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있는 삶 - 손학규의 민생경제론
손학규 지음 / 폴리테이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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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표현을 처음 접했을 때, 문득 영국정부의 복지정책 구호였던 '요람에서 무덤까지'와 스웨덴 사민당의 선거구호였던 '국민의 집'이 떠올랐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표현에 누군가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는데 충분히 공감이 된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먹고 살기 위해, 짤리지 않기 위해, 밀려나지 않기 위해, 탈락하지 않기 위해 '저녁'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한국인들...
사실 한국의 역대 선거에서 이런 단순명료한 구호로 정당이나 후보의 정책을 제시한 사례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손학규 전대표는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지 못하거나 본선거에서 떨어지더라도 한국 선거에 하나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셈이다. 

그렇다면 손학규 전대표는 어떻게 국민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선물해줄 수 있을까? 그는 그 해결책을 '진보적 자유주의’의 기초 위에 세운 ‘공동체 시장경제’라고 제시한다. 우리사회는 1945년 해방 후 지금까지 오로지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길을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후 한국인, 한국의 상층인사들이 미국의 힘을 동경하고 미국식 번영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이끌어 왔던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일반 국민들 역시 그런 삶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더 이상 ‘미국의 길’은 아니다. 미국식으로 안된다는 것을 우리도 알고, 일반 국민들도 알게 되었다. 그는 이제 ‘유럽의 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최근까지 우리 나라에서 정당이나 후보가 자신들의 이념과 정책을 명확하게 제시한 것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등 진보정당 뿐이었다. 거대 정당인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 역시 알맹이가 없는 반공민주주의니 대중민주주의니 자유민주주의니 복지주의니를 외쳤을 뿐 그것을 합리적으로 정리하여 제시한 적이 없었다. 대부분 실제 정책은 보수주의에 다름 없었고 신자유주의였다. 나는 민주통합당의 역사에서 손학규 전대표가 최초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제시한 "저녁이 있는 삶"의 이론적 기초를 ‘진보적 자유주의’로 정의하고, 그 내용을 ① 정의, ② 복지, ③ 진보적 성장의 가치를 묶는 ‘공동체 시장경제’라고 말한다. 최장집 교수는 추천글에서 "반면에 이 책에서 저자는 자유주의의 진보적 가치를 말한다. 자유와 평등, 인권의 가치를 중시하고, 거기에 덧붙여 정의와 공정함, 공동체를 강조한다. 자유주의의 적극적 측면에 더 초점을 맞춤으로써 진보적 토대와 사회적 권리를 확대.강화하겠다는 분명한 뜻으로 읽힌다. 실제로는 주저하는 자유주의 혹은 보수적 자유주의의 내용을 가지면서 겉으로만 진보성을 과시하는, 그간 야당이 보여 준 전형적 패턴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의지로도 보인다"(p.8~9)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공동체 시장경제’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손 전대표는 책의 2부 '정의.복지.진보적 성장을 위한 실천 방안'에서 각각의 가치에 맞는 세부 목표와 정책 과제를 자세히 다룬다. '정의'의 가치는 재벌 개혁과 상생 경제, 그리고 노동 개혁으로, '복지'의 가치는 보편 복지와 생활 복지, 그리고 일자리 복지로, '진보적 성장'의 가치는 균형 성장과 혁신 성장, 그리고 평화 성장으로 설명한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 나선 여야, 무소속의 어떤 후보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는 이론적 배경과 짜임새 있는 정책이 돋보인다. 가장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고려대 장하성 교수는 이렇게 평가했다. "이 책에서 자신이 제시하고 있는 경제정책들을 단순하게 국민을 더 잘살게 하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는 방안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런 경제정책들을 우리 사회가 기득권을 깨고 계층을 넘어선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방안으로 보고 있으며, 정의로운 경제를 통해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방안으로 보고 있다"(p.35)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복지국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졌고 그에 비례해 유럽의 경험을 강조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정치인들과 지식인들 내지 언론들도 그런 가치의 중요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여전히 대부분은 미국적 범위 안에 있다. 일자리를 말하면서도, 그래도 노동 유연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대기업의 전횡을 비판하면서도, 그래도 자유 시장 원리를 침해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서민을 강조하면서도, 그래도 도덕적 해이는 안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더 이상 미국의 길이 아니고 유럽의 길이다.’를 주장하는 그는 독특하다.
손학교 전대표는 바로 '유럽의 길'을 말한다. 그는 "새로운 국가 발전 전략의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 유럽으로 정책 여행을 다녀왔다. 네덜란드에서는 '노동'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스웨덴에서는 '복지'가 왜 성장과 함께 갈 수 있는 발전모델이 될 수 있는지, 핀란드에서 본 '교육'은 아이들이 자유롭게 공부하면서 세계 최고의 교육 강국이 될 수 있었는지, 영국에서 본 '의료'는 복지국가의 틀 안에서 공적 의료체계가 가진 장점을 살리면서 비효율을 줄여갈 수 있었는지, 스페인에서는 '협동조합'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10일도 되지 않는 짧은 여정이었기에 그가 얼마나 속속들이 각 나라의 정책의 핵심을 얻어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의 복지정책을 위해 그 정책의 선진국으로 배우러 가는 자세는 인정받을만 하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저녁이 있는 삶’이 의미하는 것이 단순히 노동단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분법적 구도를 반대하는 가치"이고 "함께 사는 사회를 위한 ‘국민 행복 복원 프로젝트’다"라고 말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고 대화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식의 이분법, 내가 잘살기 위해선 누군가는 못살아야 한다는 이분법, 내가 옳기 위해서 누군가는 반드시 틀려야 한다는 이분법이 그것이다. 한 인터뷰에서 저자는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고 한다. 지금 시대에 충분히 절감되는 이야기다.
강준만 교수가 민주통합당 후보 중에서 유일하게 지지하는 후보가 왜 손학규 전대표인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전체적으로 책 속에서 손 전대표에게 아쉬운 점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정당의 과거 및 현재 행보에 대한 솔직한 평가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민주통합당에 자신이 몸담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되었고, 본인도 두 번이나 당의 대표를 엮임했다. 그럼에도 그 정당은 지금까지 괄목한만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고 유권자들에게 제대로된 대안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소수정당이라는 변명으로 다수당의 횡포를 견제하지 못했고, 이렇다할 제도적 성과를 내오지도 못했다. 또한 2010년 지자체 선거에서 승리한 후 집권한 지방정부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보여주지도 못했다. 따라서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통합당과 자신이 유권자에게 지지를 구하려면 미래에 대한 비전 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에 대한 솔직한 평가와 반성, 사과가 전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자신이 집권 후 어떻게 자신의 정책을 성과적으로 추진할 지에 대한 방법론이 부족해 보인다.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 대기업과 중소기업, 자본과 노동, 수도권과 지방 등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있는 정치사회 집단의 이분법을 해결할 것인지, 유권자들로부터 거의 절망에 가까운 불신을 받고 있는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의 신뢰를 회복할 것인지, 유권자와 서민들의 희망과 참여를 어떻게 불러올 지에 대한 언급이 부족한 것이 많이 답답했다. 
 
[ 2012년 9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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