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심다 - 박원순이 당신께 드리는 희망과 나눔
박원순 외 지음 / 알마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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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변호사, 그리고 '참여연대'라는 시민단체의 사무처장... 이 정도가 내가 기억하는 박원순씨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인권변호사로서는 조정래 변호사를 더 기억하고 있었고 '참여연대'는 2000년 총선에서 낙선운동을 이끌었다는 기억과 재벌 독점의 고리를 끊으려고 노력하는 시민단체 정도로 기억하는 수준...
결국 그동안 나는 박원순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지난 8월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진행되어 오세훈 전시장이 시장직을 사퇴하고 곧이어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되면서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안철수 원장이 서울시장 후보로 급부상하고 더불어 한명숙, 박영선, 박원순씨등이 야권의 후보로 거론되었다. 일주일 정도 지나자 안철수 원장과 박원순 변호사가 '후보단일화'에 합의하면서 신선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안철수 원장에 대해서는 여러 신문기사나 인터넷 글, TV 프로그램을 통해서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문득 안철수 원장과 비교하여 박원순 변호사라는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여론조사에서 50%가 넘는 지지율을 얻고 있는 사람이 5% 지지율에 그친 사람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할까? 박원순 변호사의 어떤 점이 안철수 원장의 양보를 이끌어 냈을까? 박원순씨의 삶과 철학, 인생역정과 고민, 아이디어와 비전이 궁금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박원순 변호사에 관한 책을 두 권 구입하여 지난 추석 연휴에 읽었다. 이 책 [희망을 심다]와 [아름다운 세상의 조건]...
한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동고동락을 함께해 보거나 여행을 함께 떠나는 등의 방법이 있지만, 내 입장에서 가능한 것도 아니고 시간도 부족하니 책을 통해서 어느정도 박원순 변호사를 알고 싶었다.
(맨 처음에는 내가 박원순 변호사의 책을 읽어보고 지인들에게 책에 대한 소감과 책을 통해 알게된 박원순 변호사를 소개하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책만 읽고 서평을 이제야 쓰게 된 것...)
 
아래는 이 책의 목차...
 
1장 미안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 깡촌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박원순
2장 석 달 동안 양말 한 번 안 벗었어요 - 서울대생이 된 촌놈 박원순의 공부법
3장 검사 그만두고 공부하고 싶었어요 - 6개월 만에 사표 쓴 청년 검사 박원순
4장 구석구석에서 할 일이 쏟아지는 원순씨 - 인권변호사, 시대의 영웅들을 변론하다
5장 앞으로 나아간 2보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 밖에서 본 한국, 밖에서 한 궁리
6장 맥주 구걸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 대한민국 안 걸리는 데가 없는 '박변 주소록'과 참여연대
7장 나눔과 봉사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 아름다운재단의 아름다운 사람들
8장 한국 사회의 업그레이드를 꿈꾸며 - 희망을 나누는 희망제작소
9장 세상은 버린 만큼 얻는다 - 시민운동은 블루오션이다
10장 일하다 과로사하는 게 꿈입니다 - 즐겁게, 신나게 일하는 사회
 
원순C가 말하는 어린시절, 학생시절, 대학시절, 검사,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 시절을 들어보면 가장 먼저 부모의 역할이 새삼스럽게 중요함을 느끼게 된다.
부모님의 성실한 삶의 태도와 부지런함, 이웃에 대한 사랑과 정직한 모습이야말로 원순C의 성격과 태도,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 입학 이후 원순C가 독서실, 입주과외, 전셋집, 고시공부, 유학생활에서 보여준 모습은 어린 시절 부모님 곁에서 보고 느끼고 자란 가정환경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모습들은 결코 가장하거나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고 하여 꾸준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고난의 내재화'라 말한다.
"하지만 내가 힘들었다고 말하는 이 모든 것은 어린 시절 그 농부의 일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p.5)"
 
군사쿠테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온 세상이 감옥이었던 시대, 차라리 고난의 길에 서 있는 수인들이 편을 드는 것이 마음 편했던 원순C였다. 검사 생활을 1년 만에 때려치우고 변호사로 개업한 원순C는 곧바로 인권변호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조영래 변호사를 통해 인권변호사의 길에 뛰어든 원순C는 1985년 미문화원점거사건, 1986년 부천서성고문사건과 보도지침사건, 건대사태, 1987년 박종철고문치사사건과 구로구청부정선거사건, 풀빛출판사사건, 민족미학연구소사건, 서울대우조교성희롱사건 등 중요한 시국사건을 맡아 변호했다.
원순C는 스스로 당시에 조영래 변호사를 통해 "사회적 통찰력을 가지고 법률을 통해서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가는 것"과 "그것을 혼자의 힘으로가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세력을 연대시키면서 풀어가는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양김씨의 분열은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 역시 이에 좌절했고 1989년부터 시작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으 몰락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거대한 시대의 흐름이 급박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원순C는 조영래 변호사의 조언으로 1991년 영국으로 떠나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에서 자원봉사도 하고 강의도 하고 유럽의회, 함부르크의회에서 세미나를 하면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분법을 극복해내고 유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1년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 도서관, 법대 도서관, 워싱턴의회 도서관, 미국국립문서보관서 등에서 자료를 복사하고 자료를 구하여 공부했다.
 
