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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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주인공이 완전 마초야!" 새해 들어 두 번째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페이스북에 올렸을 때 친구 하나가 꺼낸 말이다. 물론 그 친구는 그렇게 애기한 후에 꼭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리고 카잔차키스의 다른 책 몇 권까지 더 소개해 주었고...

이 책은 법정스님이 <내가 사랑한 책들>에서 소개한 열 입곱번째 것이다. 법정스님이 추천도서 50권은 '닥치고' 읽기로 마음 억었기 때문에 친구의 말을 뇌 한 구석에 담아두고 계속 읽었다.
스님은 <내가 사랑한 책들>에서 이 책을 소개하면서 조르바의 말을 인용한다. "요 몇 해 동안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뜩 쓰인 책을 읽었을 겁니다. 모르긴 하지만 종이도 한 50톤쯤 씹어 삼켰을 테지요. 그래서 얻어 낸 게 도대체 무엇이오?" 조르바의 이 질문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묻는 준엄한 질문으로 들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읽고쓰고 하는 뜻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지금껏 그토록 많은 종이를 씹어 삼키면서 얻어 낸 게 무엇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삶의 본질과 이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한낱 종이벌레에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그리스의 역사와 저자의 삶에 대해 먼저 알아야했다. 작품 자체가 저자 자신의 경험담을 토대로 하여 구성된 것이고 작 중 주인공인 '조르바' 역시 실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르바'에 대하는 저자의 태도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영혼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 삶을 풍부하게 해준 것은 여행과 꿈이었다.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이 누구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꼽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

카잔차키스는 1883년 그리스의 크레타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크레타는 터키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크레타 사람들이 터키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치르는 중에 그가 성장한 것이다. 크레타의 신들을 길로 낸 그리스 신화의 보금자리가. 욕심 많고 거짓말 잘하고 난폭하고 거칠기로 소문 난 크래타안들의 섬인 것이다. '평화시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광란의 불길에 ?기게 한다'는 섬... 카잔차키스의 크레타섬은 "한 번 부르면 가슴이 뛰고 두 번 부르면 코끝이 뜨거워지는 이름... 기적이나. 내가 크레타 사람이라는 것은..."인 것이다. 그는 조국 그리스를 축으로 74년의 생애를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중국, 일본, 팔레스타인, 이집트 땅을 눕고 다녔다고 한다.
역자인 이윤기는 카잔차키스의 삶을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사색과 행동 등등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만을 읽어 본 나로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지만...

카잔차키스는 1917년 그의 나이 34세 때 조르바를 만났다. 전쟁으로 석탄 연료가 부족해지자 조르바라는 일꾼을 고용하여 펠로폰네소스에서 갈탄을 캐려고 시도했다, 이 경험은 1915년 벌목 계획과 결합되어 뒷날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로 발전된 것이라 한다.

소설은 광산사업을 하러 크레섬으로 떠나는 배를 그리스 본토의 어떤 항구애서 기다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공부하고 글쓰며 영혼의 구원을 찾는 사람이다. 절찬한 친구가 카프카스에서 위험에 처한 그리스 동포들을 구하러 가자고 했을 때 그는 주저했다. 친구는 그에게 "안녕! 책벌레야!"하며 떠났다. 그는 원고를 팽개치고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래서 갈탄광으로 향한 것이다. 책벌레 족속과 거리를 두고 노동자, 농부 같은 단순한 사람들과 새 생활을 해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는 선착장 근처 술집에서 주인공은 조르바를 처음 만난다. 술집 안에서 조르바와 대화를 나누던 중 주인공은 산투르(그리스의 전통 악기)애 대한 조르바의 말을 듣고 조르바를 일꾼으로 고용하려고 마음먹는다.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을 보고 철자법 배우겠다는 생각은 당신도 안 하시겠지? 물래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 인간의 이성이란 그거지 뭐.." "산투르를 다룰 줄 알개 되면서 나는 전혀 딴 사람이 되었어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나 빈털터리가 될 때는 산투르를 칩니다. 그러면 기운이 생기지요. 내가 산투르를 칠 때는 당신이 말을 걸어도 좋습니다만, 내게 들리지는 않아요. 들린다고 해도 대답을 못해요, 해봐야 소용없어요. 안 되니까..." "산투르를 치려면 환경이 좋아야 해요. 마음이 깨끗해야 하는 거에요. 마누라가 한 마디로 될 것을 열마디 잔소리로 늘어놓는다면 무슨 기분으로 산투르를 치겠소? 새끼들이 배고프다고 끽끽거리는데 산투르를 어떻게 치겠소? 산투르를 치려면 온갖 정성을 산투르에만 쏟아야 해요. 알아듣겠어요?"
주인공은 조르바의 애기를 듣고 그를 '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라고 느꼈다. (이 부분도 공감하기 어렵다. 내가 좀체로 주인공의 입장과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겠지만...^^)

