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 석필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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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당파 싸움 때문에 망했다." 일제시대 이후 한국인들의 머리 속에 무의식처럼 뿌리 깊게 남아있는 생각이다. 나 역시 초중고를 다니면서 그렇게 교육 받았고 언론과 책, 드라마, 각종 자료를 통해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처음 의문을 가지게 한 것은 대학 초년 시절에 읽은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에 당파 싸움이 없었을까? 그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기 시작한 이후 이해관계나 생각의 차이로 인하여 별개의 집단을 구성하여 서로 간에 이견이 생기거나 다툼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당파 싸움'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당파 싸움'은 어떻게 진행되었고 조선에서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당쟁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 역사를 분석한 것이다.

저자의 조선당쟁사를 읽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 현대정치사가 오버랩되었다. 그만큼 인간의 속성, 정치나 정당의 성격과 구조, 구조적인 모습, 한반도라는 동질성, 문제의 뿌리가 비슷하다는 것을 느낀다.

저자는 조선에서 달파란 말이 사용되기 전에 스스로 이를 일컫는 말이 '붕당'이었다고 설명한다. 1392년 조선 건국 이전 고려 말기에 한반도에서는 신흥사대부가 고려의 변화를 꿈꾸었다. 신흥사대부 중 역성혁명을 꿈꾸는 이들이 정도전, 조준 등이었고 온건개혁세력은 정몽주, 길재, 이색 등이었다. 역성혁명 이후 건국공신 중심의 훈구파가 집권과 동시에 개혁세력을 숙청하였고 조선 건국을 반대한 온건개혁파의 나머지 세력은 중소지주라는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향촌 사회를 장악하기 위해 힘썼다. (8.15 해방 후 상황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키워진 두 개의 정당, 즉 이승만의 독립촉성회와 한국민주당의 뿌리가 모두 자주계급이란 점에서 조선의 훈구파-사림파 구도 또는 조선 말기의 노론파-소론파와 연계성이 짙다.)

조선 건국 후 약 80~90년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공신 집단은 훈구파는 부패하기 시작했고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 때부터 온건개혁파는 훈구파는 전횡과 부패에 환멸을 느끼는 임금과 백성들의 지지를 업고 하나의세력을 형성하여 '사림파'로 등장했다. 훈구파는 당연히 사림파의 등장을 반기지 않았고 신진세력을 공격하였다. 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 10년의 갑자사화, 중종 14년의 기묘사화, 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는 모두 사림파에 대한 훈구파의 공격안 것이다. 사림파는 한 번 사화를 당할 때마다 수 십명씩 처형당하는 등 극심한 타격을 입었으나 조금 시간이 흐르면 다시 재기에 성공하여 제14대 임금 선조 때에 이르면 드디어 훈구파는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기 된다. (이 부분도 1987년 6월 항쟁 이후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이 생각나게 한다. 조금 다른 점은 김영삼의 경우 줄곧 야당이었다가 여당과 손을 잡고 정권을 획득했다는 것...)

사림파는 훈구파의 탄압에 맞서 싸울 때는 하나의 정치세력이자 동지였지만 훈구파를 물리치고 집권당이 되자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색당쟁'이라고 부르는 조선의 정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집권이 분열로 이어지는 것은 정치사에서 흔하다. 살림하고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집권 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동인과 서인은 이념과 정책이 서로 달랐다. 이념이나 정책으로 볼 때, 동인의 뿌리는 퇴계 이황으로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시작되었고 서인의 뿌리는 율곡 이이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으로 시작되었다. 동인과 서인의 정책의 차이는 토지를 둘러싼 싸움이 컸다. (야당이 분열하는 부분은 한국현대사와 다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이 분열하면서 군사독재 정권이 연속집권하도록 만들었다. 이 점에서 한국현대사의 야당은 조선시대 사림파 만도 못했다.)


사림파의 집권 이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지고 동인과 서인이 각각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자세한 상황은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사림파가 집권 이후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계기가 정5품의 '이조정랑'이라는 벼슬자리 때문이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조선시대의 인사권은 삼정승이 아닌 이조에 있었는데 이조판서의 전횡을 방지하기 위해 관료들에 대한 감찰과 탄핵권한이 있는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리 추천권은 이조의 낭관(?官), 즉 '이조정랑'에게 전권이 있었던 것이다. 이조전랑의 후임자는 전임자에 의해 추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조전랑은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대부분 판서와 재상까지 승진할 수 있는, 출세가 보장된 자리였다. (이런 면에서는 조선시대의 인사정책이 현대의 국가체계보다 합리적으로 보인다. 역사학자들은 조선의 정치구조가 합의체적인 운영을 추구했다고 말한다. * 아래 그림 : 시기별 정당 분포도)

 

저자는 조선 중기까지의 붕당 정치는 조선의 체제에 긍정적인 기능을 한 것으로 평가한다. 각 붕당은 상대 붕당과 상호 공존의 틀 안에서 이념과 정책을 둘러싸고 경쟁을 하였으며 양반들의 계급적 이익에 기초해 있다는 근본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국가체제와 백성들의 삶에 나름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건국 이후 300여년이 지난 제18대 임금 현종 재위 중인 17세기 후반에 '예송 논쟁'으로 발생하기 시작한 당쟁은 그러한 붕당 간의 공존의 틀을 깨트렸다. 당시 여당이었던 남인은 야당이었던 서인을 인정하지 않았고 서인 또한 남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붕당의 이유가 공허하기도 했을 뿐더러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삼았고 공멸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현대 한국 정치집단에서는 이러한 경우가 발생하지 않고 있다. 여러가지 다른 시대적인 변화도 있겠지만, 해방 이후 지금까지 상대 정치집단을 적으로 삼고 죽이려고 하는 것은 일방, 특히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여당세력일 뿐이다. 현대 정치라고 불리우던 기간이 60년 정도로 짧기도 하지만....)

