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수사학
제이슨 델 간디오 지음, 김상우 옮김 / 동녘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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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26 서울시장 선거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끔 하였다. 나 역시 야권단일후보 경선 때 민주당 박영선 후보와 무소속 박원순 후보간의 TV토론, 본선 때 한나라당 후보 나경원과 야권단일후보 박원순의 TV토론을 지켜보면서 '말'과 '수사'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여기서 '수사'는 단순히 '말'이나 '대화', '연설' 뿐 만이 아니라 자신의 정책이나 의견을 표현하는 각종 방식과 매개를 뜻하는 개념이다. 공부모임 참가자들이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지난 10월 31일 이 책을 가지고 토론한 바 있다.

보통의 경우에는,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려 할 때에는 곧잘 막히는 경우가 많다. 서로가 사용하는 단어가 문구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같은 말이나 문구인데도 각자가 사용하는 쓰임새나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어울리고 대화하는 집단이나 계층이 달라지면서 자기들끼리만의 의사소통 방법이 생겨나기도 한다. 노동자나 농민들이 사용하는 단어, 직장인들이 사용하는 단어, 법률가나 의사들이 사용하는 단어, 정치가나 관료가 사용하는 단어도 다르고 직업에 따라 사용하는 단어가 다르기도 하다. 학자들과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단어도 물론 다르다. 그리고 TV나 라디오 등 미디어를 자주 접하는 사람들은 그 미디어에 따라 한동안 '유행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특정한 상황이나 개념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다르거나 알아듣지 못할 경우 서로의 의사표시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오랜 시간 서로 이야기를 하면 결국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하거나 설명하는 시간이 짧게되면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일상생활에서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자리, 관계에서는 의사소통이 불명확하더라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의사소통이나 어떤 내용을 꼭 설명해야 하는 입장이 되면 문제가 달라질 것이다. 상대방에 따라, 상황에 따라, 내용에 따라, 주어진 시간에 따라 몇 명, 몇 백명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려면, 내용을 소통하고 공감하려면 표현하는 측이 좀 더 세심하게 준비해야 할 것이다.

2010년 튀니지에서부터 시작되어 올해 리비아까지 이어졌고 지금도 뉴욕에서 진행 중인 '재스민 혁명'.. 튀지니와 이집트 혁명의 승리에는 소셜 미디어의 힘이 결정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 튀니지의 전태일로 불린우는 부아지지의 분신을 전 세계에 알리며 운동의 불길을 당겼고, 인터넷이 막힌 상태에서도 시민단체들은 아날로그 방식을 이용해 연대를 이뤘다. 이번 혁명은 소셜 네크워크를 활용한 새로운 방식의 문화혁명인 것이다.

이제 대항 담론과 거친 연설만으로 혁명이 가능하던 시대는 지나간 것이 분명하다. 포스팅 하나, 트윗 한 줄로 논쟁이 시작되고, 아이폰, 안내방송, 광고판 등의 메시지가 사람들을 거리에 나서게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은 모이고 흩어지며 혁명을 창조해낸다. 이데올로기, 경험, 문화, 연령 등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없는 중심 없는 무리가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는 다중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4대강, 복지삭감, 전세난, 물가불안정, 한미FTA, 부정선거 등의 사회적인 문제가 폭발되는 상황에서 활동가들의 창조성이 끊임없이 필요한 이 시대... 세상을 바꾸려는 활동가들은 어떤 방법으로 준비하고 대응할 것인가? 어떻게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행동하게 할 것인가?

이 책의 저자 간디오는 21세기 급진주의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전달하는 ‘방식’ 즉, ‘수사’를 꼽는다. 세상이 바뀌려면 무엇보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야 하며,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활동가와 조직가의 수사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활동가들에게 필요한 언어적, 비언어적 전략들을 제공하기 위해 쓰여졌다. 수사의 필요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연설하고 논증하고 설득하고 글을 쓸 때 바로 적용 가능한 기본적인 수사 전략을 제시하는 것이다. 전달하려는 ‘내용’에 몰두하느라 전달 ‘방법’에 소홀했던 이들, 더 나은 소통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저자의 주장과 근거, 이론적인 배경과 실무적인 아이디어와 전술들은 어느 정도 수긍도 가고 활동가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한국의 활동가들이 번쩍이는 혜안을 얻거나 기발한 아이디어나 '수사학' 이론, 전술을 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활동과 문화가 한국의 그것과는 다를 뿐 아니라 저자는 책 속에 구체적이고 다양한 사례보다 이론에 가까운 설명과 주장을 더 많이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저자의 글을 통해 두 가지 중요한 것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중'과 '중심 없는 운동'이다. '다중'과 '중심없는 운동'이라는 개념은 2011년 한국사회의 모습을 상당부분 설명하고 있다. 