원순C는 귀국 후 사람들과 함께 참여연대를 설립했다. 이전 방식의 저항운동이 아닌 새로운 사회운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현 사회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을 세우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해야 될지 고민하고 있던 사람들이 합류했다.
참여연대는 1994년 국민생활최저선운동, 1995년 사법개혁운동, 1997년 작은권리찾기운동, 1998년 소액주주운동, 1999년 예산감시정보공개운동, 2000년 부적절한국회의원후보자에대한공천반대및낙선운동, 2001년 이동통신요금인하운동, 2002년 대선정치자금감시운동 등의 활동을 펼치며 강력한 정치적 힘을 가진 시민단체로서 한국사회의 많은 변화를 이루어냈다. "역할과 한계를 아는 운동이 필요하다.(p.266)"
 
2002년 참여연대 내외부의 많은 이들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원순C는 참여연대를 '폭력적'으로 정리한 후 미국 헤리티지재단에 갔다. 거기서 그는 "모금은 예술이고, 과학이다"라는 말을 듣고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재단의 사례와 제도를 연구한 후 한국에 돌아와 '세상의 좋은 변화를 위해서 꿈꾸고 일하는 사람들을 좀 편하게 해주자'는 취지에서 아름다운재단을, 재활용과 사회적 기업의 모델인 아름다운가게를 설립했다.
아름다운재단은 한국사회에 "1% 나눔운동"을 통해 기부와 나눔 문화를 확산시켰고 공공의 장점과 기업의 장점을 결합시킬 수 있는 모델인 사회적 기업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켰다.
아름다운가게는 7년 만에 전국 100여개 매장, 상근간사 300명, 자원봉사자 5,000명을 기록했다.
 
원순C는 2006년에 아름다운재단을 떠나 희망제작소를 설립했다.
그는 희망제작소를 '21세기 실학운동'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소프트웨어나 콘텐츠에 취악한 구조이며, 총론은 강한데 각론은 없다'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희망제작소는 '씽크탱크(think tank)'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작지만 가능성 있는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데 주력하는 '두탱크(do tank)'를 지향한다. 또한 '지역사회가 붕괴되면 중심도 흔들린다'는 이론을 가지고 붕괴되어 가는 지역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실증주의자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나 큰 거대담론 과잉의 시대이고, 이념을 흑백으로 무모하게 분류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각론과 디테일한 부분을 고민해야 하며, 같은 부분에서는 합의하고 다른 부분에서는 조율해나가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국가 안보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입니까? 국가보안법을 존치하자고 하는 사람들은 인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입니까? 둘 다 해야 되잖아요"라고 말한다.
 
원순C가 인권변호사,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 활동을 하는 과정은 활동가들 뿐 아니라 개인이 시대의 흐름과 사회의 변화를 어떻게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주도하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권변호사로서의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 후 시대가 변했음을 깨닫고 자신이 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분야로 참여연대를 설립하여 새로운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참여연대에서 10여년 정도 성공적으로 활동한 후,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후배들을 위해 과감하게 참여연대를 박차고 나간 후 '나눔과 기부'를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를 설립했다. 또한, 아이디어와 창업, 참여와 사회적 기업 등을 사회활동으로 승격시키면서 희망제작소를 설립하게 되었다.
 
시민운동가나 직장인, 전문가라는 분야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한 자리, 한 위치, 한 역할에서 10년 이상 꾸준하게 성과를 내고 스스로를 혁신하기가 무척 어렵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통이 어렵고 사고방식과 일처리 방식이 고루해지게 된다. 개인과 조직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개인들의 활력과 창의력은 억눌리며, 조직은 후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무원 조직은 10년이 지나면 해외 유학을 보내주고 대학교수는 안식년 제도를 도입하고 기업은 새로운 역할이나 업종으로 재배치시켜준다. 물론, 시대의 흐름이나 환경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은 유학, 안식년, 재배치의 기회를 얻어도 그것을 자기 혁신과 새로운 가치 창출로 연결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기회마저 생각하지 못하거나 얻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원순C는 젊은이들에게 주는 메시지도 잊지 않았다.
"꿈을 꾸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라고 미국 사람인데, 일본 홋카이도에서 교육운동을 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보이스, 비 앰비셔스 Boys! Be Ambitious'라는 말을 했죠. 앰비션 ambition이라는 것이 꼭 좋은 의미로만 해석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람은 그런 앰비션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꿈이잖아요. 좀 황당해도 좋으니까 젊은 시절에는 그런 꿈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 시기에 그 말 한마디가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우리 시대에 제가 그 역할을 충분히 못했다고 생각하는데요. 더 큰 역할을 하는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그런 천박한 꿈이 아니라 정말 세상을 향해서 자기 일생을 한 번 바쳐보겠다는 꿈을 꿔봤으면 좋겠어요. 인생을 살다보면 마모되고 성숙되면서 결국 현실화되거든요. 청년 시절에는 무모한 꿈도 꿔봐야 합니다. 그게 그들의 특권이고 장기고,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시기잖아요. 세상을 살다보면 안 그래도 소시민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젊은 시절 그런 꿈이라도 꿔봐야 하지 않겠어요?(p.381)"
 
 
이 책을 읽고나서 원순C에 대해 기본적으로 신뢰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야권단일후보 경선 때부터 서울시장 선거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고  지난 10월 26일 원순C는 개표 결과 큰 표 차이로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시장 업무를 개시한 이래 지금까지 자신의 지지자들과 서울시민 대다수를 위해 좋은 정책을 실시하고 있고 일방주의가 아닌 소통으로, 토건행정이 아닌 복지행정으로, 돈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으로 서울시정을 바꾸어나가고 있다.
자신이 평생에 걸쳐 고민하고 준비해왔던 '희망'을 '시민이 시장이다'라는 구호 아래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한 가지씩 정책을 실현시켜 새로운 정치와 행정의 모범을 실현시켜 나가길 기대해 본다.
 
[ 2011년 11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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