현종 이후 제21대 임금 영종 즉위까지 공멸의 당쟁은 이어졌다. 영조와 다음 임금인 정조 재위기간 까지는 공멸의 당쟁을 공존의 당쟁으로 변화시키려는 '탕평'의 시대였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이유는 격화되는 당쟁의 뿌리인 붕당의 재생산에 대처하여 국가 차원에서 고급인력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정조의 재위기간을 짧았고 급작스러운 정조의 죽음은 조선을 최악으로 이끈 세도정치라는 극단적 반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정조를 상대적으로 선호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정조의 개혁은 역사적으로 볼 때 구조적인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저자는 조선 후기 정조의 정치적 과제는 국왕이 남인들과 손을 잡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 들어 새롭게 등장한 신흥세력과 손잡고 양반 독점의 정치 구조를 허물어야 했던 것이다. 정조는 서얼들을 규장각에 등용하는 등 개혁적이기는 했지만 정조 자신이 사대부 중심의 정치 구조 자체를 타파하려는 생각은 부족했다. 


저자는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토리당과 프로테스탄트 중심의 휘그당이 나타난 17세기 후반을 정당의 기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서양인의 시각에서 '웃기는 이야기'로 평가한다. 그는 이미 그 600년 전에 중국에서는 이미 가진 귀족 관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구법당과 못 사진 농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신법당이 분립되었음을 지적한다.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했던 15~16세기부터 정당의 맹아는 시작되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당초 이 책의 발간에서 저자의 문제의식이었던 조선은 당쟁 때문에 망했을까? 저자는 이런 주장을 단호하게 배격한다. 조선은 중국의 청나라와 일본의 무사정권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자졌듯이 조선 역시 봉건시대에서 근대시대로 넘어가는 사회적 변화를 정치가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무너진 것이다. 공멸 수준의 당쟁과 세도정치는 그렇게 무너져가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특성의 한국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반대로 조선의 당쟁을 옹호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조선에서 정당이 일본보다 일찍 발생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당의 존재가 사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당쟁이 발생한 초기에 동인들과 서인들이 서로의 부패를 감시하는 기능을 했던 것등 여러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즉, 저자는 조선의 당쟁을 한마디로 "긍정적이다" 또는 "부정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고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긍정성과 부정성이 시기 구분에 따라 달라지는데 특히 당파끼리 공존을 추구할 때 긍정적이고 독존을 추구할 때 부정적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당파 싸우 망국론'을 주도적으로 생산하고 확산시킨 세력이 일본이었음을 지적한다. "조선 정치사를 압축하는 한 개념으로 '당쟁'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학자는 일본인 시데하라 히로시였다. 그는 1900년 학정참여관으로 조선에 와서 이른바 조선의 교육개혁을 단행한다면 명목으로 교육분야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었다. 그가 1907년에 펴낸 <조선정쟁지>에서 당쟁을 조선 정치의 특징이라고 규정했다. 히로시는 조선시대의 정당들을 ,주의를 가지고 서로 존재하는 공당이 아니라 이해관계에서 서로를 배제하는 사당'이라고 규정했다. 한국인의 특성임을 규정짓는 '당파성론'은 일본인의 이런 정치적 목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p.455) 일본은 조선이 당쟁 때문에 망했다는 생각을 한국인에게 주입시켜 망국의 책임을 침략자들이 일본이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에게 돌리게 하려는 통치 정책은 하나로 조선사를 이용한 것이다. 이처럼 조직적이고 한국사 지하자원을 고안한 것은 물론 조선총독부였고 이를 이론화한 인물들은 총독부 산하 소속의 학자들이었다. 1924년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이 문을 연 다음에는 경성제대 소속의 교수들이 이를 체계화했다.


저자는 조선의 당쟁사를 통해 현대의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을 "공존의 정치"라고 말한다. 특히 현대 한국정치사가 뿌리깊게 각인시켜 놓은 지역차별과 사상통제를 통한 '독존'의 위험을 지적한다. 조선 붕당정치의 교훈은 독존을 추구하는 정치 체제가 파멸시키는 것은 상대 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독존 정치 체제는 특정 정당, 정치세력이나 특정 지역을 넘어 조직 자체, 즉 나라와 민족과 국민 전체를 파멸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지역갈등과 사상통제, 그리고 '독존'을 추구하고 있는 한나라당과 수구우익 언론, 재벌 등 기득권층이 새겨야할 것이다.

창피한 사실이지만 나는 그동안 한국사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책은 그런 나에게 한국사, 특히 조선사와 인물들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서구역사와 서구 학자, 그리고 서구의 이론에서 크게 배우는 것이 있는 만큼, 같은 뿌리일 수 밖에 없는 조선의 역사와 인물, 사건과 정책에서는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 나이에 바보같긴 하지만...ㅋㅋㅋ

[ 2012년 1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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