첫번째는 민중, 대중, 노동계급, 다중이라는 개념의 재정립. 저자는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를 인용하면서 21세기에 맞는 집단들의 개념으로 '다중 multitude'를 제시한다. 그들은 "21세기 현재의 급진적 시대가 '공통'을 통해 서로 접속되어 중심 없이 자율로 행동하는 집단, 민중, 연합에 의존하는 동시에 그것들을 진작한다"고 말한다. '다중'은 '민중', '대중', '노동계급'과 같은 이전의 전통적 개념을 새롭게 개념화한다. '민중'은 사람들을 정체성이 하나 밖에 없는 단일체로 총체화하고 '대중'은 사람들을 차이가 배제된 획일체로 환원하며, '노동계급'은 노동과 관련된 정체성만 있는 특정한 유형을 지칭할 뿐이다. 이러한 기존 개념은 결국 권력관계와 사회현실을 창조하는 다수의 활동을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중'이 인정하는 것은 다수의 차이이며, 민주적 삶의 형식과 다양한 사회적 행위자를 위한 공통의 투쟁이며, 소통에 의해 창조된 세계를 창조하는 활동이다."는 것...

두번 째는 '중심 없는 운동'이다. 이는 단 하나의 운동이 있는게 아니라 상호 접속된 다수의 운동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과거와 달리 전체의 운동의 상징하고 조직하는 단 한 명의 상징적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급진주의 소통의 생명력은 다중의 모세혈관 곳곳에 네트워크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단 한 명, 단 한 집단(예를 들어 전위당)이 행동과 사회 전체 사이를 매개하는 책임을 지지 못한다. 이제는 다수의 사람, 생각, 운동이 함께 진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인류사회 전체에서 발견되는 '반권위주의', '탈권위주의'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중심 없는 운동', 그리고 반권위주의의 성공은 개인의 책임감에 따라 좌우된다. 즉 활동가 저마다 책임지고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 


최근 통합진보당의 공동대변인으로 선임된 진보신당 전 노회찬 대표. 그는 정치판을 뒤엎는 촌철살인의 어록을 갖고 있는 몇 안되는 정치인이다. 2004년 대선에서는 “불판을 갈아야 한다”와 같은 신선하고 날카로운 비유를 던져 그를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감동시켰고, ‘웃음화법, 애드리브, 비유의 달인’ 등의 수식을 얻으며 예상보다 많은 표를 획득했다. 이후에도 그는 첼로연주, 점심 번개, 친절한 트위터 활동 등으로 ‘노동운동은 거칠다’라는 편견을 깨고 부드러운 진보의 재탄생을 알리고 있다. 그가 말하고, 행하고, 느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은 바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수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과 효과를 기억하는 활동가들은 많지 않다. 수사는 억지로 꾸미는 것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보다는 행동이다”, “메시지를 다듬는 것은 기만이다”, “고함과 함성은 급진적 변화의 진실한 표현이다”와 같은 편견이 자리 잡고 있어 소통의 ‘방식’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미약하다. 

이 책은 이러한 ‘신화’를 깨는 것에서 시작한다. 
1장. [수사는 행동이다]에서는 우선 수사학의 기원인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 수사가 소통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서술한다. 원래 수사학은 “설득하고, 추론하고, 분석하고, 나아가 현실을 창조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려는 활동가들의 목적과 충분히 연결된다. 
실제로 저자는 2000년 4월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항의운동 장면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엿 본 후에 본격적으로 활동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현장에서 활동가와 조직가들을 만나며 ‘수사학’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68혁명 이후 등장한, 소통과 수사를 이용해 세상을 바꾸는 ‘신급진주의’이론을 확장, 실천해왔고, 집회나 모임에서의 연설, 토론, 논증을 분석해왔다. 그러면서 활동가가 어떻게 자신의 소통 능력을 개선해 냈는지 관찰하며 이 책까지 집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현실을 비판하고 지금과 다른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하는 책은 많다. 그러나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해 어떤 방식으로 함께 가야 하는지 일러주는 책은 흔치 않다. 이 책은 이런 고민을 하던 활동가들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출간한 것이다. 활동가들이 택한 운동방식에 따라 활용할 수 있는 수사학 실용서임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문장과 더불어 사파티스타, 애비 호프만, 네그리, 들뢰즈, 1999 WTO, FTA 반대 운동 등 인물과 사건의 풍부한 사례를 들며 이해를 돕는다.

저자의 '수사'에 깔린 논리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수사를 바꾸면 소통이 바뀐다. 소통을 바꾸면 경험이 바뀐다. 경험을 바꾸면 사람들의 성향이 바뀐다. 성향을 바꾸면 사회에 대한 심대한 변화의 조건이 생긴다."

