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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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만에 읽은 현대 소설... 사실 박범신 작가는 잘 모른다. 작가의 작품을 한 편도 읽은 기억이 없다. 5월 경에 문득 영화가 보고 싶어 <은교>와 <건축학 개론> 등을 주말에 한꺼번에 봤다. 영화 <은교>는 SNS에서 외설 논란이 일던 때였다. 영화를 직접 관람하고 나니 SNS의 논란이 약간 무색해졌다. 영화를 보지 않고 논란에 가담하여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은교>와 <건축학 개론>은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봐야지 하다가 시간을 놓쳤다.
그러다가 지역 시민단체 공부모임에서 세미나 교재를 고르던 중 누군가 <은교>를 추천했고, 나도 적극 동의하여 책으로 읽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IPTV로 영화를 다시 한 번 보았다. 박범신 작가의 작품도 시간이 되면 꾸준히 읽어야겠다. 작품 속에 인상 깊은 표현들이 많았다.
 
"소나무숲 그늘이 성에가 낀 창유리를 더듬고 있다. 관능적이다."
"숲은 하루가 다르게 쓸쓸해졌고, 쓸쓸한 숲이 나의 주인인 것처럼 뚜벅뚜벅 걸어들어와 내 마음을 다 차지했다. 산기슭을 타고 내려온 어둠이 내 집의 허리를 뱀처럼 쓰윽 휘감고 나면, 세상엔 원근도 없고, 내 모든 지나간 삶도 쓰윽, 지워졌다."
 
영화 <은교>와 소설 <은교>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크게 차이가 없다. 그동안 보통 소설 작품을 영화화할 때 줄거리나 주인공의 성격을 바꾸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대신 영화와 소설에서 느껴지는 주제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박범신 작가는 이 작품을 <촐라체>, <고산자>와 더불어 '갈망(渴望) 3부작'으로 설명했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촐라체>에서는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 의지의 수직적 한계를, <고산자>에서는 역사적 시간을 통한 꿈의 수평적인 정한(情恨)을, 그리고 <은교>에 이르러, 비로소 실존의 현실로 돌아와 감히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탐험하고 기록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작가가 작품 속에 녹이려 애쓴 '갈망'은 소설 속에서는 어느 정도 느껴지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다지 느낄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영화 속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저물어 가는 석양과 같은 처지에서 느끼는 이적요 시인의 외로움, 알맹이는 없이 껍데기만 걸친 채 하루하루 연명하는 서지우 작가, 정을 주고 받을 데 없이 청소년 시절을 방황하는 고교생 은교. '갈망'의 원인이 '외로움'일 수도 있겠지만...
 
"천박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천박한 짓과 천박하지 않은 짓을 악착같이 나누려 한다."
 
영화와 소설은 전체적인 줄거리는 같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다르다. 소설에서는 세 명의 화자와 두 개의 시제가 등장한다. 세 명의 화자는 변호사와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작가다. 두 개의 시제는 변호사의 현재 시점과 이적요 및 서지우의 과거 시제다.(영화에서는 처음부터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위대한 시인이라고 칭송받던 이적요가 죽은 지 일 년이 되었다. Q변호사는 이적요의 유언대로 그가 남긴 노트를 공개하기로 한다. 그러나 막상 노트를 읽고 나자 공개가 망설여진다. 노트에는 이적요가 열일곱 소녀인 한은교를 사랑했으며, 제자였던 베스트셀러 <심장>의 작가 서지우를 죽였다는 충격적인 고백이 담겨 있었던 것. 또한 <심장>을 비롯한 서지우의 작품은 전부 이적요가 썼다는 엄청난 사실까지! (영화에서는 서지우가 질투와 우려로 인하여 소설 <은교>를 몰래 훔쳐 잡지에 발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적요기념관 설립이 한창인 지금, 그 노트가 공개된다면 문단에 일대 파란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노트를 공개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진 Q변호사는 은교를 만나고, 놀랍게도 서지우 역시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을 듣는다. 은교에게서 서지우의 기록이 담긴 디스켓을 받은 Q변호사는, 이적요의 노트와 서지우의 디스켓을 통해 그들에게서 벌어졌던 일들을 알게 된다.
 
"질투심은 열등감의 다른 이름이며, 맹목적 잔인성을 갖는다. 질투심이 꼭 정열의 증거는 아니다."

 

시인 이적요는 자신의 늙음과 대비되는 은교의 젊음을 보며 관능과 아름다움을 느꼈다. 자신을 '할아부지'라고 부르며, 유리창을 뽀드득 소리 나게 닦는 은교의 발랄한 모습을 보며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청춘'을 실감한다. 고고하게 은둔하면서 문단을 좌지우지 하고자 했던 그는 '청춘'과 '사랑'이 없었던 자신의 인생이 무의미하고 가짜라는 격한 감정에 빠진다. 한편, 선의로 은교에게 작은 도움을 주다가 서지우는 은교를 바라보는 이적요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은교에 대한 집착이 커져갔다. 정에 넘치던 사제지간이었던 이적요와 서지우의 관계는 은교를 둘러싸고 조금씩 긴장이 흐르기 시작하고, 열등감과 질투, 모욕이 뒤섞인 채 아슬아슬하게 유지된다. 그리고 서지우가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은 후, 이적요는 조금씩 생명력을 잃어갔다.
 
이 작품을 읽는 사람에 따라 통속적인 삼류 연애소설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지금으로부터 10~20년 전이였다면, 내가 작가의 '갈망'이라는 설명을 무시하고 '사랑'이나 '질투'로 받아들였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갈망'이라는 작가의 주장에 많이 공감이 된다. 작품 속에는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엉켜 있는 사랑이 실타래를 이루고 있다고 해서 이를 단순히 연애소설에 국한시킬 수 없는 까닭이 들어 있다. 남자란 무엇인가. 여자란 또 무엇인가. 젊음이란 무엇인가. 늙음이란 또 무엇인가. 시란 무엇인가. 소설은 또 무엇인가. 욕망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또 무엇인가. 질투란 무엇인가. 남자들에게 여자란 나이가 없는 것이듯, 여자에게 또한 남자란 나이가 없는 것이듯, 작가가 계속해서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던져진 질문에 소설 속 주인공들의 몸을 빌려 살아가고 살아내고 죽어가고 죽음으로 작가가 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갈망'이라는 주제와 더불어 나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았던 것은 주인공 이적요 시인의 '젊음과 늙음'에 대한 소회였다.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조금 더 직설적이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에 대해 얻어진 상이 아닌 것처럼, 나의 늙음도 나의 잘못에 대해 받는 벌이 아니다."

 

[ 2012년 9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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