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드라곤에서 배우자 - 해고없는 기업이 만든 세상 몬드라곤 시리즈 1
윌리엄 F. 화이트 & 캐서린 K. 화이트 지음, 김성오 옮김 / 역사비평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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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전세계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이윤을 향한 무한경쟁'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 자체도 문제지만, 더욱 큰 문제는 '자본'이라는 속성이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진화하면서 불려나가는 특징을 보인다. 더군다나 1990년대 초부터 가속화된 '시장경제의 세계화'는 개인이나 소집단, 개별 국가를 염두에 두지 않고 무한한 경쟁을 가져옴으로써 인간존엄성과 민주주의, 노동이나 공동체 보다 이윤과 생산,유통체계를 자본의 논리에 맞도록 강제하는 특징을 보인다.
 
예전에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읽었다. 그 책에서 장하준 교수는 전세계적인 국가간 불평등, 자본에 의한 민주주의의 약화, 자유시장 경제에 대한 헛된 이미지, 국가내 불평등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현재 세계 무역과 금융을 쥐고 있는 독점자본이 개인과 집단, 인류 고유의 가치와 문화, 공동체와 국가, 민주주의와 평등에 전혀 관심이 없음을 고발한 것이다.
우리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기본적인 경제체제를 인정하고 그 개별 요소로서 기업과 시장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아무런 책임과 의무가 없는 '무한 자유'와 '무한 권리'를 보유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전세계적으로 시장경제가 '초세계화'되는 상황에서 인류 고유의 삶과 가치가 위협받고 있다. 최근에 읽은 <자본주의 새판 짜기>에서 저자 대니 로드릭이 주장한 것처럼 현대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특성으로 하는) 시장경제는 민주주의와 국가주권, 그리고 세계화(HyperGlobalization) 상호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고 "민주주의와 민족자결권이 하이퍼글로벌라이제이션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진실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와 국가제도만으로 개인과 집단의 삶이 개선될 것인가? 나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가 엄청나게 큰 규모와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만큼 민주주의와 국가주권이 개선된다 한들 '최소한의 규제'에 그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현대민주주의의 주류인 '대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제도'의 한계와 문제점을 숱하게 제기해 왔다. 대의민주주의는 개인들의 자발성과 직접적인 이해를 시스템 속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기존의 시장경제 체제 역시 개인의 삶과 협동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그렇다면 개인과 집단의 삶이 개선될 수 있는 방향은 무엇인가? 당장 어떤 체제나 시스템이라고 뚜렷하게 드러난 것은 없지만, 아마도 '성장'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 인간 중심의 시장경제, 공유와 협력의 시대정신 등이 고려된 방향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반 일리히가 <성장을 멈춰라>를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문제제기한 대로 '자율적 공생사회'가 근본적인 대안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현재 수준에서 갑자기 도약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가능성을 보이는 것 중 하나가 협동조합일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보통 생산자나 유통업자의 횡포로 인해 태동한 소비자협동조합을 생각한다. 소비자협동조합은 소비자를 속이고 대상화시키는 생산자와 유통업자에 대항하여 소비자들이 뭉쳐서 저렴한 가격, 스스로의 선택, 유통 비용 축소, 환경친화적 제품 등을 목적으로 발전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 식으로 한국에서도 생활협동조합이 상당 부분 발전해 왔고 최근에는 생활협동조합 뿐 아니라 의료생협, 주택생협 등 다양한 산업분야로 협동조합이 발전하고 있다. 소비자협동조합은 대기업의 횡포와 유통업자의 횡포를 막고 생산자와 중소기업을 보호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기존의 소비자협동조합에서 아쉬운 것은 소비자 중심의 협동조합이라는 한계로 인해 '일자리'와 '노동'에 대한 가치창출이 부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 및 성격과 더불어 협동조합의 역사가 짧은 이유 등으로 대부분 조합원의 참여가 제한적인 것이 문제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 특히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생산협동조합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비자가 중심인 생활협동조합과 달리 노동자가 중심인 협동조합은 근본적인 성격과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소비자협동조합이 담아낼 수 없는 노동 중심의 생산시스템과 직접 참여에 의한 민주주의가 적용, 발달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몬드라곤(Mondragon)은 스페인 북동쪽 바스크 지역에 위치한 도시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1940년대부터 주임신부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의 주도로 시작된 협동조합운동과 제조업·금융·유통·연구·교육을 포괄한 협동조합 그 자체를 일컫기도 한다. 노동자들이 회사를 소유하고 경영자를 선임하며 경영 전체를 관리·감독하는 체제인 몬드라곤은 1956년 노동자생산협동조합으로 시작했지만, 오늘날 해외에까지 생산공장(2010년 현재 77개의 해외 생산공장)을 갖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책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는 한국에서 1992년 초판을 발행해 협동조합에 관심을 둔 사람들과 새로운 사회운동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안타깝게도 여러 사정으로 인해 절판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몬드라곤을 배우고 그곳에서 인류 미래를 위한 희망의 불씨를 보려는 사람들의 열망은 여전했기 때문에 역자가 최근 새로 발간한 것이다.