2장. [급진주의자들이 갖춰야 할 수사의 기본 원리]에서는 대중연설, 글쓰기, 설득, 논쟁, 권유 등 다양한 수사 전략을 분류하여 각 상황에 필요한 지침을 제시하며 그 효과까지 예상해 볼 수 있게 해준다. 아무리 다양한 방식의 운동이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메시지 전달방식은 글쓰기와 말하기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확실한가? 목표는 무엇인가? 청중은 어떤 사람인가? 연설장의 상황은 어떤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주도면밀한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가령, 신문, 전자우편, 문자, 웹 등에 발표하는 ‘글쓰기’와 대중 앞에서 하는 ‘연설’은 분명히 다르게 준비해야 한다. 눈으로 읽는 글에서는 무엇보다 ‘첫 문장’에 신경을 써야 하는 반면, 귀로 듣는 연설의 연설문에는 숫자나 어려운 용어를 넣지 않는 게 좋고 몸을 활용하면 효과가 높기 때문이다.

'민중생존권 쟁취하자' '군사독재 타도하자' '신자유주의 철폐하자' 등의 구호는 자신들만 이해하고 대중들이 낯설어하게 된다. 
계급모순, 노동의가치, 자유주의자, 부르주아정권, 반자본주의.... 등도 마찬가지... 

3장. [언어로 세상 바꾸기]는 언어가 곧 생각을 바꾼다는 논리에서 시작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곧 언어로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를 바꾸면 생각도 바뀔 수 있다. 먼저 저자는 활동가들은 언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것이 자신이 목표한 운동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주로 어떤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설득력 있는 연설을 하는 활동가들은 어떤 단어들을 택하는지 관찰할 필요가 있다. 언어의 선택은 곧 가치와 이미지를 만들고 그것에 따라 정치적 선택, 감정의 반응, 사회적 행위가 생기기 때문이다. 경찰을 ‘짭새’라는 하는 것은 경찰의 권력에 대항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의 언어를 바꿔라, 그러면 사람들의 생각하는 방식이 바뀐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라, 그러면 사람들이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 바뀐다. 사람들의 방식을 바꿔라, 그러면 사람들의 믿음, 가치, 태도, 행동이 바뀐다. 이 모든 것을 바꿔라, 그러면 사회의 방향이 바뀐다.” 

또한 저자는 권력을 위해서 사람들의 이해를 곡해하거나 혼동시키는 언어를 분석해, 본래의 의미를 알리는 것 역시 활동가의 몫이라고 주장한다. 가령 미국 전쟁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부수적 민간피해’, ‘정밀무기’, ‘민주주의 확산’ 등과 같은 단어에는 미국의 전쟁은 인간적이며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합리화가 담겨있다. 뿐만 아니라 ‘아나키즘’, ‘공산주의’와 같이 부정적인 의미가 고정화되어 있을 경우에는 이 틀을 깨기 위한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시효성을 잃은 단어 대신 ‘수평주의’, ‘탈중심화’, ‘비물질적 노동’, ‘프리거니즘’, ‘해킹행동주의’ 등과 같이 다중의 시대에 걸맞는 단어를 창조하고 사용하는 것 역시 활동가의 역할이다. “언어를 탐구하여 더욱 확신에 차고, 더욱 독립적이며, 더욱 자기를 긍정하는 정체성을 만들어야 한다.”

‘수사’와 마찬가지로 몸의 모습인 ‘매무새’ 역시 활동가들에게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다. 외모를 가꾸고, 몸을 단장하는 것은 흔히 진보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능한 소통자는 연설장이나 모임의 분위기와 자신의 외적 효과를 맞출 줄 안다. 사람들과 소통하기 유리한 매무새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4장. [몸으로 하는 혁명]의 많은 부분은 자신의 몸이 혁명의 도구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활용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몸은 늘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곳이기에 수사적 효과가 아주 크다. 예를 들어 완전한 채식주의자의 마른 몸은 지속가능한 생태, 자연 존중, 윤리적 소비 등을 연상하게 한다. 의도하지 않더라도 활동가가 앉고, 서고, 행하는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이 수사인 것이다. 또한 저자는 몸이 글이나 말보다 활용도가 높기 때문에 글이나 말주변에 자신이 없는 활동가들이라면 몸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좋다고 제안한다. 메시지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기, 노동자들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을 하기, 거리극이나 플래쉬몹 연출하기 등도 효과를 볼 수 있는 수사 전략이다.

5장. [21세기 신급진주의 수사]의 특징에 대해 언급한다. 급진주의 역시 ‘다양성 인정, 복수의 역사 끌어안기, 복합적인 질문 선호, 대결적인 미래 그리기’ 등을 내걸며 중심없는 공동체, 맥락을 횡단하는 소통, 새로운 형태의 지도력으로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네크워크를 활용한 수사 전략은 신급진주의에 유용하다. 
독립매체 만들기, 1인 미디어,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하기 등은 신급진주의의 특징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좋은 예다. 우리는 이미 촛불을 통해 이 효과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소통과 현실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수사학을 활용할 것. 
저자의 이 주장을 새기고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욕망하며,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상상하고, 창조할 때 사람들이 꿈꾸는 다른 세상은 가능할 수 있다.

[ 2011년 12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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