 가지 탐험을 해보고, 그러한 직접 체험을 통해서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기 보다 다양한 인간 관계를 배워가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에게 성은 더 이상 출산이나 결혼과 관련된 행위가 아니라 의사 소통의 한 방법이며 인간 관계를 배워 가는 방식인 것이다. 기성세대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그들 세대의 관계 맺기가 건강한 형태로 나아가게 도울 준비를 해야 한다."(p.232)
 
[ 2012년 9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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