소설은 주인공과 조르바가 크레타 섬에 들어가 여관에 자리를 잡고 인부들을 불러 갈탄광애서 석탄을 캐는 과정을 기본 구조로 서술된다. 주인공이 조르바와 함께 지내면서 크고 작은 사건을 겪으면서 조르바의 말과 행동에서 조금씩 영향을 받는 과정을 보여준다. 조르바는 낮에는 일꾼들을 데리고 탄광에서 죽으라고 일하면서 주인공은 여관에 머물게 한다. 조르바는 여관 도착 첫날부터 여관의 주인 여자와 눈이 맞아 사귀게(?) 되고 주인공은 과부를 두고 마음 속으로 갈등을 거듭한다. 과부를 짝사랑 하던 마을 지주의 아들이 자살하고 마을 사람들은 아성을 잃고 과부를 때려죽인다. 조르바는 석탄을 캐고 이동시키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철탑과 캐이블을 구사,설치하였으나 처음 시범운영하는 날 실패하고 만다. 두 사람은 탄광사업 실패를 받아들이고 그날 밤 함깨 해방의 춤을 춘다. 실제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와 헤어진 후 그리스의 장관을 역임하고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하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을 진행했다.

주인공은 조르바와 함께한 몇 개월 동안 조르바를 통해 것들을 느끼고 배우고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조르바는 본능에 충실하고 말보다는 몸짓에 익숙한 사람이다. 질그릇을 만들려고 물레를 돌리는데, 새끼손가락이 거슬린다고 도끼로 잘라 버렸다. 주인공은 조르바에게서 열정과 자유를 발견하였다. 조르바가 내뱉는 말은 조르바의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주인공의 이제까지의 인생을 깡그리 씻어 내고 조르바에게서 배운 것들로 다시 채우기를 소망한다.

"기분 내키면 치겠지요. 내 말 듣고 있소? 마음 내키면 말이오. 당신이 바라는 만큼 일해 주겠소. 거기 가면 나는 당신 사람이니까. 하지만 산투르 말인데, 그건 달라요. 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 ...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 땐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산다는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요? 허리띠를 플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확대경으로 음료수를 들여다보면 물애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쬐그만 벌레가 우글거린답니다. 보고는 못마시지... 안 마시면 목이 마르지... 두목, 확대경을 부숴 버려요. 그럼 벌레도 사라지고, 물도 마실 수 있고, 정신이 번쩍 들고!"
"두목, 음식을 먹고 그 음식으로 무엇을 하는지 대답해 보시오. 두목의 안에서 그 음식이 무엇으로 변하는지 설명해 보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일러 드릴리다."
"....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씌여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 모든 걸 졸업했읍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역자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생과 작품의 핵심에 위치하는 노른자위 개념이자 그가 지향하던 궁극적인 가치의 하나인 '메토이소노(성화)'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매토이소노'는 '거룩하게 되기'이다. 이는 물리적, 화학적 변화 너머에 존재하는 변화라고 한다.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게 물리적 변화이고 포도즙애 포도주가 되는 게 화학적 변화라면,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성체)'가 되는 것, 그것이 '매토이소노'라고... 역자는 조르바가 사업채 하나를 '춤,으로 변롸시킨 것도 '매토이소노'라고 설명한다.

친구가 애기한 '마초'의 전형같은 조르바, 그리고 법정스님의 화두... 어쩌면 20세기 초의 그리스에서는 마초처럼 '책벌레'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조르바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본질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책을 덮고 나니 나 역시 작품 속의 주인공처럼 지금 종이벌레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다. 몇 년 전부터 하루하루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나에게 가장 친숙하고 가까운 것은 책... 나는 이들 책 속에서 무엇을 찾고자 하는 것인지... 혹시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결코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혹은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은 아닐지...

친구가 애기한 '마초'의 전형같은 조르바, 그리고 법정스님의 화두... 어쩌면 20세기 초의 그리스에서는 마초처럼 '책벌레'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조르바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본질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 2012년 1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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