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죽었다 한마당 글집 3
에버레트 라이머 지음, 김석원 옮김 / 한마당 / 198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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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1970년대에 미국에서 발간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으로부터 무려 40년 전 주장이고 그 사이에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렀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 동안 저자의 주장에 많은 공감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내가 70년대에 학교를 다녔기 때문인지 아니면 저자가 말하는 70년대의 학교제도의 현실이 지금도 계속되어서 그런지 그것은 이 책을 읽어야만 알 수 있다. 아무튼 나는 두 가지 모두가 원인인 것 같다.
 
저자가 "학교는 죽었다"라고 책의 제목을 선정한 이유는 타당해 보인다. "오늘날의 학교는 국가에 의해 독점되어 있다. 따라서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가르치고 높은 수준에 이를수록 통치하고 지배하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학교는 국가에 봉사하는 자질을 길들인다. 마치 중세의 국가와도 같은 존재가 된 학교는 모든 가치와 규범을 규정하는 사회의 재판소가 되어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학교는 이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하느님의 뜻과는 달리 말을 잘 듣고 잘 보인 자에게는 좋은 선물, 즉 튼튼한 동앗줄을 내려주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나쁜 선물, 즉 썩은 동앗줄을 내려주는 교회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아런 의미에서 인간의 잠재력을 개발해주고 전인적인 인간으로 키워준다는 본래의 사명을 상실한 학교는 이제 죽었다." 이 글에서 중세 종교 관련한 내용만 빼면 21세기 학교제도애 대해 비판하는 글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저자는 당시의 학교를 거부한다고 선언한다. 기술, 즉 테크놀로지가 거대한 물결이 되어 미국사회를 뒤덮어버린 상황에서 학교는 기술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에서 권력을 갖는 사람들이 이 지배관계를 통해 이득을 얻게 보장해주며, 더구나 학생들이 이 지배 관계를 거부할 줄 모르도록 무능력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학교는 초급과정에서 고등과정까지 모두를 끝없는 경쟁으로 내몰아 그 학교제도와 운영과정이 옳고 그르고 혹은 그 경쟁이 가치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제쳐두도록 만든다. 그는 사람들이 교육에 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테크놀로지의 노예 혹은 테크놀로질는 이름에 의하여 다른 것들의 노예상태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테크놀로지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유인을 만들기 위한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학교제도를 거부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의 교육에 대한 개념 규정이야말로 지금도 보통 사람들의 상식적인 생각과 희망일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는 무엇이고 무엇을 하는 곳인가? 저자는 그것을 1. 학생을 보호하는 기능, 2. 사회적 역할의 선별(사회계층화 작업) 기능, 3. 이론이나 원리 혹은 사상을 주입시키는 기능, 4. 기술과 지식을 개발시키는 통상적인 교육기능이라고 분류한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사회 통제를 위한 효율적인 기구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저자는 그런 학교의 역할이 자본주의 사회 뿐 아니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남을 지적한다. 그는 학교제도가 개인에게끼치는 가장 큰 해악을 "무엇을 언제 어떻게 어디서 재울 것인가 하는 문제는 미리 다른 사람에 의하여 결정되어 버리고, 모든 배움을 전적으로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이라고 배우게 된다. 배울 가치가 있는 것은 학교애서 가르치는 것밖에 없으며,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도 누군가가 학교에서 틀림없이 자기들에게 가르쳐 줄 것이라는 믿음이 주입된다. 아이들은 학교가 제공하는 가치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가치관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태도까지 배우게 되고. 그리하여 체제 속에서 별다른 마찰 없이 지내는 방법을 학교에서 배우게 된다. 즉 환경에 순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아이를 입학 전보다 퇴행시키게 되는 것이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어떠한 가치를 주입시키는가? 저자는 70년대에 미국 정부가 아이들에게 주입시키는 가치, 신화 혹은 이데올로기가 기회평등, 자유, 진보, 능률임을 지적하고 이 가치 또는 이데올로기의 이면에 강요된 불평등의 현실, 지배와 억압이 증대되는 현실, 빈부격차의 현실, 여론조작의 현실을 감추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저자는 학교의 제도화와 독점화가 산업사회의 운영논리에서 비롯되었음을 설명한다.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구성원에게 필요한 소비물자를 제공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회가 건전하거나 경제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또 생활을 향상시킨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것이다. 사람들이 상품화된 재화와 서비스를 소비하면서 이렇게 훈련될수록 점점 더 자신의 환경을 자신이 형성하기는 어렵게 될 것이다. 그의 노력과 돈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행에 따라 새로운 상품을 구입하는데 모두 소비되고 말며, 개인의 생활 환경이란 자신의 소비양식에 수반되는 부산물로서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이반 일리히, <제도 혁명에의 호소> 중에서)
그는 인간의 욕구가 제도적으로 충족되게 됨에 따라  그 제도들은 그의 생산물을 한정하며 그것을 향유하는 것도 통제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즉 기존제도는 점차로 1. 팔요를 충족시켜주는 재화나 서비스를 규정하고(학교의 경우 교육 Education을 학교활동 Schooling으로 대체), 2. 이를 필요로 하는 자들이 이러한 규정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며(사람들은 교육을 학교활동과 동알시하도록 유인된다), 3. 필요로 하는 사람 중에 일부분은 그 생산물을 향유할 수 없도록 배제해 버리며(어느 수준에 이르면 학교는 단지 일부의 사람들만이 다닐 수 있게 된다), 4.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자원을 매점매석한다(학교는 교육에 유용한 자원을 독점한다). 그는 이렇게 일반화시킨 것은 교육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건강, 여행 등 다른 여러 가지 인간의 욕구에 대해 모두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제도를 '지배적 제도'라 규정하고 이렇게 제도를 인간사회 전 영역에 확대시키는 이유를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학교제도는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다.

'지배적 제도'의 공통점은 한 단체 또는 개인에게 상대방에 비해 우위를 확보해 주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우위가 지속되면 이 제도에 따른 가격을 계속 지불해야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저자는 '민주적인 제도'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민주적인 제도는 "다른 사람에게 우위를 제공한다거나 사람들이 그에 종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지 않으면서, 복지기관어럼 서비스를 제공하고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제도다. 그것은 산업사회의 생산체제의 형태를 취하기보다는 조직망의 형태를 취한다. 그는 이러한 민주적인 제도를 만들기 위해 교육의 경우 교육자원과 교육인력을 재조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민주적 교육제도란 교육자원은 교육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이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판단으로 선택하도록 하고, 교육재정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배분해야 하며 기존의 학교시설과 교육인력은 학생들과의 네트워크와 유기적인 연결망을 통해 서로 연결되도록 한다. 

한국에서 당장 학교제도를 해체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고 해체하는 것만이 유일한 정답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학교제도가 지난 20세기부터 어떠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을 어떻게 자율적인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지 문제의식을 갖는 것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80년 가까운 인생을 살면서 보이지 않는 세력과 제도를 통해 '내 인생이 아닌 남을 위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 경계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가장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 2012년 7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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