이 책은 1941년 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한 작은 시골 마을에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가 부임하여 1956년 첫 협동조합 ‘울고’의 탄생을 도운 뒤 1980년대 말까지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가 어떻게 설립되고 발전해갔는지의 역사를 그리고 있다.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제도의 대안으로 제기된 모든 생산자 연합체는 실패하거나 생산자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전통적 통설을 극복했으며, 심지어 1980년대의 극심한 경제불황을 이겨내고 1980년대 말 100여 개의 협동조합과 19,500여 명의 노동자로 이루어진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책의 저자 윌리엄 화이트 교수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밝히기 위해 몬드라곤의 경영체계, 경기침체기의 대응, 고통스럽게 단행한 조직 재편 등을 체계적이고 분석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책은 몬드라곤 협동조합에 관한 일종의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생산협동조합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협동조합 매뉴얼이자, 교과서가 될 수 있을 만큼 몬드라곤의 경영구조, 체계, 개편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우리에게 더욱 큰 감명을 주는 것은 한 가톨릭 신부와 그와 함께 몬드라곤을 만들어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몬드라곤의 기적을 일궈낸 씨앗은 돈 호세 마리아 신부의 헌신적 지도력과 그의 사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을 설득하여 학교를 세우고 이곳 졸업생들과 함께 최초의 협동조합 ‘울고’를 세운 일, 주변 사람들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노동자생산협동조합이 성공할 수 있도록 협동조합 은행(노동인민금고)을 설립한 일, 사람들과 토론하고 공부하며 협동조합을 이끈 일 등 몬드라곤의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면서도 한 번도 공식적인 직책을 맡지 않은 돈 호세 마리아 신부의 헌신과 열정은 책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1980년대 온 유럽이 경제침체를 겪는 와중에도 노동자들이 협동조합을 지켜내기 위해 혁신과 개편을 해나가는 과정 또한 눈물겹게 그려진다. 1974년 처음 파업을 겪으면서 내부 갈등을 겪고 이로 인해 해고의 아픔까지 감당했지만 끝내 그들을 복직시키고 협동조합의 원칙을 새로 깨닫는 과정, 파산한 기업을 구제하기 위해 쏟아붓는 노력 등도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몬드라곤으로부터의 교훈은 스스로 공부하고 연구하여 대안을 고민하였고 일자리를 창출하여 나누고 이를 위해 기업을 경영하였던 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 몬드라곤의 선구적인 노동자이자 경영자인 5인은 생산협동조합의 방식으로 기업을 설립,운영하고 조합원들과 민주적 경영과 창조적 노력을 거듭하여 바스크 지역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업을 만들어냈다. 또한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 신부의 조언을 받아들여 생산과 마케팅을 제고시키기 위한 연구와 금융까지 스스로 창출해낸 것이다. 협동조합의 성장은 1980년대 스페인의 경제위기 속에서도 양질의 일자리로 이어졌다.
또 하나의 교훈은 아리스멘디 신부에게서 얻었다. 아리스멘디 신부는 프랑코 군사독재 치하의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조직인 카톨릭의 성직자였지만 스페인 내전 이후 노동자,서민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여러 실질적인 대안과 방법을 노동자들과 함께 연구한 끝에 생산협동조합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그 과정에서 아리스멘디 신부는 홀로 수 백개의 개별적, 소규모, 중규모 토론모임을 조직했다고 한다. 그리고 생산협동조합, 노동인민금고, 연구소, 대학 등 어느 조직과 기업에서도 공식적인 직책과 직함을 가지지 않고 끝까지 직접 나서서 일하지 않았으며 도움과 제안만 거듭하였다. 그는 언제나 먼저 공부하고 연구하고 대안을 수립한 후 구체적으로 일을 추진하면서 설득하여 자연스럽게 협동조합의 주인공들이 새로운 조직과 일에 참여하여 익히고 발전시켜 나가도록 지도,지원했다.
 
 
몬드라곤의 창립자이자 정신적 스승인 돈 호세 마리아 신부의 주옥같은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일부 사람이 자신의 배타적인 이익을 위해 타인의 노동을 이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사회제도는 일종의 사회적 괴물이다. 협동조합주의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자본주의자와 구분된다. 즉 후자가 자신에 봉사하는 사람을 키워내기 위해 자본을 이용하는 반면, 전자는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자본을 이용한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서로는 서로를 보충해줌으로써 완전해질 수 있다. 혼자 설 수 있는 사람은 신이거나 짐승이라고 한다. 이 말은 사회 계급들이 서로를 필요로 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 민중과 당국이 서로 떨어져 생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이 말은 공동의 선이나 모든 사람의 이익 등을 진실로 추구할 때 사회제도는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선한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노동자들이 그 일에 참여해서 그들 사이에 진정한 화합을 이루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느껴지고 실천되는 민주주의는 그 범위를 선거제도상의 정책이나 절차에 국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제도적 과정을 민주화함으로써 경제와 재무 분야뿐만 아니라 교육과 사회 분야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반영되어야 한다.”


[ 2012년 3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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