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를 권리 : 폴 라파르그 글모음 - 필맥 휴대책
폴 라파르그 지음, 차영준 옮김 / 필맥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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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피로사회>,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리>와 함께 읽은 책이다. 물론 이 책의 표제작인 단편 [게으를 권리]가 읽을 거리였다. <피로사회>는 세계의 사회경제 시스템을 장악한지 수 백년이 지난 오늘날 자본주의의 사회문화가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만능주의"를 불러왔음을 비판했고, <필경사 바틀리>는 20세기 초 미국 뉴욕의 월가를 배경으로 자본주의가 가져온 근대문명의 상식과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 책 <게으를 권리>의 표제작은 19세기 말 자본주의의 꽃을 피운 유럽에서 겉으로는 '노동의 신성한 권리'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일삼고 있는 자본가들과 부르조아지 지식인들을 비판했다.

 

저자 폴 라파르그는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으로 19세기 중순 이후 지금까지 인류의 사상과 행동에 큰 업적을 남기고 있는 칼 마르크스의 사위다. 그는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다. 이 책은 폴 라파르그의 대표적인 글 7편을 묶은 것이다. 이들 글은 1883~1904년에 집필된 것들이다.

 

표제작인 [게으를 권리]는 '일할 권리를 앞세우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라는 풍자적인 형식으로 노동자의 삶을 억압하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 글이다. 그는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는 과거에 부르조아 철학자와 논객들이 전개했던 투쟁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서 "부르조아지는 17~18세기에 성직자들에 의해 지탱되는 봉건 귀족계급에 대항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성직자들의 규범인 '금욕'과 '복종' 대신 '자유사상'과 '무신론'을 기치로 내세웠다. 그러나 일단 승리를 거두자 그들은 어조와 태도를 싹 바꿔, 이제는 종교를 이용해 자신들의 경쩍, 정치적 패권을 정당화한다. 노동자들에게 금욕을 설교하기에 이른 것이다. 기독교 윤리를 천박하게 모방한 자본주의 윤리는 노동자의 육체에 파문을 설교했다. 생산자인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최소한으로만 제공하고, 그들의 기쁨과 분노를 억압하고, 그들에게 기계의 일부가 되어 휴식도, 대가도 없이 일만 하라고 선고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는 국가의 노동자들이 기묘한 환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꼬집는다. 그것은 일에 대한 애착 또는 노동에 대한 처절한 열정인데, 그 열정이 개인과 그 후손의 생명력을 고갈시킬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가들이 상품생산을 고조시키고 노동자를 착취하여 잉여자본을 축적하고 과잉자본과 과잉상품을 해소하기 위해 상품시장과 원료를 찾아 식민지를 개척하도록 하는데 노동자들이 끌려다녔다는 것이다.

라파르그는 "프롤레타리아는 자신들의 자연적 본능으로 돌아가 부르조아 혁명의 형이상학적 법률가들이 지어낸 무기력한 '인간의 권리'보다 천 배는 더 고귀하고 성스러운 '게으를 권리'를 선언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하루에 3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여가와 오락을 즐기는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노동과 여가, 신성함과 게으름에 대한 그리스와 로마, 중세 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기도 한다.

 

두 번째 작품 [추상적 개념의 기원]은 철학적, 언어학적, 인류학적 분석을 통해 인간의 두뇌에 형성돼있는 개념의 본질에 대해 논의한다.
세 번째 작품 [아테나신화]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유래와 아테나와 관련된 신화의 의미를 따져본다.
네 번째 작품 [마르크스에 대한 회상]는 자신의 장인이자 열정적인 학자였던 마르크스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을 서술한다.
다 섯번째 작품 [말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동물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노동자의 처지를 냉소적으로 묘사한다. 표제작인 <게으를 권리>와 연결되어 있다.
여섯 번째 작품 [사회주의와 지식인]는 지식인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논의한다.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당대의 지배체제에 아부하면서 생존을 구걸하는 모습은 역사를 초월하는 것 같다.
마지막 작품 [여성문제]는 여성의 능력과 지위에 관한 허구적인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대안의 관점을 제시한다. 유럽 사회주의자들은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에 이미 이미 사회경제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여성을 착취하는 체제와 구조를 실랄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들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로의 '세기전환기'에 유럽의 혁명적 지식인들은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마치 그 시대 사상적 운율과 정신적 풍경의 한 단면을 보고 듣는 것 같다.

 

폴 라파르그는 1842년 쿠바의 산티아고에서 혼혈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하여 의학을 공부해 의사로 일하면서 아나키스트 성향의 프루동주의자로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제1인터내셔널의 프랑스지부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1865년에 영국으로 건너가 마르크스,엥겔스와 친분을 맺고 마르크스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는 1882년에 파리로 돌아가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새로 설립된 프랑스 노동자당을 지도했다. 그는 이때 의사로서의 일을 중단했고, 이후 죽는 날가지 프랑스 노동자당의 대표적인 이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중받았으며, 정치활동을 하다가 여러 차례 투옥됐다.
1911년 69세가 된 라파르그는 노쇠함으로 인해 인생을 바쳐 운동에 더 이상 기여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아내와 동반자살을 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 2012년 6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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